소설리스트

파공검제-220화 (219/508)

220. 이상한 낌새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냐?”

팽적호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나무라자, 팽수혁이 남궁천을 힐끔 본 후에 입을 열었다.

“산동악가에서 보낸 지원군이 흑무곡 무인들에 의해 전멸했다는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뭐야?”

팽적호가 놀라서 소리치고, 남궁천도 흠칫거리며 돌아보았다.

이건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팽적호가 다그치듯 물었다.

“하면 다른 곳은? 황보세가는 어찌 됐느냐?”

황보세가 역시 악가와 마찬가지로 산동 성도에 터를 잡은 가문이었다. 악가에 비해 지원이 다소 늦었지만 그들 역시 지원군을 보냈다는 소식을 전달해 왔었다.

팽수혁이 생각만 해도 열불이 뻗치는지 씨근거리면서 말했다.

“그놈들은 무인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악가 무인들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 중이라고 합니다.”

“뭐, 뭐라?”

“상황을 좀 더 신중히 살펴본 다음 다시 인력을 보강해서 오겠답니다.”

“아니,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당장 죽어갈 판인데!”

그야말로 당장 죽어가는 물고기에게 사흘만 참으면 바다에 풀어준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소리 아닌가?

가만히 듣기만 하던 남궁천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황보세가는 나설 생각이 없는 것 같네요.”

“허어! 이곳이 무너지면 다음 차례는 산동성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알고 있겠죠. 하지만 그때는 이미 무림맹이 힘을 보탤 것이고, 산동에는 악가와 황보세가가 밀접해 있으니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이런 얼빠진 것들! 쉽게 건너갈 개울물을 놔두고 강물이 불길 기다리고 있는 꼴이라니!”

“우선 침착하세요. 언 가주를 만나서 얘기를 좀 더 나눠봐야 할 것 같네요.”

“그래야겠군! 가세!”

팽적호가 성큼성큼 걸어가려고 하자, 남궁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가주님은 여기 남아서 공부하세요.”

“뭐, 뭣?”

이 상황에서도 분위기 못 파악하고 놀리는 건가 싶어서 발끈하던 팽적호는 남궁천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남궁천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중했기에.

“적들이 치고 들어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혼원벽력신공의 오의를 깨우치는 게 중요해요. 실전이라면 조만간 질리도록 할 거잖아요. 지금은 공부를 할 때입니다.”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나더러 염불이나 외란 말인가!”

“그 염불을 잘만 외면 일격에 하나 처리할 것도, 서넛은 처리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괜히 탁상공론에 머리 하나 보태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 되겠죠.”

“끄음.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럼 진심이죠. 설마 제가 이 상황에서도 팽 가주님은 머리가 나쁘니까 회의에 끼어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빈정거리기라도 하겠습니까?”

너무 구체적이어서 정말 빈정거리는 것 같잖아!

“걱정 말고 집중하세요. 이왕이면 폐관수련이라도 권해 드리고 싶네요. 가주님의 혼원벽력신공은 이미 완숙한 경지입니다. 짧은 시간 대성은 어렵겠지만 분명한 성과가 있을 거예요.”

“하나 조만간 적이 들이닥칠 터인데.”

“원래 시험도 벼락치기할 때 머릿속에 제일 잘 들어오는 법이죠.”

팽적호가 희미하게 침음을 흘렸다. 어쩌다가 이 나이가 되어서 공부하라고 야단맞는 신세가 되었던가?

괜히 처연한 생각마저 드는데, 남궁천이 얼른 손을 덥석 잡으며 말을 붙였다.

“팽 가주님. 하북의 미래가 팽 가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흐음. 내 손에 하북이…….”

“그럼요. 암요! 그렇고말고요.”

“크흠! 알겠다. 나는 좀 더 수련에 집중할 테니, 혁아, 네가 나 대신 다녀오너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팽수혁이 다부진 표정으로 대답하는 걸 보며 남궁천이 내심 안도했다.

‘다루기 쉬운 부자라서 다행이야.’

하나 남궁천이 한 말이 완전히 빈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팽적호가 혼원벽력신공의 뜻을 조금이라도 깨닫게 된다면 큰 힘이 될 터였다.

그 한 사람만으로도 전체 전력을 이 할 이상 끌어 올릴 수 있으리라.

남궁천과 팽수혁이 가주전에 들어서자 이미 언가의 수뇌부가 모여서 비상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어서 오게, 남궁 소협. 팽 소협.”

“대략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무림맹이 파견한 청랑단은 언제 도착이랍니까?”

“그게 난감하게 됐네. 지금 청랑단에 다소간의 문제가 있어서 전력을 보강하여 출발한다더군.”

그러자 듣고 있던 팽수혁이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아니 그게 무슨 병신 쌈 싸 먹는 소리랍니까? 이것들이 하나같이 미쳐 돌았나? 당장 여기가 위급한데!”

“나도 답답하군.”

언양걸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남궁천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이상하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건 딱 하나밖에 없다.

악가에서 보낸 지원 인력이 흑무곡 무인들에게 전멸당했다는 것.

하지만 그 후에 이어진 황보세가나 무림맹의 대처 방식은 자연스럽지 않다.

이 묘한 위화감.

‘역시 이건 그 능구렁이를 상대할 때 느낀 감각인데…….’

도망자로서 평생을 살아온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모종의 음모가 느껴진다.

어쨌거나 오지 않을 손님을 마냥 죽치고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는 일.

남궁천이 얼른 물었다.

“개방은요? 거기도 안 온대요?”

“아닐세. 개방은 곧 도착할 걸세. 다만 이틀 정도 걸릴 것으로 보이네.”

“일단 그나마 다행이군요.”

무림맹과 관련된 전력이 다 빠져나갔는데, 개방만은 여전히 도움의 손길을 뻗어오고 있다.

이렇게 되니 갈수록 의심이 확신으로 기운다.

‘맹주 그 늙은 구렁이가 개방까지 움직일 수는 없었을 테니.’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흑무곡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오늘 저녁쯤에는 진주에 도착할 것으로 보이네.”

“앞으로 이틀이 고비네요.”

언양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흑무곡의 세력이 생각보다 큰 것 같네. 그들이 스스로 흑무련이라 칭했다는 소식이야.”

“흑무련이라.”

“사파 나부랭이들을 꽤나 규합한 모양일세.”

“흐음.”

남궁천이 침음을 흘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류난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물론 속세에는 관심도 없어 보이던 자가 움직인 게 다소 신기하긴 하지만.

“우선은 방비를 굳건히 하고 저녁을 대비하죠. 이제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아니겠어요?”

남궁천의 태연한 말에 언양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그는 내심 다시 한번 감탄했다.

당장 죽음의 그림자가 언가장을 덮을 텐데도 저리 의젓할 수가 있나? 반면 자신의 아들인 언호량은 마음 한 구석 두려움을 숨기는 듯했고, 팽수혁은 여전히 회군한 악가와 무림맹에 분노하는 듯했다.

오로지 남궁천만이 평소와 다를 바가 없다.

‘과연 인재로다.’

언양걸이 새삼 남궁천에게 감사를 표했다.

“자네 말을 들은 덕분에 오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일세. 다시 한번 감사하네.”

만약 남궁천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팽가 무인조차 없을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언가는 완벽한 고립 속에서 적과 사투를 벌였어야 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뭘 감사까지야. 그리고 언가에게는 숨겨둔 한 수가 있잖아요.”

“그게 무슨 말인가?”

언양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손을 젓는다.

“에이, 뭘 우리 사이에 그러세요.”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아니, 그보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던 언양걸이 일순 흠칫거렸다.

그가 속없이 웃는 남궁천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남궁천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리가 없지 않나?

그건 언가에서도 아는 이가 극소수인데.

언양걸이 다시 한 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자, 어찌 됐건 오늘 저녁이 고비가 될 테니 정신 바짝 차리고 대비합시다.”

“가주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수뇌인사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대답했다.

* * *

별빛이 총총한 밤.

진주 외곽의 언덕 위로 한 남자가 우뚝 섰다.

반백의 머리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사내.

얼핏 보면 꽤나 젊은 나이로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숱한 세월을 겪은 자처럼 노회함이 묻어 있는 얼굴이다.

그가 저만치 암벽 아래로 불빛을 환히 밝히는 언가장을 보았다.

“도착했군.”

“팽가가 언가와 함께 거주 중입니다.”

옆에서 수하가 올린 보고에 류난은 피식 웃었다.

“그건 아는 거고. 그 견습생들은?”

“아직 언가장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렇군. 남궁천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진천랑의 아들이라. 얼굴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잘됐어.”

나긋나긋한 음성이 밤바람을 타고 음악처럼 흐르는 듯하다.

하나 옆에서 보고하는 수하는 류난의 얼굴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저 아름다운 미소 뒤에는 전율이 일어날 만큼 무정함이 스며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전령 준비는?”

“폭멸고를 복용시켰고, 사술을 걸어 세뇌까지 마친 상황입니다.”

“좋아, 그럼 선물을 보내도록.”

“복명!”

수하가 대답과 동시에 돌아섰다.

놀랍게도 그의 뒤쪽으로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흑의인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가 턱짓을 하자, 도열해 있던 흑의인 중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디론가 달려갔다.

* * *

언가장의 특징이 하나 있다면 일개 가문의 장원이라기보단 어지간한 성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담벼락은 성벽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충분히 높았고, 정문 역시 웅장하기가 이를 데 없다.

또한 정문 위에는 망루가 있으니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자는 편액을 보기 전엔 성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오랫동안 정사지간에 머물렀던 언가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러한 까닭에 방어하며 싸우기에는 이보다 좋은 조건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인해전술로 밀어붙일 경우에는 그 어떤 난공불락의 성도 무너지기 쉬운 법.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언가를 향해서 천천히 다가오는 무리들.

온통 흑의를 입고 있어서 정확한 수가 파악되지 않지만 아까부터 전해지는 진득한 살기와 어둠을 찢는 횃불의 수만 봐도 어마어마한 머릿수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꿀꺽……!

정문의 망루에 올라선 언양걸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다가오는 횃불들을 노려보았다.

어느 순간 횃불이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밤바람이 훅 불어온다. 곧이어 적진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전령을 보낼 테니 언가는 받아라!”

다음 순간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언가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기 시작했다.

“조준해라!”

언양걸의 명에 담벼락에 올라선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시위에 걸어 당겼다.

언양걸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바라보는데, 전신이 망신창이가 된 무인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소리쳤다.

“쏘지 마시오! 쏘지 마시오! 나는 악가에서 온 무인이오!”

“……!”

언양걸이 순간 꿈틀거리고는 눈을 부릅떴다.

확실히 산동악가의 무복을 입은 무인이었다.

“아직 살아 있는 자가 있었던가!”

깜짝 놀란 그가 막 문을 열라고 소리치려 할 때였다.

실눈을 뜬 남궁천이 매정하게 말했다.

“쏘세요.”

“뭐라고?”

“쏴야 합니다.”

“침착하게, 강호신룡. 저자는 적이 아니야. 놈들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가 지금 전령으로 달려오는 게 아닌가?”

“그래도 쏴요.”

“허어! 강호신룡 자네……!”

하지만 남궁천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옆에 선 궁수의 활을 뺏어 들더니 순식간에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겼다.

패애애애앵!

순간 시위를 떠난 화살이 어둠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주변의 모든 무인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날아가는 화살을 눈으로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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