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협력은 개뿔
투둑. 푸스스……!
암벽 일부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눈이 허옇게 뒤집혀 있던 팽적호가 이내 꿈틀거리더니 차츰 이성을 되찾아갔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던 그가 천천히 움직이면서 한 걸음 내디뎠다.
투두두둑……!
돌 부스러기가 다시 부서져 내렸다.
암벽에 균열이 생길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았지만 팽적호의 몸은 탄탄한 철덩어리처럼 끄떡없었다.
“후우우우.”
팽적호의 입에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 다음 순간 그가 울컥 치미는 뭔가를 느끼고 기침을 했다.
“쿨럭!”
한 움큼 토해지는 피.
한 걸음 비틀거린 그가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냈다.
그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묘한 소리를 내질렀다.
“괜찮은 건가?”
“그보다…… 지금 남궁천이 팽 가주를 날려 버린 거 아냐?”
“강호신룡이 허명성세가 아니었군.”
언가 무인들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들은 팽 가주를 깎아내릴 의도가 없었다. 그걸 팽가 무인들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팽적호가 저렇게 당할 정도면 언양걸 역시 강호신룡을 상대로 얼마나 고전을 치를지 알 수가 없었기에.
‘이건…… 이건…… 대어구나. 아니, 잠룡이 아닌가!’
언양걸은 내심 전율하며 남궁천을 보았다.
전신에서 미증유의 기운을 피워 올리는 남궁천은 시종 착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사람 성질을 박박 긁어 놓던 장난기는 온데간데없다.
확실히 사람이 달리 보인다.
강호신룡?
팽수혁 말이 맞다.
강호신룡은 죽을지라도 남궁천은 죽지 않는다는 그 말.
강호신룡이라는 별호는 남궁천에게 결코 과분하지 않다. 오히려 부족하다.
진정한 잠룡.
이미 성룡이 되어버린 거성이 물밑에서 잠자고 있는 것만 같다. 지금 그 순간을 목도한 것만 같다.
한편 팽적호 역시 정신적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방금 남궁천의 일격은 혼원벽력도의 일도단천과 어딘지 닮았다.
그런데 그 파괴력이 완전히 다르다.
남궁천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자신은 포탄처럼 튕겨 나가 꼴사납게 처박히지 않았나?
거기에 가벼운 내상까지 입었다.
가볍다고는 하나 내상 자체가 일반인에게는 중상이나 마찬가지다.
팽적호도 하루 정도는 꼼짝없이 요양하며 운기 행공으로 치유해야 하리라.
팽적호가 노려보자, 남궁천이 예의 그 경계심이라곤 없는 태도로 묻는다.
“괜찮으세요?”
“뭐라?”
“내상을 입으신 것 같아서.”
“허! 허허허!”
팽적호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껏 싸우다가 상대의 걱정을 받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은 상대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으니까.
한참이나 앙천대소를 터뜨리던 팽적호가 웃음을 뚝 멈추고 남궁천을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찌한 것이더냐?”
“뭘요?”
“방금 그 일격. 실로 대단했다.”
팽적호가 깔끔하게 인정하자 주변 사람들이 술렁거린다.
언양걸 역시 놀란 눈치로 중얼거렸다.
“팽 가주가 순순히 인정하다니. 놀랄 일이로군.”
“그렇죠. 팽가의 고집은 알아줄 만하니까요.”
진소홍의 말에 언양걸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듣기만 하던 팽수혁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무슨 소리! 본 가는 늘 인정할 건 인정한다!”
“흐응. 그으래?”
진소홍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팽수혁을 가만히 쳐다본다.
팽수혁이 얼굴이 붉어져서는 고개를 휙 돌렸다.
“나,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 그렇다고 치지 뭐.”
이내 진소홍이 활짝 웃자, 팽수혁이 어금니를 꾹 씹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
솔직히 남궁천이 나타나기 전까지 팽수혁은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다.
진소홍의 말이 맞다.
하북팽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쉽게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만큼 자존심이 세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런 팽가를 두고 거칠고 무례하며 고집스럽다고 말한다. 또는 머리가 나쁘다고 매도한다.
하지만 그게 하북팽가다.
명예보다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문.
그래서 구파일방은 하북팽가를 업신여기기도 하지만, 반대로 하북팽가는 그런 구파일방을 우습게 보기도 한다.
그런데…….
‘저 녀석만큼은 우습게 볼 수가 없단 말이지.’
팽수혁의 시선이 남궁천에게 꽂힌 채 움직일 줄을 모른다.
마침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입을 열었다.
“별거 없어요. 기본에 충실하면 되는 거죠.”
“기본에 충실하라? 하면 내가 휘두른 일도단천은 그러지 못했다는 뜻인가?”
“흐음. 기본에 충실하셨죠. 다만 좀 서두르기도 하셨고.”
“서둘렀다?”
“네, 서둘렀죠. 그것도 매우 많이.”
팽적호가 눈살을 구겼다.
자신은 서두른 기억이 없다.
그저 혼원벽력도의 초식 중 일도단천에만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한데 무얼 서둘렀다는 말인가?
한낱 견습생이 툭툭 내뱉는 말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어쩌다 보니 자존심도 내려놓고 질문만 이어가게 된다.
이는 실로 놀라운 변화였다.
팽적호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내가 서두르지 않았다면 자네는 타격을 입었겠는가?”
“아뇨, 지금은 저에게 안 통합니다.”
“하면?”
남궁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양반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좀 알아들을 것이지. 아예 밥숟가락으로 떠서 먹여달라는 심보네, 이거.’
남궁천이 벽라검을 들어 제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무공을 익히는 것에 서두른다는 겁니다.”
휘이이잉.
한차례 바람이 불어오면서 나뭇잎이 휘날린다.
그 바람결을 타고 희미한 깨달음 한 줄기가 팽적호의 뇌리를 스치는 듯하다.
하나 아직은 안갯속에서 보이는 어렴풋한 그림자다.
그 모습을 본 남궁천이 속으로 혀를 찼다.
‘아니, 이 정도 말하면 대충 좀 알아들어야지! 이러니 돌대가리 소리나 듣는 거 아냐!’
물론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냈다간 노발대발하면서 친구고 나발이고 물 건너갈 테지.
결국 남궁천은 조금 더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오래전 팽 가주를 죽인 미안한 마음도 전할 겸.
남궁천이 천천히 벽라검을 들어 올리더니 일순 허공에 휘둘렀다.
쉬이이익!
한 줄기 섬광이 허공을 베었다.
어지럽게 휘날리던 나뭇잎이 그 기풍에 휩쓸리듯 아무렇게나 춤을 추었다.
팽적호는 반사적으로 도파를 움켜쥐다가 남궁천의 태도를 보고는 긴장을 풀었다.
남궁천이 입을 열었다.
“방금 이게 일도단천이에요.”
“……!”
“그리고 이건…….”
다시 남궁천이 검을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허공을 향해 내리그었다.
얼핏 보면 거의 똑같은 동작이다.
뭐가 다른지 알기 힘든.
다만 두 번째 검을 휘두를 때는 조금 더 느리고 신중해 보일 뿐이었다.
만약 무공을 익히지 않는 자가 본다면 그 행동에 아무런 의미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 이곳에 있는 무인들은 남궁천의 움직임에서 나직이 감탄을 터뜨렸다.
때론 느리지만 강해 보이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지금 남궁천의 동작이 그랬다.
일도단천에 비해 현저하게 느린 동작이었지만, 군더더기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꽉 찬 느낌이랄까?
사각.
벽라검에 나뭇잎이 갈라졌다.
단순한 행동.
무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팽적호는 마음을 흔드는 무언가를 느끼고는 흠칫거렸다.
남궁천이 그런 팽적호를 가만히 보며 말했다.
“아시겠어요? 무공을 익히는 것에 있어서 조급한 거예요.”
“조급하다…….”
“팽가는 실전형 무공을 구사하죠. 그렇다고 해서 무공의 오의를 간과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팽가가 구파일방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럴 수도 있죠. 팽가는 늘 실전에서 무공을 발전시켜 왔으니까요. 구파일방 중에서도 특히 도가 계열의 문파들은 전부 산속에 틀어박혀 금욕하며 지내는 시간이 태반이죠. 그러니 팽가가 보기에는 겉멋만 든 말코도사로 보일 수도 있을 거예요.”
한마디 한마디가 팽가 무인들의 속을 들여다본 것만 같다.
그들 모두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특히 팽적호와 팽수혁은 더욱 그랬다.
실제로 팽적호는 팽수혁에게 그런 말까지 했었다.
“산속에 처박혀 도나 닦는 것들에게 본 가가 밀려서는 안 된다. 너는 세상에 나아가 팽가의 위대함을 알려야 한다. 본 가는 그릇 닦으며 깨닫는 무공이 아니라, 적을 베며 깨닫는 무공이라는 것을 보여주어라!”
남궁천의 말이 이어진다.
“하지만 무공은 그 오의도 중요한 법이죠. 실전도 중요하지만 무공 자체를 학문으로서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겁니다.”
“……!”
“아시겠어요? 너무 급해요. 나뭇잎을 베겠다고 두 눈 부릅뜨고 휘두르는 것보다는, 검을 휘두른다는 것 자체에 신경을 쓰라는 거예요.”
“아!”
팽적호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다시 말해 목적 자체만을 노려보기보단 그 수단과 방법에 무게를 두라는 뜻이 아닌가?
남궁천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팽가는 다 좋아요. 타고난 근골도 좋죠. 하지만 지나치게 실전에만 치우쳐 있어요. 그러니 무공의 오의를 가볍게 여기죠. 칼을 휘둘러 적을 박살 내면 그만인 겁니다. 하지만 팽가의 칼은 무엇입니까? 팽가가 휘두르는 칼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걸 찾아내지 못한다면 혼원벽력도는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어요.”
이제 팽적호는 입을 딱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저런 말을 약관도 채우지 못한 청년이 할 수 있는 것인가?
팽적호는 저도 모르게 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팽수혁도, 다른 팽가 무인들도 저마다 허리춤에 패용한 칼을 내려다보았다.
도의 의미라니.
도란 그저 적을 베고 꺾는 도구이지 않던가?
한데 저 새파란 젊은이가 도에 뜻을 담으라고 한다.
평소에는 그런 소리를 하는 말코도사들을 비웃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묘하게 남궁천의 말에 울림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남궁천이 보여준 무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대살성의 자식이라서?
그도 아니면…….
‘누군가 팽가에 이런 직언을 한 적이 처음이기 때문일까?’
피식.
팽적호는 허탈한 마음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알고 보면 단순한 것이 진리라고 하던가?
이 별것 아닌 것을 두고 팽가는 도대체 얼마나 애먼 거리를 돌아온 건가?
그것도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아들에게 조언을 들어버리다니.
그 누가 말해도 귓등도 스치지 못했던 이야기가, 저 녀석이 말하니 가시처럼 콕콕 박혀들다니.
“하하하하하!”
팽적호는 순간 하늘을 우러르며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사람들은 순간 팽적호가 분을 못 이겨 미친 건가 생각할 정도였다.
하나 이를 지켜보는 팽수혁만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버지, 저 녀석이 저런 녀석입니다.’
한참을 웃던 팽적호가 도를 칼집에 갈무리하고는 포권했다.
“팽가는 더 이상 자네에게 그 어떤 원한도 따지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것을 인정하지. 고맙다.”
“별말씀을요.”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한차례 광풍이 휘몰아친 연무장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묘하게 훈풍으로 채워졌다.
이곳의 무인들 모두 저마다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고 있었다.
서로를 원수라 부르던 팽가와 강호신룡의 대결은 하나의 볼거리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하던가?
이 순간 언가장의 모든 무인들은 이 두 사람의 화합을 시작으로 묘한 결속력을 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단연 남궁천이 서 있었다.
‘크흡! 다행이다! 다행이야! 저 녀석은 진정 보물이로다!’
언양걸이 눈가를 소매로 찍으며 연신 감탄했다.
그때 남궁천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아, 그런데 저한테 깨졌으니까 분타주 자리는 넘길 거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팽적호의 이마에 희미한 핏대가 솟았다. 그리고 언양걸이 앓는 소리를 내며 하늘을 보았다.
‘하아, 하늘이시여. 저놈에게 눈치라는 건 왜 안 주셨나이까?’
제발 분위기 좀 봐가면서 말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