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91화 (191/508)

190. 내가 아는 녀석이었어?

계림의 수천 개 봉우리 중 하나.

구름을 발아래에 둔 한 사내가 꼿꼿하게 선 채로 옥령주(玉靈珠)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옥빛 광휘를 품은 구슬 안에는 계림을 떠나는 남궁천 일행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옥안영오가 날 때부터 품는다는 옥령주는 옥안영오가 보는 것을 희미하게 투영한다. 거기에 사술을 더하면 영상이 더욱 또렷해지는 것.

여신우가 옥령주를 품에 넣으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확실히 가지고 있지 않군. 이미 늦어 버린 건가?”

초곡객잔에서 남궁천이 협곡으로 달려왔을 때부터 대충은 짐작했다.

귀한 걸 가지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그 주변을 맴돌게 되어 있다. 쉽게 곁에서 떠나질 못하는 법.

한데 남궁천은 냅다 협곡으로 달려왔다.

만약 마단곡의 영단을 이송 중이었다면 결코 그런 짓은 하지 못했을 터.

즉, 이미 다른 곳으로 빼돌렸다는 뜻이리라.

‘먼 곳까지 왔는데 아쉽게 됐어. 곡주에게 한 소리 듣겠군.’

여신우가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걸음을 돌렸다.

비록 마단곡 영단은 취하지 못했지만 계획이 달라질 건 없다. 어차피 영단 따위는 원대한 계획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까.

대안은 항상 존재한다. 아니, 흑무곡주, 그의 존재 자체가 대안이 되리라.

까아아악!

마침 창공을 가로지르며 까마귀 한 마리가 빠른 속도로 날아온다. 마치 독수리를 방불케 할 만큼 민첩한 속도다.

푸드드득!

날개를 활짝 펼친 까마귀가 여신우의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여신우가 옥안영오의 등을 한 차례 쓰다듬고는 걸음을 떼려다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구름 아래 어딘가를 더듬었다.

“그런데…… 그 아이, 남궁천이라고 했던가?”

홀로 중얼거리던 여신우가 희미하게 피식 웃는다.

아무렴 어떤가?

한낱 약관도 지나지 않았을 아이가 아니던가?

이미 희대의 천재를 배출하고도 빛을 보기는커녕 몰락해 버린 남궁가다.

또 한 번 천재가 나온다고 해도 걸림돌이 된다면 짓밟으면 그만이다.

강호는 재능만으로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무엇보다 경험이 중요한 곳.

특히 피가 튀는 실전에서는 더욱.

파앗!

순간 그의 신형이 석회암 봉우리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 *

우르르릉.

잔뜩 낮아진 하늘이 짐승의 울음을 내지른다.

“어째 한차례 폭우라도 쏟아질 기세인데…….”

마차 창밖을 올려다보면서 팽수혁이 중얼거렸다. 옆에 앉은 유현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도 마차가 있으니 든든하군요. 일단 비를 피할 수는 있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팽수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천을 힐끔 보았다.

사실 이렇게 호화스러운 마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것이 전부 남궁천 덕분이 아니던가?

비량 교관이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장흥표국주 이사흠은 한사코 마차 두 대를 빌려주겠노라 고집을 부린 것이다.

‘확실히 보면 볼수록 신기한 녀석이란 말이지.’

도대체 마단곡은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면 변한다더니. 성격만 변하는 게 아니라 능력도 변하는 걸까?

‘그런 거라면 한번 죽어볼 만…….’

무심코 생각하던 팽수혁이 얼른 고개를 저으며 제 뺨을 철썩 때렸다.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순간적으로 떠올린 어이없는 생각에 스스로 자책을 한 것이지만, 주변에서 보던 다른 생도들은 저마다 움찔거리며 혀를 찼다.

‘저런…… 소환단을 잃었다더니 많이 속상한 모양이구나. 어서 떨쳐내야 할 텐데.’

‘이젠 하다 하다 자학까지 하는군. 저러면 내가 한 알 더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유현과 남궁천이 각자의 생각에 잠긴 사이 마차가 천천히 멈추고 있었다.

남궁천이 문을 열고 내려 보니 아직도 숲을 벗어나려면 관도를 따라 한참은 더 지났어야 했다.

마침 먼저 가던 마차에서도 비량이 내려 마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남궁천의 질문에 비량이 슬쩍 돌아보고는 대꾸했다.

“아무래도 다음 마을까지 꽤 거리가 있어서 적당히 묵을 곳을 찾아 쉬어야겠다는구나. 곧 비도 내릴 테고.”

확실히 비가 오기 시작하면 말들도 훨씬 더 지칠 테고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리라.

“어디에서 쉬려고요?”

“마침 근처에 버려진 사당이 있다니 그곳에 오늘 밤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죠. 뭐”

“네가 다른 생도들에게도 말해주렴.”

“예.”

남궁천이 대답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마차로 걸어가면서도 새삼 감회가 새롭다.

비가 내릴 거라는 이유로 쉬었다 간다니.

괜히 헛웃음이 나온다.

전생엔 이런 사치를 부려본 적이 없다. 그렇다. 확실히 이건 사치다.

원래 비가 내리면 쉬는 게 아니라 움직여야 한다. 이건 그의 인생 수십 년 동안 뇌리에 각인되어 있던 철칙이나 다름없었다.

비는 많은 것들을 지워준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이 적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소리도 지우고 흔적도 지운다.

발자국이 남을 수 있지만 폭우가 내려준다면 별로 문제 되지 않는다. 그마저 지워 버리니까.

추격자들의 시야도 가려준다.

대신 비가 그치면 멈춰야 한다.

땅이 굳기 전까지는 쉬이 움직일 수도 없다.

그때야말로 남은 흔적이 잘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남궁천은 새삼 보통 사람이 되었다는 게 실감이 됐다.

마차에 다시 오르려던 남궁천이 저만치 비량을 슬쩍 돌아보았다.

‘비량 교관이라.’

협곡에서 전투는 정말 대단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던 박빙의 대결.

저만한 자가 왜 이런 생도들과 함께 다니는 걸까? 생도들 중에 비량과 어울릴 만한 자가 있나?

없다.

단 한 명.

‘나만 빼고 말이지.’

결국 비량이 저기 저렇게 있는 이유는 자신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이 또한 전생에서 유래된 피해 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남궁천의 감각은 남다르기도 하다.

‘분명 날 지켜보는 것 같긴 한데…… 맹주가 시킨 건지, 뭔지 애매하단 말이야. 차라리 이번 기회에 한 번 알아볼까?’

마침 비량이 남궁천을 휙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자 해맑게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비량.

저렇게 보면 정말이지 천진하고 생각 없는 교관이 아닌가?

정말 모르겠다. 저 인간은.

* * *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계곡물.

촤아아!

마침 수면을 뚫으면서 젖은 몸이 불쑥 솟구쳤다.

탄탄한 상반신이 달빛을 받아 반짝인다.

은빛 머리카락이 보석처럼 빛난다.

한 차례 머리를 흔들자 은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보석 가루를 털어내는 것만 같다.

“모처럼 시원하네.”

기지개를 한껏 켠 비량이 다시 수면 아래로 살짝 잠겨들었다.

얼굴이 절반쯤 수면에 파묻히자 코와 입에서 물방울이 보글보글 나온다.

그런데 수면에 또 다른 파문이 일어난다.

톡. 토독. 톡.

‘비……?’

고개를 들어 보니 결국 비가 내린다.

하루 종일 내릴 듯 말 듯 낮은 울음만 내지르던 하늘이 마침내 비를 뿌리는 모양이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삽시간에 굵은 장대비로 변했다.

쏴아아아아!

한 치 앞도 보기 힘들 만큼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내려꽂힌다.

마치 하반신을 물에 담그고 상반신은 폭포수를 맞는 듯하다.

비량은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보며 온몸으로 빗줄기를 맞았다.

쏴아아아……!

이렇게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으면 마치 세상과 하나가 된 느낌이다. 빗줄기가 머리를 관통해서 들어오고, 다시 물이 되어 전신에서 빠져나가는 기분.

게다가 은발을 늘어뜨리고 온몸으로 비를 맞는 자신의 모습은 분명 아름다우리라.

가끔은 이렇게 자아도취에 빠져야 한다.

그래야 무공도 한 단계 성취가 있는 법.

그런데 그런 비량을 다소 불편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저놈 혼자 뭐 하는 거야?’

수풀 사이에 몸을 바짝 웅크린 남궁천이었다.

기척을 숨기면서 이동하는 일은 이골이 날 정도기에 비량의 뒤를 밟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조금 전부터는 비까지 쏟아져서 기척을 갈무리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그런데 당최 비량이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야밤에 비량이 넌지시 동굴에서 빠져나오기에 따라와 봤더니 계곡에서 목욕을 하는 게 아닌가?

졸지에 남자 목욕 장면을 훔쳐보는 이상한 상황이 되었지만, 어쨌거나 남궁천은 비량에 대해서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시…….

‘손을 섞어보는 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지!’

생각이 끝나는 순간 남궁천이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파밧!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

이미 비량이 협곡에서 어떤 신위를 보여줬는지 잘 알고 있는 남궁천이었다.

세포 하나하나의 모든 힘을 쥐어짜듯 발을 놀린다.

탓!

수면을 박차니 몸이 서너 장씩 쭉쭉 미끄러져 날아간다.

모든 신경을 집중했더니 어느 순간 자아가 사라지고 물과 하나가 된다.

그만큼 방심하지 않는다는 뜻.

쉬이이이잇!

파파파파파!

지체 없이 날아가는 손바닥이 허공에 부유하는 물방울을 쉼 없이 때린다.

마침내 비량의 등짝 복판에 일장이 작렬하려는 순간!

퍼어어어엉!

촤아아아아아!

요란한 폭음과 함께 고여 있던 물이 화산의 분화구처럼 움푹 파헤쳐지면서 접시 모양으로 퍼져 나갔다.

번쩍! 꽈르르르릉!

때마침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

놀랍게도 비량은 극적인 순간 돌아서서 손을 내밀어 남궁천의 일장을 받아내고 있었다.

‘역시……!’

보통이 아니다.

협곡의 싸움으로 대단한 녀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생각보다도 훨씬 뛰어난 자다.

살기를 감추고 기습을 펼쳤으나, 조금 전의 일장이 통했다면 십중팔구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촤르르륵!

거의 바닥까지 드러난 계곡에서 미끄러지며 중심을 잡은 남궁천.

출렁! 추아아아아!

곧이어 고인 물이 요동을 치면서 마치 바닷가의 격랑처럼 휘몰아쳐 왔다.

하나 파도처럼 거센 물줄기가 두 사람을 덮치고 난리를 쳐도 남궁천과 비량은 바닥에 콱 박힌 바위처럼 흔들림이 없다.

남궁천을 확인한 비량이 생글 웃는다.

“깜짝 놀랐네.”

“못 믿겠는데요?”

“정말 놀랐는데.”

“아뇨. 교관님을요. 교관님을 못 믿겠습니다.”

“으응? 어째서일까? 이렇게 널 챙겨주는 사람인데.”

“그러니까 더 못 믿죠. 대살성의 자식을 이리 살뜰하게 챙겨주니까.”

“때론 대가 없는 호의도 있는 법.”

“살아 보니 대가 없는 호의가 보통은 뒤통수치려는 수작이더라고요.”

“이런. 속고만 살았나 보군.”

“예, 속고만 살았습니다.”

비량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교관님, 누굽니까?”

“그걸 물어보려고 다짜고짜 기습을?”

“손을 한 번 섞어도 많은 걸 알 수 있잖아요.”

실제로 많은 걸 알아냈다.

일단 사공이나 마공을 익힌 건 아니라는 것.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에게 적의가 일절 없다는 것.

무공 수준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까지.

‘물론 내 전성기에는 못 미치지만.’

쏴아아아아……!

빗소리가 침묵을 채운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한참이나 부딪쳤다.

마침내 비량이 천천히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런데 거, 너무 다가오는 것 아니오? 으음. 더 다가오면 피차 불편해질 것 같은데?

마침내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멈춘 비량이 피식 웃는다.

“확실히 닮았어. 널 보면 그 사람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구……?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남궁천의 표정을 읽은 비량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기에.

“네 아버지 말이다.”

잠깐. 그런 아련한 표정 짓지 마.

기분 나쁘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 내가 아는 녀석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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