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92화 (192/508)

191. 내가 아는 녀석이었어?

그러니까 내 아버지라는 건 날 말하는 거지?

남궁천이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쏟아지는 비 때문인지 머릿속 생각들도 말끔하게 씻겨 내려간 기분이다.

남궁천이 미동도 없이 빤히 바라보자 비량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찬란한 은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긴다.

은발은 젖어도 물미역 같진 않구나.

뭐랄까?

빛바랜 물미역? 흐음. 그게 더 이상한가?

아무튼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비량이 하늘을 보며 말한다.

“나에 대해 그렇게 알려주려고 해도 귀담아듣지 않더니.”

“언제 말했는데요?”

“으음. 관두자.”

“그래서 교관님 정체가 뭡니까?”

“그래, 이젠 때가 됐지. 너에게만은 언젠가 얘기를 하려고 했다. 나는 사실 무림맹 비밀 조직인…….”

“그 전에 잠깐.”

“이것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말 안 해! 안 한다고! 도대체 몇 번이야, 이게!”

“에헤이, 사람 참 성격도. 누가 안 듣는대요?”

“그런데 왜 말을 막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 그렇게 벌거벗고 얘기하면 이상하잖아요.”

그제야 비량이 흠칫거리더니 제 가슴을 손으로 감싼다. 그러고는 남궁천을 흘겨보며 하는 말이…….

“변태.”

아, 이걸 확 죽여?

남궁천이 얕은 숨을 내쉬고는 몸을 휙 돌리고는 물가로 걸어갔다.

순간 비량이 몸을 날려 바위에 던져 놓은 옷을 빠르게 걸쳐 입고는 남궁천에게 다가왔다.

“말을 마저 하마. 나는 사실 비선향 출신이다.”

“비선향? 맹주 직속 비밀 타격대 같은 거예요?”

비량이 다소 멍한 표정이 되어서는 대꾸했다.

“그걸 어떻게?”

“그냥 딱 느낌이 오잖아요. 구린 냄새도 나고.”

“구린 냄새라니…….”

“아니에요? 구린 일이 아니면 굳이 맹주가 비밀 타격대를 따로 둘 필요가 있나?”

남궁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비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비선향은 실제로 온갖 지저분한 임무를 다 맡는 조직이었다.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에 속했지만, 정의를 위해서라면 온갖 구린 임무도 떠맡아야 하는.

그중에서는 당연히 무림공적 일호였던 진천랑을 쫓는 임무도 있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닮았군.”

“그야 부전자전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곤 해도 어찌 그렇게 말하는 것까지 닮았는지…….”

“아버지가 이런 말도 했어요?”

비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했지. 비슷하게.”

“뭐라고 했는데요?”

도통 기억이 안 나는 남궁천이 추궁하듯 물었다.

“내게 어느 조직이냐고 물으셨다.”

“그래서요?”

“대답해 줄 수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어차피 궁금하지도 않다고 했지. 능구렁이가 만든 비밀 조직이야 또 온갖 더럽고 추잡한 걸 맡을 게 뻔하다면서.”

“아…… 내가 그런 말을 했구나.”

“응?”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궁천이 대충 손사래를 치고는 생각에 잠겼다.

비량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런 말을 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맹주 그 능구렁이는 한동안 너무 많은 조직을 만들었다.

물론 그 조직들 대부분을 박살 내버렸지만.

비량이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본 채로 말을 이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처음으로 네 아버지를 추살하라는 임무를 받았지.”

* * *

“빌어먹을! 어디로 간 거야?”

비선향주가 주변을 둘러보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막다른 협곡에 내몰려 있던 진천랑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암벽 위에 솟은 나무에 벼락이 떨어지면서 변수가 생겼다.

순식간에 불타 버린 나뭇가지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그 바람에 돌무더기까지 쏟아져 내렸다.

그 잠깐의 틈을 이용해서 진천랑은 비선향의 포위망을 뚫고 어디론가 갔다.

평생 무림맹을 피해서 도망 다녔으니 은신술 하나는 기가 막히리라.

비선향주가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수하들에게 일렀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분명 아직 여기 어딘가에 있다!”

“예!”

비선향 무인들이 일제히 대답하며 날카롭게 뜬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비선향에서 막내인 비량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변을 더듬었다.

그러잖아도 기암괴석 때문에 음영이 이상한 협곡인데, 비까지 억수 같이 쏟아지니 사위를 분간하기가 더욱 어렵다.

한 번씩 번개가 번쩍이면 괜히 옆에서 빗물을 흘려보내는 암벽을 보곤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물론 보통의 상대를 쫓는 중이었다면 그렇게 위축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상대는 천하대살성.

무림맹이 수십 년간 쫓았던 공적 일호가 아닌가?

그나마도 비선향이기에 단기간에 이만큼이나마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쏴아아아아……!

장대비가 협곡을 가득 채운다.

세상의 모든 물이 이 좁은 협곡으로 모여드는 것만 같다.

물은 발목까지 순식간에 차올랐다.

그때 협곡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동시에 들려온다.

“그만 좀 쫓아다녀라, 이 징글징글한 것들아.”

육합전성(六合傳聲)!

여섯 방향에서 동시에 소리가 울려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음공이다.

“모습을 드러내라! 진천랑!”

비선향주가 소리치자 다시 여섯 군데에서 동시에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말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나? 그럼 너희들 다 죽을 텐데? 괜찮겠어?”

“……!”

꿀꺽.

비선향 무인들이 저마다 침을 삼켰다.

“오늘 비가 와서 내 기분이 좋다. 좋은 기회잖아. 속으로 셋을 셀 동안 꺼져라. 그럼 살려는 드릴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너야말로 지금이라도 모습을 드러내면 목숨은 살려주마!”

“나참, 개소리도 작작할 것이지. 그럼 죄다 죽여주마.”

육합전성이 끊어졌다.

다시 협곡은 빗소리만 가득하다.

어디냐? 진천랑!

비량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무림맹에 입맹한 후로 그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사람들은 남궁선에 버금가는 천재가 나타났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내곤 했다.

하나 비량은 그 말이 제일 듣기 싫었다.

어렸을 때부터 무얼 하건 남궁선은 그의 비교 대상이었다.

검을 휘둘러도 남궁선, 장력을 펼쳐도 남궁선, 심지어 활을 쏴도 남궁선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그 뒤에 붙는 수식어는 항상 천하대살성과 붙어먹은 여자.

그런 불명예스러운 여인과 비교당하다니.

지난 수십 년간 대살성의 손에 죽은 무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만 해도 그렇다.

협곡을 채우고 있는 건 쏟아지는 빗물만이 아니다.

이미 지나온 협곡에는 수백 명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개중에는 비선향 소속 무인들도 상당수였다.

모두 천하대살성 진천랑의 손에 죽은 것이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내 명예는 반드시 내가 찾는다.’

비량은 굳은 마음으로 다시 한번 주변을 훑었다.

쏴아아아아……!

빗줄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다.

내공을 운기하면서 모든 정신을 시각에 집중하자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듯하다.

허공을 할퀴며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가 보인다.

어둠 속에서도 달빛에 반짝이며 암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들.

비 비린내 때문에 후각은 소용없다. 빗소리 때문에 청각도 소용없다. 오로지 기감과 시각에 의존해야 한다.

‘더 집중해야 해. 더…….’

느리게 호흡하던 비량이 어느 순간 숨을 딱 멈췄다.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되는 순간.

세상의 시간도 일시적으로 멈춘다.

빗방울이 허공에 멈추고, 암벽을 타고 흐르는 물도 멈추고, 고막을 쉼 없이 때리던 빗소리도 멈춘다.

완전한 고요 속에서 그의 감각만이 허공을 빠르게 누빈다.

반짝!

마침 암벽을 타고 흐르는 수막(水膜)에서 무언가 반사된다.

‘검!’

판단이 서는 것과 동시에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가 사정없이 고막을 파고든다.

동시에 비량이 휙 돌아섰다.

하나 이미 늦은 상황!

파바밧!

고인 물의 수면을 밟으면서 날아든 진천랑이 순식간에 비선향 무인의 목을 그어 버렸다.

츄아악!

“커억!”

첨벙!

파바밧! 스팟!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

어둠 속에 묻혀서 여기저기에서 번쩍인다.

번쩍! 우르르릉, 꽈앙!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울린다.

비량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대가 비선향에 스며들 듯이 나타나서 칼부림을 하고 있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진천랑은 좌우전후를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귀신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가 나타날 때마다 하나의 목숨이 스러져 갔다.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죽여어엇!”

비선향주의 비명인지 명령인지 모를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온다.

츄파파파!

최정예 무인들이 일시에 진천랑에게 달려들었다.

휘리리릭!

파파파파파!

빗방울을 사정없이 튕겨내며 진천랑의 신형이 팽이처럼 회전했다.

그를 에워싸듯 달려들던 비선향 무인들이 순간 돌처럼 굳었다.

잠시 후.

츄아아아아아!

피를 분수처럼 뿌려낸 무인들이 그대로 넘어갔다.

첨벙! 첨벙!

“이런 개새……!”

비선향주가 이를 빠득 갈았다.

그가 검을 고쳐 쥐고는 천천히 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십여 명 남아 있던 비선향 무인들이 전멸한 상황.

비선향이 창설된 이래 이런 대참사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진천랑을 쫓아온 청랑단 이대와 삼대가 전멸했다.

정말이지 지독한 새끼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붉다.

암벽으로 튄 핏물이 빗방울과 섞여서 다시 튀어서 그렇다.

진천랑이 한 걸음씩 다가온다.

비선향주가 그런 진천랑을 노려본 채 말했다.

“비량.”

“예, 향주.”

“신호를 보내면 동시에 간다.”

“알겠습니다.”

단호하게 대답은 했지만 처음으로 자신이 없다.

비량은 진천랑을 보며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맹수 앞에 선 초식 동물의 심정일까?

마침 진천랑이 턱을 치켜들고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는다.

“기분이 나빠졌다. 다 죽여주마.”

“……!”

“너, 대장이지? 그럼 너를 믿고 따르는 수하들 생각해서 이성적으로 행동했어야지. 게다가 지금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았을 텐데, 수하와 함께 덤비겠다? 나 같으면 수하 하나라도 살려서 보낼 생각부터 할 텐데 말이야.”

“닥쳐라. 악마와 타협할 생각은 없다. 설사 죽더라도 명예로운 죽음이다.”

“병신 삽질하는 소리 하고 있네. 명예로운 죽음이 어디 있나? 뒈지면 다 끝인 걸!”

파앙!

찰나 진천랑이 바닥을 차며 튀어나갔다. 그의 발끝에서 마치 벽력탄이 터진 것처럼 물보라가 사방으로 일어났다.

쩌어어엉!

불꽃이 터지면서 비선향주가 뒤로 주르르륵 밀려났다. 비량이 얼른 뒤에서 떠받치자, 향주가 버럭 소리친다.

“지금이다! 가자!”

“옛!”

향주와 비량이 동시에 진천랑을 향해 쇄도했다.

쉬쉬아아악!

두 사람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완벽한 합을 맞췄다.

하나 비량은 이미 진천랑을 향해 달려가면서 깨달았다.

‘이자는…… 우리의 적수가 아니다!’

슈파앙!

순식간에 포탄처럼 날아간 진천랑이 향주의 머리통을 맨손으로 잡더니 그대로 암벽에 밀어붙이는 게 아닌가?

꽈아앙!

쿠르르릉!

요란한 소리가 울리고 향주의 몸이 축 늘어졌다.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린다.

번쩍! 우르르릉!

하늘에서 빛이 터지자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지는 향주의 모습이 분명하게 보인다.

진천랑이 목을 우두둑 꺾고는 천천히 돌아섰다.

“이제 너만 남았네?”

비틀……!

비량이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두 다리에 힘을 팍 주었다.

“덤벼, 이 빌어먹을 살인자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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