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회자정리(會者定離)
쩌어어엉! 쩌엉! 쩡!
고막을 찢어 버릴 것만 같은 금속성이 연신 터져 나온다.
남궁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싸움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지간한 무인이라면 저 두 사람의 싸움을 눈으로 쫓기도 힘들었을 터.
‘확실히 상상 이상이군.’
비량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희대의 천재라더니 허튼 소리는 아닌 모양이다.
‘내가 저 나이에 저 정도였던가?’
그래도 자신 역시 어려서부터 타고난 천재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나? 그 빌어먹을 재능 때문에 무림 공적이 되었지만 말이다.
다만 그 시절 무위가 비량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뭐랄까?
비량처럼 고강한 무공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실전에 특화되어 싸움을 잘하는 무인이었다.
그래, 나는 싸움을 잘하는 놈이었지.
거기에 비하면 비량은 싸움보다 비무를 잘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쨌거나 지금 저 둘은 생사를 걸고 싸우는 중이었다.
그리고 비량은 흑발의 사내에 비해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저 흑발……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풍겨내는 기운이 사이하기 짝이 없는 걸 보면 분명 흑도의 누군가일 텐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지간한 흑도인들은 한 번씩 다 만났을 자신이 아니던가?
저 정도로 강하면 알 만도 한데 왜 기억에 없지?
뭐, 어쨌든 지금은 덕분에 눈요기나 해야지.
나서서 비량을 도와주고 싶지만 우선 비량이 딱히 불리하지도 않은 데다, 이런 싸움에서 섣불리 끼어들면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생긴다.
게다가 저 두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뭐, 내가 누구 예의 차릴 만큼 착하진 않지만.’
쩌어엉!
마침 다시 한번 금속성이 터져 나온다.
거, 좀 조용히 좀 싸울 것이지.
하지만 남궁천을 약 올리기라도 하듯 두 사람의 싸움은 더욱 소란스럽게 이어졌다.
파바바밧!
타다다닷!
흑발의 사내가 암벽을 타고 달려 오르자, 비량 역시 빠른 속도로 달려 올랐다.
두 사람이 암벽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달리면서 검을 섞었다.
까라라라라라랑!
마치 협곡 한쪽에 불꽃이 마구 일어나면서 뭔가가 사선으로 터져 나가는 듯하다.
어찌 보면 절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
아, 이런 걸 보고 아름다운 싸움이라고 하는 건가?
어딘지 이상한 부분에서 감탄을 터뜨리며 남궁천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찰나, 흑발의 사내가 암벽을 차며 날아오르자, 비량이 재빨리 검을 사선으로 쳐올렸다.
쑤아아아앙!
꽈르르르릉!
검기가 작렬하자 암벽 일부가 무너지면서 추락했다.
쿠쿠우웅!
바닥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렸다.
간발의 차이로 피한 흑발 사내가 허공에서 제비를 돌더니 검을 마구 휘둘렀다.
쩌쩌어어엉!
슈우우우욱, 쿠우웅!
비량이 검격에 맞고 수직으로 떨어지자 육중한 소음과 함께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암벽 한쪽에 움푹 들어간 부분을 딛고 선 흑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호오?”
먼지가 차츰 희미해져 갈 때쯤 바닥에 꼿꼿하게 선 비량의 모습이 보였다.
비량이 목을 한쪽으로 우두둑 꺾었다.
“재미있네.”
후우우우웅!
순간 전신에서 훈풍이 불어나가더니 비량의 백발이 한 올 한 올 허공으로 솟아오른다.
다음 순간,
타닷!
쉬이이이잇!
비량의 검이 그대로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쩌저저저저적!
검기에 맞은 암벽에 금이 생기더니 마치 용이 승천하듯 수직으로 솟구쳐 오른다.
뚜카아앙!
마침내 흑발 사내가 서 있던 곳까지 다다라서야 폭발하듯 기운이 터져 나갔다.
흑발 사내가 몸을 훌쩍 날리면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쑤쑤쑤쑤아앙!
꽈르르르르릉!
암벽이 갈라지고 무너지면서 비명을 내지르는 것만 같다.
쿠구구궁!
마구잡이로 휘두른 검기에 깨져나간 암벽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타앗!
비량이 쏟아져 내리는 돌덩이를 밟으며 비상했다.
“오오! 저건 내가 즐기던 방법인데.”
남궁천이 무심결에 감탄을 터뜨렸다.
쏟아져 내리는 돌덩이를 밟으며 경공을 펼치는 수법은 실제로 그가 전생에 즐겨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허공답보 같은 건 내공이 많이 소모되지만, 저렇게 돌덩이를 밟아가며 날아오르는 건 그 절반도 안 되는 공력으로 펼칠 수 있는 경공이었다.
‘뭐, 수상비보다는 조금 더 까다롭지만.’
그래도 멋은 있단 말이지.
확실히 비량의 싸움은 멋있었다.
뭔가 깔끔하면서도 화려하다.
화산의 검법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보다 더 실전적인 무공처럼 느껴진 달까?
일단 비량 자체가 멋있게 싸우고 싶어 하는 느낌이다.
‘하여튼 요즘 것들은 겉멋만 잔뜩 들어서는.’
그렇다고 해도 비량을 흉볼 수는 없다. 그만큼 그의 신위는 대단하니까.
쩌어어엉!
마침내 허공에서 격돌한 두 사람이 튕기듯 멀어졌다.
촤르르르륵!
다시 십여 장을 두고 떨어진 두 사람.
후우우우웅!
한 줄기 바람이 협곡을 따라 불어왔다.
‘굉장하네.’
맞바람이다.
고수의 영역에서는 미세한 바람도 영향을 끼치는 법.
지금껏 비량은 맞바람을 맞으면서도 박빙의 승부를 펼쳐온 것이다.
‘이 정도면 절반의 승리인가?’
남궁천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데, 흑발 사내가 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비량이라. 흥미롭군. 나, 여신우다.”
“여신우.”
“또 보길.”
여신우가 돌아서더니 그대로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하나 이번만큼은 비량도 쫓지 않았다.
“안 쫓아요?”
“응? 통성명했잖아.”
뭐야? 이 인간, 진짜!
남궁천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가가다가 우뚝 멈췄다.
‘아, 그런가?’
검을 갈무리한 비량의 손바닥이 온통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그야말로 초박빙의 승부를 펼친 것이리라.
아마 쫓아간다고 한들,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던 것이리라.
게다가 한 놈이 악착같이 도망가고자 하면 항상 쫓는 입장이 불리하게 마련이다.
도망이라면 지겹도록 쳐봤기 때문에 잘 안다. 진퇴의 자유가 있는 자와 오로지 진격의 의무만 있는 자는 애초에 기울어진 땅에서 싸우는 것과 같달까?
‘똑똑하네.’
남궁천이 생각을 갈무리하는데, 비량이 슥 돌아본다.
‘결국 이 순간이 왔군.’
이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겠지. 저놈들이 누구며, 갑자기 왜 나타났으며, 어째서 여기까지 홀로 도망 온 건지.
뭐라고 둘러대야 적당할까?
머릿속으로 열심히 생각하는데, 마침내 비량의 목소리가 툭 날아든다.
“천아.”
“예, 교관님.”
“하나만 묻자.”
하나만 물을 거 아니면서.
어쨌든 피할 수 없는 순간이다.
“말씀하시지요.”
“너도 조금 전까지 내가 생사결단의 각오로 싸우는 걸 보았을 터.”
“예.”
“그래. 그런데 왜 멀뚱멀뚱 서서 구경만 한 거냐?”
“예에, 응? 예?”
“아니, 그래도 내가 위험해 보이면 적당히 나서서 도와줘야 할 것 아니냐? 왜 두 손 놓고 가만히 구경만 했냐고 물었다.”
“아…… 그건…….”
“어디 한 번 말해봐. 팽수혁 같았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도와주겠다고 달려들었을 텐데. 넌 뭐니?”
그야, 그 단순한 놈은 십중팔구 그랬을 테지. 하나…….
“고수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바람결조차…….”
“……는 개뿔. 내가 당장 칼 맞아 죽게 생겼어도 지켜만 보겠다? 그치?”
“그게 아니라…….”
“그럼 고수는 전쟁터에서 싸우면 죄다 죽겠네? 그치?”
“아니, 그건 다른 경우고. 초박빙의 고수끼리 싸울 때는…….”
“됐고. 인해전술 몰라? 다다익선 몰라? 내가 죽어라 싸우는데 너 아주 팔짱 끼고 구경만 하더라? 까딱하다간 옥수수 튀겨놓고 감상할 기세였어.”
“…….”
“할 말 없지? 이것 봐.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니까. 내가 헛살았지, 헛살았어. 이런 녀석들을 믿고 내가…….”
허, 이 인간 진짜 뭐지?
진심인가?
분명 비량이 보인 신위는 누구라도 함부로 끼어들다간 오히려 낭패가 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자칫 섣불리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검로에 방해가 되면 비량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었고.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무공만 겁나 센 바본가?’
아무리 그래도 상식이 있지 않나?
보통 이런 경우는 셋 중 하나가 아닌가?
정말 무공만 센 바보이거나, 자신이 끼어들었다가 자칫 화를 입고 잘못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거나, 그도 아니면 자신이 끼어들었을 때 생길 변수만큼은 충분히 계산할 수 있는…….
남궁천이 생각을 뚝 멈추고는 비량을 보았다.
여전히 비량은 혼자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그 정도란 말인가?’
아니, 그래도 말이 안 된다.
그럴 것 같으면 애초에 본인이 온 힘을 다해 싸워서 충분히 이길 수 있을 텐데.
‘설마 생포할 생각으로……?’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갑자기 비무라도 해보고 싶어지네.
남궁천이 빤히 바라보자, 혼자 구시렁거리던 비량이 머쓱한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어깨를 토닥거린다.
“아무튼 다음에는 그렇게 구경만 하고 그러면 안 돼. 서로 돕고 살아야지.”
“예, 뭐…….”
“자, 그럼 돌아갈까?”
비량이 언제 서운했냐는 듯 활짝 웃는다.
남궁천이 그런 비량을 물끄러미 보았다.
“안 물어보십니까?”
“뭘?”
“저들이 누군지. 왜 여기까지 달려온 건지.”
남궁천이 턱짓으로 죽은 흑도인들을 가리키자, 비량이 피식 웃는다.
“물어보면 대답은 할 거고?”
“안 합니다.”
“그러면서 뭘 물어봐? 가자.”
“안 궁금하세요?”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강요할 생각 없다. 그리고…….”
비량이 남궁천을 스윽 돌아보더니 툭 던지듯 말한다.
“네가 무사하니 됐다.”
“…….”
확실히 모를 녀석이다.
갑자기 비량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낯간지럽다. 그치?”
“알긴 아시는군요.”
“뭐야? 아무리 그래도 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협곡을 따라 되돌아갔다.
* * *
“이렇게 이별하려니 너무 아쉽네.”
“부디 살펴 가시게.”
연추량과 이사흠은 계림 마을 어귀까지 나와서 생도들을 배웅했다. 특히 두 사람은 남궁천의 손을 맞잡으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정말이지 처음 남궁천을 보고 노발대발하던 모습을 떠올린다면 두 눈을 씻고 다시 봐야 할 만큼 애틋한 모습이었다.
초곡객잔에서 있었던 일은 비량이 대충 둘러대서 정리가 된 상황.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있겠죠. 계림의 일이 잘 해결되어서 다행입니다.”
“다 강호신룡 덕분일세.”
“자네의 명성은 이제 광서성에서 시작될 걸세. 자네는 광서성의 영웅이야.”
“너무 유명해지는 건 별론데…….”
겸양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유명세라면 이미 전생에 질릴 만큼 겪지 않았나?
연추량이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조금 부담스러울 수는 있겠지. 하나 낭중지추라고 하지 않던가? 언젠가는 자네도 받아들여야 할 걸세. 내가 아는 한 자네는 신룡이라는 별호에 멈출 사람이 아닐세.”
“나도 동감일세.”
이사흠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남궁천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말이 옳다.
그래, 언젠간 알려질 터.
차라리 백도무림에서 명성을 떨친다면, 맹주도 함부로 음모를 꾸며대긴 어려워지리라.
세상이 기다려주길 바랄 수는 없는 법.
‘내가 세상을 따라잡아야겠지.’
크, 방금 그 생각은 나답게 아주 멋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참 난 사람은 난 사람이다.
그렇게 남궁천 일행이 작별 인사를 나누는 동안 먼발치 나뭇가지 위에서는 까마귀 한 마리가 꼿꼿하게 선 자세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빛이 옥처럼 영롱한.
바로 옥안영오였다.
푸드득!
다음 순간, 옥안영오가 어디론가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