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87화 (187/508)

186. 얼마나 독했으면

‘사, 사람을 저렇게 팰 수도 있나?’

수풀 사이로 눈만 드러난 팽수혁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남궁천은 정말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 같았다.

백무극이 그 어떠한 저항을 시도하기도 전에 거의 일방적으로 두드려 패는 게 아닌가?

퍽! 퍽! 퍼퍼퍽! 빠악!

쿠당탕탕!

마침내 나가떨어진 백무극이 정자 난간마저 부수며 처참하게 처박혔다.

남궁천은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린 건지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저벅저벅 걸어갔다.

‘좀 심한데? 지금이라도 나가서 말려야 하나?’

팽수혁이 움찔거리는데, 마침 후원으로 또 한 명이 들어섰다.

“남궁 소협!”

다급히 남궁천을 부른 자는 다름 아닌 운경이었다.

남궁천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백무극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자 운경이 화들짝 놀라며 달려와 말렸다.

“이게 무슨 일이오? 남궁 소협이 이런 거요?”

“비켜! 저 새끼 아주 밟아 버릴 거니까.”

“거참, 술을 마셔도 곱게 마실 것이지…….”

“내가 지금 술 때문에 이러는 걸로 보여?”

“그, 그럼 대체 무슨 일로?”

“저놈이 원한 거니까 상관 말고 비켜.”

“어허,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진정하시오! 이러다 죽겠소!”

운경이 간신히 뜯어말리자 한참이나 어깨를 들먹이며 씨근거리던 남궁천이 겨우 진정하며 돌아섰다.

마침 후원의 소란을 들은 것인지 진소홍과 윤종승도 달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헉! 백무극이 왜 저렇게 된 거야?”

진소홍과 윤종승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운경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우선 백 소협부터 옮깁시다.”

진소홍과 윤종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무극에게 달려갔다.

백무극의 표정을 본 진소홍이 움찔거렸다.

“이 환자 웃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요?”

운경이 달려가 보자, 정말로 백무극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 남궁천…… 나는…… 이걸 원했다. 진심으로…… 덤벼라. 좀 더 덤벼보라고. 아직…… 끝이 아냐.”

거의 무아지경 속에서 중얼거리는 백무극.

남궁천의 눈이 뒤집혔다.

“아오, 나와! 저 새끼 아주 죽여 버릴 테니까!!”

“아, 아니오! 참으시오!”

“이러다 정말 죽겠어! 참아! 정당한 비무였다는 걸로 믿어줄게!”

남궁천이 윤종승에게 눈알을 부라렸다.

“믿어줄게? 줄게에에에에?”

“자자, 가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얘기하자. 우리는 동향 친구잖아?”

윤종승이 애써 웃음 지으며 남궁천을 떠민다. 진소홍은 인사불성이 된 백무극을 부축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후원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수풀 사이에서 얼굴만 내밀고 바라보던 팽수혁이 두 눈을 올빼미처럼 끔뻑였다.

‘아니, 도대체 이게 다 뭔 일이야?’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알 바는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소환단을 복용하는 거니까!

‘후우, 이제야 조용히 섭취할 수 있겠구나.’

팽수혁이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손에 든 소환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막 입에 털어 넣으려는 순간,

“거기서 뭐 하고 있소?”

“우아악!”

깜짝 놀란 팽수혁이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그그……!”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나 보니 운경이 연못 너머에서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지켜보는 게 아닌가?

‘뭐야? 저놈은 안 갔었어?’

운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뭘 그리 놀라시오? 아니, 그보다 수풀 사이에서 혼자 뭘…… 아……!”

뒤늦게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운경이 이상한 미소를 짓는다.

‘뭔데? 왜 웃는데? 뭘 생각한 건데? 뭐? 뭐?’

운경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저으며 물러난다.

“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소.”

“으응? 뭘?”

“하긴. 오늘 사람들이 많아서 측간이 좀 붐비긴 했지. 이해하오. 사람이 급하면 어쩔 수가 없지. 생리 현상을 어쩌겠소?”

“아니, 도대체 뭔 소리를…….”

“괜찮소. 원래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잔뜩 먹으면 장이 좀 활발해지는 것 아니겠소? 하던 일 마저…… 커흠. 마저 하시오. 그럼 힘내시오!”

“아니, 뭔 힘을…….”

“뒤처리도 잘하시고! 그럼 이만!”

“어어? 잠깐! 거기 딱 서! 그러니까 네가 상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참다못한 팽수혁이 벌떡 일어나자, 운경이 움찔거리고는 미간을 좁혔다. 아랫도리를 벗고 있을 줄 알았던 팽수혁이 멀쩡하게 바지를 입고 있는 게 아닌가?

“아…… 혹시 아직 볼일 보기 전? 아니면 다 끝나신 거?”

“그게 아니라…… 엇, 잠깐! 없잖아! 이런 씨!”

팽수혁이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 들고 있던 소환단이 보이지 않았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운경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부른다.

“팽…… 소협?”

“가만있어 봐!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어두워서 보이질 않는다고!”

“뭐가 말이오? 설마…… 똥 찾는 거요?”

“똥을 왜 찾아, 인마! 똥을! 그리고 뭔 똥? 아니, 왜 아까부터 자꾸 그쪽이야?”

“팽 소협.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으로…….”

“잠깐! 찾았다!”

순간 팽수혁의 시선이 연못 안으로 향했다.

수심이 얕은 연못 안에 소환단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그나마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과 후원에 밝혀진 등불이 아니었다면 알아보기도 힘들었으리라.

‘가만, 이걸 저놈이 보면 안 되는데?’

팽수혁이 건너편에 선 운경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운경은 마단곡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생도가 아니던가?

마단곡에 대해 아는 자가 많아질수록 생도들이 위험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한데 불행히도 운경의 시선이 팽수혁을 따라 수중에 머물렀다.

짙은 갈색에 동글동글한 덩어리.

운경이 미간을 잔뜩 좁히고는 중얼거렸다.

“저건…….”

“뭐, 뭘 봐! 내 거다! 내 거라고!”

팽수혁이 지레 조바심이 나서 소리치자, 운경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뭐…… 알고는 있소만. 어엇? 팽 소협, 뭐 하는 거요?”

운경이 화들짝 놀라서 소리치자, 팽수혁이 연못 안으로 손을 넣으면서 대답했다.

“뭐 하긴! 내 거니까 다시 주워야지!”

그때였다.

마침 연못 속에서 노닐던 잉어 한 마리가 헤엄쳐 오더니 그 갈색의 둥근 덩어리를 떡밥 먹듯이 꿀꺽 삼키는 게 아닌가?

순간 팽수혁과 운경이 동시에 기함하여 소리쳤다.

“먹, 먹었……!”

“그, 그걸 먹어……?”

전혀 다른 의미로 놀란 두 사람이었지만, 어쨌거나 경악한 수준은 비슷했다.

순간 팽수혁의 눈이 뒤집혔다.

“아니, 이 잉어 새끼가 감히 내 걸 처먹어?!!!”

첨벙!

팽수혁이 앞뒤 가리지 않고 연못으로 뛰어들자, 깜짝 놀란 운경이 달려왔다.

첨벙첨벙!

“팽 소협! 정신 차리시오!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잖소! 차라리 잘된 것 아니오?”

“아니, 잘되긴 뭐가 잘돼? 내 걸 저놈이 처먹었는데!”

“증거 인멸이 됐잖소!”

“증거 인멸을 하더라도 저건 내 배 속에 있어야 한다니까!”

“알긴 아는데! 어쨌거나 이미 세상에 나온 거잖소!”

“그렇다고 내 걸 저놈이 처먹어선 안 되지! 이거 안 놔? 놔!”

팽수혁이 운경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더니 눈에 불을 켜고 연못을 휘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미 잉어 수십 마리가 연못에서 뒤섞이는 바람에 당최 어떤 녀석이 소환단을 꿀꺽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아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하여튼 말코 새끼들이랑 엮이면 될 일도 안 된다니까!”

“거, 말이 너무 심하신…… 어어엇! 지, 지금 뭘 하는 거요!”

“보면 몰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배를 갈라야 해!”

“어허! 팽 소협! 아무리 그래도 이러는 건 아니오!”

늦은 밤, 후원에서 두 사람의 고성이 끊일 줄 모르고 솟구쳤다.

* * *

다음 날 아침.

“하하하하하!!! 크크큭. 아이고, 배야…….”

남궁천이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을 참으려고 몇 번이나 노력하다가 다시 터지곤 한다.

옆에 선 팽수혁은 눈 밑으로 시커먼 그늘이 져서 시큰둥한 목소리를 툭 뱉었다.

“웃기냐? 그게 웃겨?”

“크흡! 미, 미안. 그런데 정말 이건…… 너무 웃기잖핰크하하!!!”

남궁천이 배를 쥐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웃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주 울겠네. 울겠어.”

팽수혁이 볼멘소리를 하자 남궁천이 연신 키득거리며 대꾸한다.

“크흐흡. 아니, 그러게 왜 하필 그걸 거기서 처먹으려고 해? 좀 천천히…… 푸흐흡! 처먹지. 낄낄!”

“아끼다가 똥 될까 봐 그러지!”

“그런데 진짜 똥이 됐네? 크흐흐허헉!”

“이 새끼가 진짜…….”

팽수혁이 어금니를 부득부득 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인생 덧없다.”

“그만, 그만 좀 웃겨, 이 새끼야. 푸하하학!”

“인정머리도 없는 놈. 남의 불행을 아주 그냥 행복으로 여기는구나.”

팽수혁이 다시 긴 한숨을 내쉬다가 남궁천을 넌지시 돌아보았다.

남궁천은 여전히 배를 쥐고는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었다.

아, 생각 같아서는 그냥 죽여 버리고 싶지만…….

“야.”

“으응? 푸흡!”

“그래서 말인데 혹시 소환단…….”

“안 돼.”

순간 남궁천이 웃음을 뚝 멈추고는 정색한다.

팽수혁이 뺨을 파르르 떨었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어쨌거나 안 돼.”

“와, 이 새끼. 단박에 표정 변하는 것 보소.”

“안 되는 건 안 돼.”

“그래, 너 혼자 잘 처먹고 잘 살아라!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긴 동료에게 그깟 영단 한 알이 그렇게 아까운 거냐?”

“응. 아까워.”

“제길! 인정머리 없는 놈.”

“주고 싶어도 지금은 없다. 그리고 나는 무슨 자선사업가냐? 내가 안 줬어? 줘도 못 먹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기껏 줬더니 잉어가…… 잉어가…… 푸흡!”

“됐다, 됐어!”

팽수혁이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어디론가 저벅저벅 걸어갔다.

남궁천이 다시 배를 쥐고 한참을 웃다가 중얼거렸다.

“아아, 불쌍한 잉어.”

오늘 아침 소환단을 먹고 죽어 버린 잉어를 보고 운경도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얼마나 독했으면…… 쯧쯧.”

* * *

마침내 장흥표국이 오주상단을 떠나는 날이 밝았다.

“잘 머물다 갑니다.”

이사흠이 포권하며 인사하자 채선일이 부드럽게 웃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소. 오주상단의 표물은 이제 장흥표국이 전담해주시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주님.”

“별말씀을. 내가 감사할 일이오. 그리고…….”

채선일의 시선이 남궁천에게 향했다.

“강호신룡, 고맙네. 앞으로 자네의 행보를 기대하겠네.”

“뭘 기대까지. 덕분에 잘 먹고, 잘 쉬다 갑니다.”

남궁천이 배를 두드리며 말하자, 채선일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보면 마치 격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낭인 같지 않은가? 한평생 험한 강호에서 구르고 구른 인간 같다.

‘알면 알수록 모를 아이로구나.’

채선일이 속내를 갈무리하고는 모두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나자 장흥표국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귀향길에 올랐다.

남궁천은 표행을 따르면서 연신 미소를 지었다.

“좋은 여정이었다.”

마단곡의 영단도 챙겼고, 강상도를 무림맹 오주분타에 넘기면서 현상금까지 두둑이 받아냈다.

연추량과 이사흠은 약속한 대로 강상도의 현상금을 남궁천에게 전부 주었다.

그야말로 재물이 보이는 길이었다.

다만…….

“하아. 인생 덧없다.”

옆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울 것 같은 얼굴로 걷는 팽수혁.

남궁천이 혀를 차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새끼. 마음 약해지게 만드네. 돌아가면 그냥 소환단 하나 줘? 아니, 안 되지. 이러다 진짜 개털 될라.’

남궁천이 제 뺨을 찰싹 때리고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여튼 삶이 편해지면 마음도 해이해진다니까.

이제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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