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86화 (186/508)

185. 얼마나 독했으면

“으하하! 좋구나!”

“이게 얼마 만에 만찬이냐?”

모처럼 오주상단에서 연회가 열렸다.

채선일은 먼 길을 온 장흥표국과 비월문도들에게 충분한 먹거리와 술을 제공했다.

도지백의 농간에 넘어가 괜한 의심을 품었던 것이 미안했던지 악사들까지 불러서 호화로운 연회를 즐기도록 했다.

안마당 가득 잔칫상이 차려졌고, 표행에 참여했던 이들은 쟁자수까지 빠짐없이 자리에 앉아 술과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닭다리를 한 손에 들고 기름을 뚝뚝 흘리며 뜯는 쟁자수부터 술병째 들고 나발을 부는 표두까지. 물론 생도들과 비월문도들도 왁자지껄한 잔치 분위기를 한껏 즐겼다.

그렇게 술자리가 한창 이어질 때 한쪽이 수군거리면서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간 곳에는 채선일이 안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연회 중심 자리로 이동한 그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참 많은 일이 있었소. 여러분께는 다소 미안한 일도 있었고.”

그 말에 몇몇 표행 무리들이 툴툴 웃음을 흘린다. 채선일도 쑥스러운 듯 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하나 그 모든 일의 결과는 바로 여러분의 승리요. 장흥표국의 승리! 그리고 비월문의 승리! 본 단은 여러분의 승리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소!”

채선일이 힘주어 말하자 표행에 참여했던 자들이 일제히 술잔을 들어 올리며 함성을 내지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채선일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흑산채를 토벌하는 대업까지 이루었소. 이는 계림과 오주의 경사뿐만이 아니라, 광서성 전체의 경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요!”

다시 한번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이보다 좋은 일이 또 있을까? 정말이지 지난 몇 년간 앓던 이가 쑥 빠진 기분이다.

잠시 뜸을 들이던 채선일이 다소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이 이룬 것은 그뿐만이 아니오. 그간 정도를 표방하면서 뒤로는 사악한 무리들과 손을 잡았던 삼봉파를 무너뜨렸다는 위업도 있소. 나는 불의 중에서도 가장 질 나쁜 불의가 바로 정의 속에 숨은 불의라고 생각하오. 한데 여러분이 그걸 잡아냈소!”

채선일이 환호하는 이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훑어보다가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누구보다 앞장서서 해내고, 해결한 이가 있었소. 바로 강호신룡 남궁천 소협이오!”

“와아아아아!”

그 어느 때보다도 환호성이 드높아졌다. 갈채도 터져 나온다. 연추량과 이사흠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함께 온 생도들도 이번만큼은 박수를 보내며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채선일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며 말했다.

“남궁 소협.”

“예?”

“한 말씀 하시겠나?”

채선일이 손으로 안내하며 말하자, 남궁천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걸어 나왔다.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이번 일에 있어서 자네의 도움이 무척이나 컸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네. 한마디 해주게나.”

남궁천이 어쩔 수 없이 채선일 옆으로 다가와 섰다.

장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일제히 침묵한 채 남궁천을 빤히 응시한다.

남궁천이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무연회를 겪으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건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줄 알았는데. 역시 많은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다.

늘 사람들 시선을 피하기만 했던 인생이 아니었던가? 적응하는 데까진 시간이 좀 걸리리라.

남궁천이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가장 질 나쁜 불의는 정의에 숨은 불의라고 하신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짜 불의가 무엇인지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온갖 정의를 들먹이면서 속으로는 거기에 속는 사람을 개돼지 취급하는 인간들도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엄한 사람을 악으로 규정해서 몰고 가는 일도 생기지요. 아, 물론 단주님께 하는 말은 아닙니다.”

남궁천의 말에 몇몇 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채선일 역시 내심 뜨끔한 마음이 들어 쓴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불과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애꿎은 장흥표국을 염치없는 사기꾼 취급하지 않았던가?

물론 남궁천은 정말로 채선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일평생을 두고 한 말이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무림맹의 표적이 되어 공적으로 내몰렸던 전생.

남궁천은 무림에서 가장 강한 칼자루를 쥔 자에게 찍혔다는 이유로 불의의 상징이 되어야만 했다.

남궁천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형형하게 빛났다.

“가장 큰 불의는 진짜 불의를 알아보지 못하는 불의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실수를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남궁천이 담담하게 말을 맺었다.

한동안 장내에 침묵이 이어졌다.

뭐랄까?

남궁천의 한마디 한마디에 묘한 울림이 있었다.

불의를 알아보지 못하는 불의.

무인들이 저마다 그 뜻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한낱 생도가 한 말이라며 무시하고 넘기기에는 그 무게가 남달랐다.

마침 연추량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좋은 말이었네, 남궁 소협!”

“남궁 소협의 말대로 우리 모두 숨은 불의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오늘의 주역, 강호신룡을 위해 건배합시다.”

“좋소!”

저마다 술을 채운 잔을 높이 들었다.

“강호신룡!”

사람들이 저마다 남궁천의 별호를 외치며 잔을 부딪치고는 술잔을 들이켰다.

강호신룡.

그 별호가 드높아지는 순간이었다.

채선일이 흐뭇한 표정으로 남궁천에게 다가왔다.

“고맙네. 자네가 우리 모두를 일깨워준 것 같군.”

“뭘 그렇게까지요.”

“그런데…… 정말로 내가 죽어도 상관없었던 건 아니지?”

도지백에게 인질로 잡혔을 때를 두고 한 말이었다. 물론 농담과 진담이 반쯤 섞인.

남궁천이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고 놀리기 위해 슬쩍 짓궂게 건네본 말인데 오히려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대꾸한다.

“글쎄요. 하나는 확실하죠. 단주님이 죽으면 복수는 하려고 했으니까요.”

“끄응.”

괜히 물어봤다. 역시 이 녀석…….

’내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은 건지도.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말한다.

“단주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하니까요.”

‘아, 이걸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은 아닐 테지?’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다가 피식 웃음이 나와 버렸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것도 괜찮지 않은가?

자신이 죽었을 때 확실히 복수해줄 인간이 있다는 것.

적어도 그 말 한마디는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간다.

살아 있을 때는 온갖 언약을 남발하면서, 정작 그 사람이 없을 때는 안면 몰수하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인간보다는 진심을 내뱉는 인간이 보기 드문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남궁천은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마침 연추량과 이사흠이 다가왔다.

“남궁 소협, 오늘은 실컷 마시고 즐기게나.”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합니다.”

“자네 덕분에 이번 표행은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네.”

“흐흐. 제가 뭐랬습니까? 재물이 보이는 길이라니까요.”

“그러게 말일세. 아마 강상도를 무림맹 오주 분타에 넘기면 현상금도 상당할 걸세.”

“오, 그래요? 그건 몰랐네!”

남궁천이 눈을 반짝이자, 연추량과 이사흠이 서로를 쳐다보고는 부드럽게 웃는다.

연추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지백 문주와 강상도 채주를 잡은 건 모두 자네의 계략 덕분이 아니었나? 그러니 현상금은 모두 자네가 가지도록 하게. 우리는 이미 그렇게 얘기를 나눴다네.”

“에이, 뭐 그런 당연한 걸.”

“으응? 그, 그런가? 하긴.”

잠깐 당황하던 연추량이 피식 웃어 버렸다.

그래, 이게 남궁천이다.

남궁천은 이런 사람이다.

속내를 괜히 돌리지 않는 사람.

그래서 가끔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적어도 정의 속에 불의를 숨기지 않는 진국이다.

연추량이 잔을 들었다.

“자, 마십시다! 오늘은 기분 좋은 밤입니다!”

“건배!”

* * *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지객당 후원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팽수혁.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팽수혁은 품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 들었다.

‘아이고, 귀여운 내 새끼.’

흐뭇한 미소를 지은 팽수혁이 목함의 덮개를 열고는 향을 한 번 맡았다. 향기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지는 청아한 향이 뇌리까지 스며드는 듯하다.

“하아. 좋구나.”

남궁천이 건네준 소환단.

마단곡까지 들어가서 겨우 소환단 하나만 건진 게 억울하긴 했지만, 남궁천 말대로 자신은 굴러들어간 돌이었다.

도대체 남궁천이 마단곡을 어찌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 덕에 소환단이라도 건졌으니…….

“으흐흐흐. 드디어 이놈을 먹어보는구나.”

표행을 하면서 하루에 몇 번씩이나 품속을 확인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당장 복용해 버리고 싶었지만, 어디 영단이라는 게 국수처럼 후루룩 먹을 수 있는 것이던가?

일단 복용하고 나면 영단의 효력을 오롯이 흡수하기 위해서 한동안 운기조식만 집중해야 한다.

그러려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오주 상단에 도착한 지금, 모두가 술에 취해 들떠 있을 때가 아니면 한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는 어려우리라.

‘아아,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영단이야?’

이왕이면 좀 더 안전한 장소에서 복용하는 게 좋긴 하겠지만, 지금까지도 참을 만큼 참았다.

‘자자, 주변에 아무도 없지?’

여기저기 둘러봐도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쯤 다들 연회 분위기에 잔뜩 젖어서 고주망태가 되어 있을 터.

팽수혁은 정자 뒤쪽의 연못가로 걸어갔다.

‘으음. 이쯤이면 괜찮겠어.’

정자 뒤쪽으로 수풀이 우거져 있었는데, 바로 곁에는 작은 인공 연못이 꾸며져 있었다.

“좋아, 그럼 여기서 한 번 복용해볼까?”

결심을 굳힌 팽수혁이 수풀 사이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후우우우.”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팽수혁이 목함에서 소환단을 꺼내 들고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잘 소화한다면 최소 이십 년 동안 면벽 수련을 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을 흡수하게 되리라.

팽수혁이 손에 든 소환단을 막 입에 털어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기척……!’

팽수혁이 멈칫거리고는 주의를 기울였다.

물론 누군가 후원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연못 너머까지 찾아올 일은 없으리라.

하나 이왕이면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복용하고 싶었다.

‘쳇, 방해꾼이…… 누구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데, 마침 전각 모퉁이를 지나 두 사람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남궁천……?’

먼저 들어선 사람은 남궁천. 그리고 그 뒤를 바짝 따라붙은 사람은 뜻밖에도 백무극이었다.

남궁천이 휙 돌아서더니 백무극에게 짜증 섞인 말투를 던졌다.

“도대체 왜 이래?”

“제발 부탁이다. 내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

“싫다고 했을 텐데.”

“너 아니면 안 돼.”

백무극의 표정과 말투가 사뭇 간절하다.

뭐지? 저것들……? 왜 오글거리는 대화를……?

남궁천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없다. 가라.”

“부탁한다. 날 외면하지 마라.”

털썩!

순간 백무극이 털썩 무릎까지 꿇는 게 아닌가?

하마터면 지켜보던 팽수혁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니, 저 백무극이 무릎을? 진짜 고백이라도 한 거야? 뭐야?’

한데 어째 들을수록 대화 내용이 조금 이상하다.

백무극이 간절한 말투를 이어간다.

“부탁이다. 한 번만 더 싸우자! 내가 원하는 상대는 너밖에 없다.”

“꺼지라니까.”

“안 돼. 나는 너와 비무할 거야.”

“아, 진짜! 자꾸 질척거릴 거야?”

“한 번 속 시원하게 붙자니까!”

허! 저것들이 술을 처먹으려면 곱게 처먹을 것이지. 나이가 몇 살인데 지금 술 처먹고 쌈박질이나 하려고.

보다 못한 팽수혁이 벌떡 일어나려는데, 순간 남궁천의 주먹이 백무극의 안면을 강타했다.

꽈앙!

그대로 튕겨 나간 백무극이 저만치 쓰러졌다.

남궁천이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우, 씨! 오냐, 아주 죽여주마! 너 이 새끼, 이리 딱 와! 이 징글징글한 새끼!”

팽수혁이 입을 딱 벌렸다.

오마나, 이게 무슨 일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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