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회자정리(會者定離)
초곡객잔(初谷客棧).
길고 긴 협곡 초입에 위치한 허름하고 낡은 객잔이다.
협곡에 들어서기 전에는 반드시 들러야 한다는 객잔이기도 하다. 특히나 늦은 시간에 도착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묵게 된다는 곳.
괜히 초곡객잔을 지나쳐 협곡으로 곧장 들어섰다가는 오밤중에 갖은 고생을 하고 되돌아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그닥…… 다그닥…….
남궁천이 합류한 표행은 이제 막 협곡을 앞두고 초곡객잔에 다다랐다.
손님 하나 없는 객잔이지만 주인장은 야외 탁자에 앉아서 호객 행위도 하지 않은 채 부채질만 살랑거린다.
마치 ‘너희들이 여길 안 들르고 저 협곡을 지나갈 수 있겠어?’라고 거만하게 묻는 듯하다.
이사흠이 연추량에게 다가가 말했다.
“잠시만 쉬었다가 가지요. 협곡으로 들어서면 쉴 곳이 마땅치 않을 테니까요.”
“그럽시다. 아직 해가 긴 만큼 조금만 쉬고 출발합시다. 여기서 하루를 보내기에는 여유가 있으니.”
“그러지요.”
이사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시를 내리자, 표사들과 쟁자수들이 저마다 객잔으로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객잔 주인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느긋하게 일어나서는 주방으로 향했다.
남궁천을 비롯한 생도들도 탁자 두 군데에 나눠서 네 명씩 앉았다.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단곡에 들어갔던 이들이 함께 모여 앉게 되었고, 그렇지 않은 생도들은 옆 탁자에 따로 앉았다.
“자자, 간단히 요기를 하고 바로 떠날 테니 모쪼록 술은 자중하게들.”
“예, 국주님!”
표사들과 쟁자수들이 한목소리로 대꾸하고는 음식을 주문했다.
남궁천도 국수 한 그릇을 시키고는 물을 마실 때였다.
휘이이잉.
협곡에서 한차례 바람이 불어와 탁자를 스쳐 지나간다. 지극히 평범한 바람결이었지만, 물을 마시던 남궁천이 멈칫거리고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남궁천의 시선을 따라 다른 생도들도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협곡 사이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남궁천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유현이 넌지시 물었다.
“누가 오는데?”
“예?”
유현이 다시 시선을 돌리자 과연 협곡 사이에서 세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게 아닌가?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 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히 남궁 소협의 기감은 정말 귀신같구나.’
사실 남궁천에게 이 정도 기척을 감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평생 마음 졸이며 도망만 다닌 자라면 내공이 없어도 기적에 가까운 촉을 발휘하곤 하니까.
죽립을 깊이 눌러쓴 자들이었는데, 범상치 않은 행색으로 볼 때 무인임이 틀림없었다.
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초곡객잔으로 다가와 야외의 빈 탁자를 골라 앉았다.
공교롭게도 남궁천이 앉은 바로 옆자리였다. 남궁천이 그런 세 사람을 빤히 노려보았다.
마침 세 사람 중 외팔이 사내가 남궁천을 힐끔 보더니 조용히 걸어와서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꼬마야, 왜 그리 쳐다보느냐? 어른을 그리 노려보면 예의가 아니지.”
피식.
“웃어?”
“아직 안 죽었네? 영감.”
불쑥 튀어나온 남궁천의 말에 외팔이 사내가 흠칫거렸다. 그가 주변을 슬쩍 훑어보자,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었다.
“긴장할 것 없어. 어차피 다른 녀석들은 별로 신경 안 쓰고 있으니까.”
확실히 그랬다.
쟁자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표사들과 비월문도들도 이쪽을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그저 지나가던 무인이 남궁천에게 다가와 뭘 묻고 있으려니 하고 넘기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떠한 살기나 투기도 드러내지 않았기에.
남궁천과 함께 있는 생도들은 다소 긴장하고 있었지만, 역시 투기나 살기를 드러내진 않았다.
굳이 정체도 모를 상대에게 이쪽에서 먼저 적의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으므로.
단지 남궁천은 그들의 정체를 아는 것 같았다.
죽립을 눌러쓴 외팔이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용케도 날 알아보는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읊어 보셔.”
“가져간 걸 내놓아라.”
“뭘? 맡겨놓은 거라도?”
외팔이 사내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그가 한가로운 객잔을 휘이 둘러보고는 다시 속삭이듯 말한다.
“보아하니 네가 가져간 걸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괜히 시끄러워져 봐야 서로 좋을 게 없을 테지.”
“그야 당연하지. 원래 가진 자는 입 다무는 게 상책이니까.”
“잘했다. 똑똑하구나. 대가로 어느 정도는 떼어주마.”
“영감, 미친 소리를 너무 당연하게 하니까 듣기 거북하잖아.”
“욕심에 목숨을 걸겠느냐?”
“팔 한쪽은 어쨌어?”
“대가로 치렀지.”
“거 이상한 셈법이네. 나는 받은 적이 없는데.”
“장난은 그만하자.”
슬슬 외팔이 사내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은 그였다.
남궁천이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어차피 소문이 나돌아봐야 서로 득 볼 게 없으니까 조용히 처리해야겠지?”
“확실히 멍청하진 않구나.”
“당연하지. 강호의 이목이 온통 집중되면 어디 영단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나 하겠어?”
“그럼 조용히 거래하겠느냐?”
“순순히 내어주면 내 몫으로 얼마나 줄 건데?”
“얼마를 원하느냐?”
외팔이 사내, 흑선자가 입매를 비틀며 물었다.
확실히 아직 강호 경험이 미숙한 아이라 어쩔 수가 없나 보다. 그래도 무공은 한가락 해서 은근히 신경이 쓰였는데.
하긴. 재능과 경험치가 비례하는 건 아니니.
남궁천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귀 좀.”
“말해보아라.”
흑선자가 아까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어조로 허리를 살짝 숙였다.
찰나!
탁, 쉬이잇, 푹푹푹!
눈 깜빡할 사이에 남궁천이 젓가락을 쥐더니 그대로 단전과 목, 그리고 이마에 차례로 쑤셔 박는 게 아닌가?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같은 탁자에 앉아 있던 생도들조차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커억!”
인당혈에 젓가락이 박힌 흑선자가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는 넘어갔다.
쿠웅!
그 순간 객잔의 모든 무인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차차차앙!
“남궁 소협!”
“무슨 일인가!”
하지만 그들의 반응보다도 남궁천의 다음 행동이 훨씬 빨랐다.
파바바바바바밧!
순간 남궁천이 그대로 흑선자를 밟고는 협곡 쪽으로 내달리는 것이 아닌가?
“어엇! 잡앗!”
“이런!”
옆 탁자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죽립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남궁천의 뒤를 바람처럼 쫓기 시작했다.
어찌나 빠른지 그들이 쓰고 있던 죽립이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가 버렸다.
뒤늦게 연추량과 이사흠이 달려와 탁자 옆에 쓰러진 흑선자를 보았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어찌 된 일인가?”
이사흠이 탁자에 남은 생도들을 다그치자, 유현이 얼른 나섰다.
“저희들도 정확한 사정을 모르겠습니다. 남궁 소협과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개인적 원한?”
이사흠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백무극과 팽수혁도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제가 가보지요.”
불쑥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비량.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바닥을 차며 한 줄기 바람처럼 달려갔다. 어마어마한 경공술에 연추량과 이사흠이 입을 딱 벌리고는 돌아보았다.
“도대체…… 뭐가 뭔지…….”
* * *
촤르르르륵!
협곡 안으로 들어선 남궁천이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급히 멈춰 섰다. 마침 그 뒤를 바짝 추격하던 적노파파와 옥소공자도 급히 멈춰 섰다.
촤르르륵!
촤아아악!
적노파파가 열 손가락에서 형형한 기운을 뿜어내며 말했다.
“꼬마야, 제법 달릴 줄 아는구나.”
“그럼. 이래 봬도 무연회 경공 대회에서 일 등 한 몸인데.”
“하나 우리 손을 벗어날 순 없을 거다. 지금이라도 네가 가져간 걸 내놓는다면…….”
“그럴 것 같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지. 내가 왜 여기까지 냅다 뛰었을까?”
“……?”
적노파파와 옥소공자가 서로를 바라보자,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그쪽에서 말실수해서 마단곡 이야기가 나올까 봐. 그래서 여기로 온 거지. 비밀을 아는 사람이 많아 봐야 좋을 게 없잖아?”
“훌륭한 생각이군요.”
옥소공자가 부채를 살랑이며 빙그레 미소 짓자, 남궁천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너는 뭐야?”
“예?”
“적노는 이미 알고 있고. 너는 뭐 하는 놈이냐고.”
“아아, 저는…….”
“됐다. 어차피 죽을 놈. 이름 알아봐야 재수만 없지.”
“…….”
“기생오라비로 부르마.”
“허.”
옥소공자가 실소를 터뜨렸다.
분명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은 아직 약관도 지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맹랑하기가 이를 데 없지 않은가?
옥소공자의 입가에 살인미소가 맺혔다.
“순순히 내놓으시면 좋을 것을.”
“아이야, 네놈이 이리 나오면 죽여서 빼앗을 수밖에 없단다.”
“어디 해보시든지. 할망구.”
이쯤 되자 적노파파도 인내심이 다 한 것인지 전신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그녀의 손가락이 흉측한 모양으로 굵어지면서 마치 짐승의 발톱처럼 변해갔다.
“만용이 지나치면 명을 재촉하는 법!”
파앙!
순간 적노파파가 화살처럼 날아갔다.
남궁천의 눈이 반짝였다.
‘화계!’
손가락마다 뻗어 나온 열 줄기의 공력이 거미줄처럼 덮쳐온다.
남궁천이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수계의 기운을 운용했다. 그리고 수계의 기운에 가장 어울리는 검법.
‘무당 말코들이 알면 게거품을 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보는 사람이 없으니.
스스스스슷!
일순 남궁천의 동작이 몹시 느릿하게 펼쳐진다. 맹렬하게 달려들던 적노파파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느린 모습이다.
하지만 적노파파의 지공이 지척에 와 닿자, 남궁천의 신형이 놀라울 정도로 빨라졌다.
쉬이이이잇!
열 줄기의 공력을 피해 바람처럼 빠져나간 남궁천이 눈 깜빡할 사이에 벽라검을 뻗어왔다.
한데 검봉이 향하는 곳이 기이하다.
빙글빙글.
마치 원을 그리듯 계속 해서 회전한다. 어느 곳을 어떻게 노리는지 알 길이 없다.
이게 검격인지 검무인지 애매할 정도로 너풀너풀 움직이는 느낌이다.
카가가강!
적노파파의 손톱과 벽라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일어난다.
“어, 어찌……?”
적노파파의 마음에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는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하게 휘몰아쳐오는 남궁천의 검격을 정신없이 막았다.
분명 느린 듯한데 반격하기가 애매하다.
모든 길을 차단당한 느낌.
마치 커다란 파도가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이다.
‘가만…… 이건 설마?’
언젠가 상대한 적이 있다 싶었더니!
그렇다.
무당파의 태극검이 아닌가?
크고 작은 원을 그리듯 펼쳐지는 검술!
확실히 무당파의 태극검과 꼭 닮았다. 무당의 말코 도사들은 그녀의 천적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어지간하면 부딪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묘리 때문이다.
모든 도가 문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당은 특히나 도가사상의 근본에 집착하기에 그녀의 무공과 상극을 이루곤 했다.
한데 여기서 무당파의 태극검을 상대하게 될 줄이야?
가만. 그런데 이 녀석 남궁세가라고 하지 않았나?
어째서 무당파의 무공을 사용하는 거지?
적노파파의 머릿속이 혼란해진 틈에 남궁천의 검격이 일순 바뀌었다.
파앗!
마치 화살에 재워진 듯 벽라검이 적노파파의 심장을 향해 곧게 날아갔다.
창궁검법의 창궁일시 초식이었다.
쉬이이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