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20화 (120/508)

120. 빛나는 대머리

남궁천이 나간 방에 홀로 남은 장원식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는 천둥벌거숭이가 소가주를 맡겠다고? 남궁 가주께서도 더 이상 사리 분별이 안 되는 모양이군.’

하긴 딸이 천하의 악적이라는 대살성과 연분이 났으니 아직까지 제정신으로 버틴다면 그게 더 이상할 지도.

장원식이 소리 내서 혀를 차는데 마침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남궁천이 들어왔다.

괜히 속내가 찔린 장원식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무, 무슨 일인가? 마음이 바뀌었나?”

“그게 아니라…….”

“말해보게.”

“그 대머리들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그것도 모른 채로 나간 거냐!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장원식이 짧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다짜고짜 장원으로 찾아가면 분명 만나주지 않을 걸세. 거들떠보지도 않겠지. 다만 오늘은 이현 저잣거리 남쪽 지역의 객점 거리에서 수금하는 날이라 들었네. 그곳으로 가보면 아마 광승회 스님들을 만날 수 있을 걸세.”

“뒷골목 왈패 같은 것들에게 스님은 무슨. 땡중도 못 된 대머리들이지. 아, 이젠 대머리도 아니려나?”

“부디 방심하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남궁천이 다시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이젠 진짜 갔겠지?

목을 길게 빼고 문을 살핀 장원식이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궁세가의 명운도 이젠 다 했구나.”

* * *

이현 저잣거리 남쪽에 자리 잡은 이현객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지금이라면 객잔은 손님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이현객잔은 조용하다.

탁자를 닦고 또 닦던 점소이를 향해 주인장이 한숨을 내쉬며 푸념했다.

“그만해라. 손님도 없는데 무슨 걸레질이냐?”

“에이, 손님이 없으니까 걸레질하죠. 손님 계시면 음식 나르느라 바빠요.”

점소이가 넉살 좋게 대꾸하는 말에 주인장이 피식 웃었다.

“이리 와보아라.”

“예, 말씀하세요.”

“자, 여기.”

주인장이 던져 준 주머니를 점소이가 넙죽 받았다. 주머니를 열어보니 철전이 꽤 묵직하게 들어 있다.

“주인어른, 좀 많은데요?”

“퇴직금이다, 이 녀석아.”

“퇴직금이라니요?”

“미안하게 됐다.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구나.”

“주인어른…….”

“너도 더 좋은 곳으로 가서 일해라. 너 정도면 두 팔 벌려 환영할 객잔도 많을 게야.”

“주인어른,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더 버텨보시죠?”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주인장이 객잔 한쪽 구석에 부서진 의자와 탁자를 가리켰다.

불과 며칠 전에 광승회 스님들이 찾아와서 상납금을 내지 않는다고 행패를 부리고 갔던 흔적.

점소이의 눈가에 든 푸른 멍 자국도 그때 생긴 것이었다.

“빌어 처먹을 놈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니 장사가 잘 될 까닭이 있겠느냐?”

“그럼 주인어른은 어쩌시려고요?”

“다 접고 떠나련다. 어디 구석진 곳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던가? 그것도 안 되겠으면 산으로 들어가 도적질이라도 하지, 뭐.”

농담 삼아 던지는 말들이었지만, 주인장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점소이가 한숨을 쉬고는 돈주머니를 도로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안 받겠습니다요.”

“뭐, 인마?”

“전 여기서 주인어른 돌아가시면 객잔 물려받을 생각이라니까요.”

“이놈이…… 지금 나 죽으라고 고사 지내려는 거냐?”

“그게 아니잖아요.”

“일없다. 이거 받고 썩 꺼져.”

“안 받는다니까요.”

“이놈이 정말……!”

“주인어른,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더 버텨봐요. 그 소식 들으셨죠? 이번에 무연회 우승자가 남궁세가…….”

“또 남궁! 남궁! 남궁세가가 망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남궁세가를 찾고 있어?”

“이번엔 제 촉을 믿어보시라니까요. 정말로 남궁세가가 다시 일어설 것 같다니까요.”

“시끄럽다! 남궁세가라면 이제 치가 떨린다. 대살성과 연분이 난 것도 모자라 이현의 상권을 그 광승회에 팔아넘긴 작자들이야! 지난 몇 년간 한 번이라도 그들이 우릴 찾은 적이 있더냐? 난 더 이상 그들을 믿지 않는다!”

결국 점소이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짜고짜 역정을 내는 주인장이 내심 안타까우면서도 그 속내를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오히려 주인장이 더 남궁세가를 믿었으니까.

남들 모두 남궁세가가 끝났다고 말했을 때, 이현객잔 주인장만큼은 남궁세가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소리쳤었다.

하나 삶이 피폐해지면서 그 신념도 조금씩 꺾이더니 이젠 아예 마음이 돌아선 것이다.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더 컸으리라.

“그래도 전 이 돈 받을 수 없습니다.”

“뭐야?”

“갈 곳도 없는 절 거둬 주셔놓고 이제 와서 내치기 있습니까?”

“그래서 나름 두둑이 넣었잖냐!”

“필요 없다고요!”

“이 답답한 녀석……!”

그때였다.

“진짜 답답한 녀석이네. 왜 돈을 싫어하고 지랄이여? 아니, 여긴 막 돈이 넘쳐나나 봐? 우린 돈이 없어 죽겠는데.”

주인장과 점소이가 해쓱한 표정으로 돌아본 곳에는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늘어진 중년의 사내가 승복을 입은 채 서 있었다.

그 곁에는 민머리의 사내도 함께 있었는데, 역시나 승복을 입고 있었고 족제비처럼 찢어진 눈이 매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광승회 소속이었는데, 머리카락이 치렁치렁한 사내는 괴불자(怪佛者)라 불렸고, 민머리 파계승은 파각(破覺)이라 불렸다.

괴불자가 잔뜩 굳어 있는 주인장과 점소이 사이로 걸어가더니 옆의 탁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해? 주인장, 술!”

“없소.”

“뭐?”

“며칠째 장사를 못해서 돈도 못 버는데 술이 어디서 생기겠소?”

“허! 이것 봐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돈이 넘쳐나서 서로 가지라며 떠밀던 것들이. 뭐? 돈이 없어? 야, 그거 이리 가져와 봐.”

괴불자가 돈주머니를 가리키자, 점소이가 손을 꽉 쥐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어허! 이리 안 와? 돈 욕심 없다며? 갑자기 눈이 뒤집힌 거야?”

“이, 이러지 마시죠!”

“이런 미친놈을 봤나? 점소이가 지금 손님한테 훈계하는 거냐? 내가 뭘 했는데?”

“당, 당신들이 이러니까 장사가 안……!”

퍽!

어느 순간 말없이 다가온 파각이 점소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대로 고꾸라진 점소이가 돈주머니를 놓치자, 파각이 그걸 들어 괴불자에게 던졌다.

“어디 보자. 이것 봐라. 이 새끼들 아주 신났네, 신났어. 시주할 돈도 없다면서 버티던 놈들이 아주 생 지랄들을 하는구나. 이건 돈이 아닌가 봐? 주인장?”

“돌, 돌려주시오.”

“내가 왜 돌려줘야 하는데?”

“그건 저 아이의 퇴직금이오. 당신네들 때문에 장사가 안 돼서 이제 그만 접을 생각이란 말이오!”

“흐음. 그렇구나. 이게 퇴직금이구나. 야, 너. 이리 와봐.”

점소이가 눈치를 살피다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돈 돌려줄까?”

“예.”

“허! 패기보소. 좋아, 그럼 줄 테니까 어디 받아 보든지!”

순간 돈주머니를 움켜쥔 괴불자가 그대로 주먹을 뻗어 안면을 때렸다.

“커억!”

코피가 터진 점소이가 뒤로 주춤 물러나자, 괴불자가 쫓아오며 다시 돈주머니를 쥔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컥!”

“거참, 왜 안 받아? 자, 준다잖아. 받으라니까?”

퍼억! 퍽! 퍽!

“컥! 그, 그만……!”

“왜? 돈 받는다며? 이 새끼들이 아주 시주할 돈은 없으면서 제 뱃대지 채울 돈은 넘쳐서 난리지?”

퍽! 퍽! 퍽! 퍽!

그야말로 일방적인 구타.

점소이가 나름 방어를 하려고 했지만 괴불자는 무공을 상당한 수준으로 익힌 자였다.

보다 못한 주인장이 나서며 매달렸다.

“아이고, 그만 좀 하십시오! 이제! 이러다 애 죽이겠소!”

“이거 안 놔? 놓으라니까.”

퍼억!

“어이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찍은 주인장이 울분에 찬 표정으로 일어났다.

“정말 왜들 이러시오! 도대체 어디까지 망하게 해야 속이 후련하시겠소?”

“뭐? 주인장, 여기가 왜 망하는지 알아?”

“그야 당신네들이……!”

“시주를 안 해서 그런 거 아냐. 병신들아. 부처님의 가호를 받고 싶으면 시주를 해야지! 나락에 떨어지고 싶어? 극락왕생해야 할 것 아냐? 아, 혹시 하루빨리 극락왕생하고 싶어서 이 지랄들이신가? 그럼 이 기회에 극락왕생시켜줘?”

괴불자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히죽 웃는다.

그 모습이 마치 염라 같다.

주인장은 암담한 표정이 되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이곳이 나락이오.”

“뭐라고?”

괴불자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자, 주인장이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이미 여기가 나락이란 말이오! 당신들이 나타난 순간부터 이현은 나락이 되었소! 당신들이야말로……!”

퍼억!

“커윽!”

“네놈이 진정 부처님의 진노를 감당할 생각이더냐!”

사자후로 외친 소리에 주인장과 점소이가 동시에 귀를 틀어막으며 비틀거렸다.

괴불자가 저벅저벅 걸어가서는 주인장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주인장, 잘 들어. 내일까지다. 내일까지 시주하지 않으면 여기 매각도 못하도록 확 불을 질러 버릴 거니까. 생각 잘해. 이게 다 불쌍한 너희 같은 중생들 구제하려고 그러는 게야. 알겠……!”

“제발 그만들 해! 이 악랄한 놈들아! 네놈들이 무슨 스님이냐? 야차 같은 놈들!”

순간 괴불자와 파각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돌아보았다.

어느새 일어난 점소이가 어깨를 들먹이며 울분에 찬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곧 네놈들을 다 박살 낼 거다! 남궁세가 공자가 이번에 무연회 우승했다는 소문은 들었겠지?”

“남궁 뭐?”

“남궁세가 말이다! 남궁세가가 이제 다시 일어서면 네놈들은…….”

“풋, 푸하하하하! 이 미친 새끼 좀 보소. 아니, 언제 적 망한 남궁가를 들먹이는 거야? 이보세요. 방금 기절한 사이에 꿈꾸셨어요?”

“꿈은 네놈들이 꾸고 있겠지? 이현은 대대로 남궁세가 관할지였어 언제까지 네놈들이 설치게 놔둘 것 같아? 곧 남궁세가가 네놈들을 다 박살낼 거다!”

“하아…… 니미럴. 이젠 별 하찮은 점소이한테 이런 대접을 받네. 안 되겠다. 오늘은 곱게 물러가려고 했는데, 이 불쌍한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려야겠어.”

괴불자의 말에 파각이 피식 웃었다.

결국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괴불자가 정문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일단 남들 보기 흉하니 문은 좀 닫아걸고. 기억해라, 점소이야. 예의가, 사람을, 만든다.”

그렇게 막 객점 문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퍼억!

슈우우욱, 쿠당탕탕!

포탄처럼 튕겨 나간 괴불자가 그대로 탁자와 의자를 부수더니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지는 게 아닌가?

파각이 작은 눈을 더욱 가늘게 여몄고, 주인장과 점소이는 눈을 찢을 듯 부릅뜬 채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열린 문틈으로 빛을 등진 사내가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아니, 왜 문을 처막고 지랄이야? 지랄이.”

뒷골목 왈패처럼 거친 말을 뱉은 청년이 그대로 들어와 한쪽 탁자에 앉았다.

남궁천이었다.

그를 뒤따라 들어온 두 명의 사내는 손우곤과 차무진이었다.

“주인장, 소흥주 한 병.”

“저어…….”

주인장이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건네자, 남궁천이 힐끔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소흥주 없소?”

“예?”

“소흥주 한 병하고, 전병 좀 내오시오.”

“아…….”

주인장이 잠깐 머리를 굴렸다.

괴불자를 단 한 방에 날려 보낸 청년. 게다가 실내 분위기를 충분히 살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주문을 한다는 건…….

셈을 끝낸 주인장이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곧 내어오겠습니다.”

주인장이 얼른 주방으로 들어간 틈에 괴불자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고, 파각이 남궁천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포권을 하며 물었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신지요?”

“남궁세가에서 오셨다. 씹새끼야.”

“……!”

순간 소흥주를 들고 나오던 주인장이 멈칫 굳어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괴불자와 점소이도 흠칫 떨었다.

‘남궁세가에서……!’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잇는다.

“대가리가 너무 빛나서 눈부신데 좀 비켜줄래?”

“……!”

“확 깨부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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