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19화 (119/508)

119. 빛나는 대머리

“좋은 아침입니다, 누님.”

남궁표가 오늘도 싱글벙글 웃으며 남궁설희를 찾아왔다.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하던 남궁설희가 기운을 서서히 갈무리하며 실눈을 떴다.

“뭐가 그리 좋으냐?”

“허허, 이제 아흐레밖에 남지 않았잖습니까? 아흐레만 지나면 눈엣가시 같던 사생아 녀석이 본 가를 떠나야지요.”

“호적에서 파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일렀거늘.”

“물론 그렇지만, 저 멀리 외딴곳에 몇 년 처박혀 있도록 조치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네 외조카 손자다.”

“누님 조카손자이기도 하지요.”

“그리도 그 아이가 미운 게냐?”

“그건 누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남궁표의 말에 남궁설희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글쎄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설마 그 사생아 녀석에게 정이라도 붙으신 겁니까?”

“가당치도 않다. 뭘 얼마나 보고 지냈다고.”

“한데 그런 말씀은…….”

“그 아이에게서 선이가 보이더구나.”

“그야 그 선이의 아들이니…….”

“그런 뜻이 아니다. 그 아이의 눈에서 제 어미가 보이더란 말이다.”

“그 녀석이 제 어미를 그리워한단 말씀입니까?”

남궁설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그렇게 보였다.”

“확실히 누님은 감성이 풍부하십니다.”

“별소리를 다 듣는구나.”

“저는 통 모르겠던데요.”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관찰력의 문제겠지. 무인이라면 타인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도 재능…….”

“자자, 고리타분한 말씀은 좀 넘어가시죠. 저도 노년에 접어든 나이입니다.”

남궁설희가 습관처럼 또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백 마디 말을 뱉어도 한마디도 받아들이기 힘든 동생이 아니던가? 물론, 본인은 늘 모든 말을 고분고분 들었다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지만.

‘언제나 철이 들는지.’

남궁설희가 혀를 차고 돌아서자, 남궁표가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저와 함께 밖으로 나가보시죠.”

“일없다.”

“곧 창응대가 앞마당에 집결한답니다.”

“창응대가?”

“예. 아무래도 불복 선언을 하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 시종들 사이에서도 그 소문이 자자합니다.”

“확실한 것이냐?”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습니다. 들어 보니 어제도 비무 도중에 사생아 녀석이 도망을 쳤다더군요. 허참.”

“도망을 쳐?”

“예, 달아나는 천이를 향해 창응대원들이 비무를 더 하자고 소리쳤더랍니다. 그런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덕을 내려왔다더군요. 그게 도망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막상 검을 섞어 보니 감당이 안 되겠다 싶었던 거겠지요.”

“또 시종을 시켜 염탐한 게냐?”

“염탐이라니요. 가문의 문제를 민감하게 살피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쯧…… 그리 경박하게 굴지 말라 일렀거늘.”

남궁설희가 힐책을 하면서도 내심 남궁천에 대한 실망감은 지울 수 없었다.

‘그리 잘났다는 듯이 나설 때는 언제고 도망을 쳐? 한심한……!’

차라리 죽도록 얻어터지고도 악바리처럼 덤볐다는 이야기라도 나왔더라면 생각을 달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데 검을 몇 번 섞어 본 후, 비무를 이어가자는 대원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쳐 버렸다고?

‘혹시나 했건만 역시구나. 도대체 오라버니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아이를.’

남궁설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데 마침 문이 열리면서 남궁원이 들어왔다.

“누님, 아, 형님도 여기 계셨군요.”

남궁설희가 가자미눈을 뜨고는 힐책했다.

“도대체 너는 매번 예의를 얻다 두고…….”

“누님, 그보다 지금 앞마당에 창응대가 모두 결집했습니다. 나가서 보시지 않겠습니까?”

이번만큼은 남궁설희도 흥미가 동하는지 말을 멈추고는 생각에 잠겼다.

남궁표가 얼른 부추겼다.

“누님, 그래도 소가주가 걸린 문제입니다.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눈으로 확인할 겸 한 번 나가보시지요. 이참에 창응대원들 면면도 오랜만에 살펴보고요.”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

게다가 창응대가 불복 선언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 근거를 제시할지도 궁금했다.

남궁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앞장서라.”

“예, 가시죠, 누님.”

남궁원이 다시 몸을 돌리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남궁표가 들뜬 마음으로 따랐고, 남궁설희는 예의 그 냉랭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교적 짧은 낭하를 따라 이동하다가 모퉁이를 막 돌아서니, 과연 창응대가 날이 선 모습으로 집결해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창응대를 본 남궁설희는 가슴 한편이 살짝 벅차오는 것을 느꼈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기도를 보니 과연 정예 조직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초절정에 이른 손우곤 대주와 절정의 끝자락에 선 차무진 부대주, 그리고 어디에 내놓아도 약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대원들.

이 귀한 인재들이 아직까지 남궁세가에 남아 있는 건 오로지 정과 의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데 이런 자들을 기껏 그 애송이 녀석에게 낭비하라고 했으니…….

‘단단히 뿔이 날 수밖에.’

남궁설희와 남궁표, 남궁원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괜히 심기가 불편한 창응대원들을 자극해서 불똥이 이쪽으로 튀는 건 피하고 싶었기에.

하여 인사를 건네기에는 비교적 먼 거리에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남궁설희가 목소리를 낮춰 남궁원에게 물었다.

“그 아이는 아직 안 온 것이냐?”

“예,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까짓 게 숨는 것 말고 뭘 하겠습니까? 저리들 기세를 날카롭게 다듬고 있는데 괜히 나서 봐야 몰매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품위를 지키라 했거늘.”

남궁설희의 준엄한 꾸중에 남궁표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누님. 괜히 저도 화가 나서. 비무 도중에 도망이라니요? 허참!”

“일단은 지켜보자. 그 아이도 생각이 있다면 창응대를 저렇게 마냥 방치하진 않을 터.”

“저도 궁금하군요. 천이 그 녀석이 어떤 표정으로 나타날지.”

남궁원의 말에 남궁표가 웃었다.

“보나 마나 뻔하지 않겠느냐? 잔뜩 주눅이 들어서 울면서 나타나지나 않으면 다행…….”

그때였다.

벌컥!

마당 측문이 활짝 열리면서 남궁천이 나타났다.

“흐아아아암!”

한데 모두의 예상과 달리 기지개를 늘어지도록 켜면서 하품을 하는 게 아닌가?

마침 남궁천이 실눈을 뜨고는 창응대를 보더니 무심한 말투를 툭 내뱉었다.

“뭐야? 네놈들은 잠도 없냐?”

지켜보던 남궁표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 한심한……! 자다 깨서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이구나! 너는 이제 손 대주의 말을 들으면 기절하게 될…… 응?’

한데 손우곤이 세상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남궁천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속삭이는 게 아닌가?

“주군, 해가 중천입니다.”

순간 남궁설희를 비롯한 세 사람은 그 자리에 굳어 버린 듯했다.

남궁표와 남궁원이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손 대주가 뭐라고 했지?

주군? 주구우우운?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한다.

“흐음.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 그럼 슬슬 이현으로 떠나볼까?”

“예, 주군. 저희들은 준비가 끝났습니다.”

“알았다. 그럼 잠시 기다려.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

“예, 주군. 오늘부로 창응대는 주군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손우곤이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이자, 뒤에 도열한 창응대원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목소리에 공력을 담은 것인지 기왓장이 다르르 떨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외침이었다.

정말이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모습에 남궁설희와 남궁표, 남궁원은 저마다 입을 쩍 벌리고는 돌처럼 굳어 버렸다.

남궁천만이 손을 휘휘 저으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뭘 당연한 걸 시끄럽게 떠들고 있어?”

* * *

‘아니, 이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장원식은 눈앞에 마주 앉은 남궁천을 보면서 불편한 심기를 애써 갈무리했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의 귀에 들려온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남궁천이 어제 창응대와 비무를 했고, 결국 견디지 못해서 달아났다는 이야기.

그리고 창응대가 잔뜩 화가 나서 아침부터 남궁세가로 떼로 몰려갔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그렇게 정리되는구나, 생각했다.

한데 지금 이건…….

“황산모봉이네요?”

남궁천이 천진한 표정으로 묻는 목소리에 장원식이 상념을 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장원식은 건성으로 대답을 하면서도 남궁천 뒤에 시립한 손우곤과 차무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쟤들이 진짜 남궁천에게 따지러 갔다는 걔들 맞아? 이래서야 완전히 똘마니 같은데?’

“왜 그렇게 보시는지? 우리 애들한테 볼일이라도?”

남궁천의 말에 장원식이 다시 정신을 퍼뜩 차렸다.

하지만 곧 머릿속이 아연해졌다.

‘우리 애들? 지금 창응대주와 부대주를 두고 우리 애들이라고 한 건가?’

그럼에도 두 사람은 어떠한 반응도 없다.

그저 장승처럼 서서 남궁천 뒤를 지킬 뿐이었다.

‘허, 참!’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데, 남궁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기선 좀 살 만하네요.”

“음?”

“아, 제가 저승을 반쯤 건너가다가 다시 돌아와서요. 정신을 차려 보니 기억은 다 날아갔고. 남궁세가라는 집구석은 뭐 다 망해서 거지꼴이더라고요.”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 자식아!

‘알아. 알아. 나 때문인 거. 그렇다고 그런 얼굴로 대놓고 노려보진 말고.’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씨익 웃는다.

“그런데 여긴 귀한 명차도 내어주시고. 여기저기 돈 되는 물건도 좀 보이고. 보기 좋아서요.”

무슨 도둑놈 새끼가 염탐하러 온 것도 아니고.

장원식은 내심 기가 차면서도 속을 다스리며 대꾸했다.

“그렇다니 다행일세. 사실 이현의 상권은 남궁세가가 쥐고 있던 관할지 중에서도 막바지에 넘어간 셈이니까. 아직은 여유가 있는 셈이라네.”

“자세히 좀 들어보죠.”

“흐음.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정은 이렇다네.”

원래 이현의 상권은 남궁세가가 관리하고 있었다.

그 전통이 수백 년째 이어져 오고 있었기에 다른 세력이 이현의 상권을 장악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하나 남궁세가가 대살성과 엮인 후로 모든 게 급변했다.

강호가 등을 돌리자 가문이 기울기 시작했고, 가문이 기울자 세상도 하나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울자, 이현의 상권도 다른 세력에게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많은 이들이 접촉해왔지만, 다들 남궁세가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탐욕만 앞세웠다.

그런 중에 나타난 게 바로…….

“광승회(光僧會)라고요?”

“그렇다네.”

“광승회라…… 하긴 땡중들 대가리가 빛나긴 하죠.”

빛나긴 뭘 빛나! 이놈아!

장원식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그 광승회가 처음에는 정말 좋은 뜻으로 상권을 물려받겠다고 했네. 다들 점잖은 자들이었고, 무공 또한 출중하여 그만하면 이현을 잘 지켜줄 거라고 여겼지.”

“한데 까 보니까 아니군요?”

장원식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 내 부주의 탓일세. 스님들이 그리 악랄하게 변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남궁세가를 위하는 건 다 거짓이었고, 중생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건 모두 허언이었지. 그들은 사실 구화산(九華山)에서 계율을 지키지 못해 파계승이 된 자들이었네. 그들이 연합하여 만든 세력이었던 게야.”

안휘성의 구화산은 예로부터 불교 명승지였다. 사찰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니 파계승이 된 자들이 가까운 이현으로 흘러들어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상권을 쥔 그들이 온갖 패악질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폭리는 기본이요, 협박과 폭언, 폭력도 일삼았다.

“그 후로 나는 이현의 상권을 수복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네. 한데 광승회는 상권을 사들일 때보다 다섯 배나 비싼 가격을 제시했지.”

남궁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가보겠습니다.”

“엉? 어딜 가려고?”

“어디긴요? 그 빛나는 대가리들이 더 이상 미쳐 날뛰지 못하도록 만들어야죠.”

“지, 지금 바로……?”

“예, 아시겠지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럼.”

“잠, 잠깐! 그들은 정말 무서운 자들이야. 오죽하면 그들을 빛날 광(光)이 아니라 미칠 광(狂)자를 써서 광승회(狂僧會)라 부르겠는가? 강간,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말이 예사로 나올 정도…….”

“그러니 더 확실하게 미쳐 날뛰지 못하도록 밟아야겠군요.”

남궁천이 싸늘하게 말을 뱉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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