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21화 (121/508)

121. 습관이 무섭다

뭐지? 미친놈인가?

파각이 눈을 가느다랗게 여미자 남궁천이 이맛살을 푹 찡그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 눈은 뜬 거냐? 감은 거냐? 혹시 너도 네 머리가 눈 부셔서 그러고 다니는 거냐?”

“…….”

“아님 귀도 먹은 거야? 비키라는 소리 못 들었어?”

“남궁가에서 여긴 어쩐 일로…….”

“보면 몰라? 객점에 술 마시러 왔지, 뭐하러 오겠어? 불만이야? 왜 시비를 거실까?”

아니, 시비는 네가 먼저 걸었거든?

시종 침착함을 유지하던 파각도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젓고는 괴불자를 힐끔거렸다.

마침 괴불자가 잔뜩 성질이 나서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런 썅! 어이! 애송이! 뒈지고 싶어?”

차아앙!

하나 괴불자는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손우곤이 검을 뽑아 들고 괴불자의 목젖을 겨눈 탓이다.

동시에 열린 문을 통해 창응대원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십니까?”

박창수가 눈을 번뜩이며 묻자, 남궁천이 손을 휘휘 젓는다.

“별일 아니니까 호들갑 떨 것 없다. 나가서 기다려.”

“그래도 주군께 무례한 놈들이 있다면…….”

“나가서 기다리래도.”

남궁천이 다시 한번 나직한 목소리를 흘리자, 창응대원들이 두말 않고 돌아서 나갔다.

괴불자와 파각은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이 애송이는 뭔데 저런 자들이 굽실거리는 거지?’

척 보기만 해도 손우곤과 차무진은 무공 수위가 예사롭지 않다.

남궁세가에서 이런 자들을 고용할 만큼 자금력이 남아 있던가?

괴불자와 파각이 어정쩡하게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남궁천이 주인장을 보며 말했다.

“뭐 하고 있소? 그거 안 줄 거요?”

“예? 아, 예!”

주인장이 얼른 달려가 소흥주를 내밀었다.

“전병은 시간이 좀 걸립니다.”

“괜찮으니 천천히 준비하시오.”

“알,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어…….”

“뭐요?”

“정말 남궁세가에서 오셨는지요?”

“그런데?”

“남궁세가에서 여길 왜…….”

“거참, 술 마시러 왔다니까?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에 온 거요?”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워낙 오랜만에 오신지라…… 혹시 공자님의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남궁천이오.”

“아, 예. 남궁천…… 응? 남궁천?”

“그렇소만?”

그러자 점소이가 후다닥 달려와서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귓속말을 속삭였다.

“주인어른! 남궁천! 제가 말한 그 사람입니다요! 무연회 우승자!”

“커흠! 알, 알겠다. 그만 물러나 있어라.”

“아, 예. 그러지요. 그런데 제가 뭐랬습니까요? 남궁세가에서 분명 이제 재기를 할 거라고…….”

“알았다. 알았어. 일단 우린 돌아가서 요리부터 하자꾸나.”

주인장이 얼른 점소이를 떠밀며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직 상황이 어찌 정리될지 알 수도 없는 판국에 자칫 경거망동했다간 불똥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

강호에서는 말 한마디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곳이 아니던가?

두 사람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자, 괴불자가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팔짱을 꼈다.

“누군가 했더니 이제 보니 요즘 떠오른다는 그 신룡이었군. 무연회 우승했다고 이렇게 기고만장하신 건가?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너희들이 누군데?”

“우린 광승회 승려들이다!”

“미친 땡중 모임?”

“이 어린 새끼가……! 빛나는 스님 모임이니라!”

“그 말이 그 말이지. 결국 지랄발광(發光)하는 땡중 모임이군.”

“뭐, 뭣……?”

괴불자의 전신에서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난다.

그럼에도 섣불리 나서서 싸움을 걸진 못했다.

일단 남궁천이 무연회 우승자라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고,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눈 손우곤의 실력도 신경 쓰였기에.

그가 어금니만 빠득 가는 동안 주방에서는 주인장과 점소이가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는 지켜보았다.

“주인어른, 제가 뭐랬습니까요? 남궁세가에서 올 거라고 했죠? 생각보다 좀 빠르긴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막 나가기도 하는구나.”

“으음. 뭐 그런 면이 없진 않지만,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요?”

“글쎄다. 빈 깡통이 요란한 경우도 많이 봐서.”

“일단 지켜보지요. 어쩌면 남궁세가가 정말 우리를 구해줄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요?”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저 공자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일 뿐이다. 지금은 무연회에서 우승했다는 자신감과 주변 호위무사들 때문에 기세등등하지만 글쎄…….”

주인장이 불안한 눈빛으로 보는 사이, 남궁천이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본론을 꺼냈다.

“손 대주는 물러나고.”

“예, 주군.”

손우곤이 그제야 검을 거두고 물러나자, 남궁천이 괴불자를 힐끔거리고는 물었다.

“얼마면 돼?”

“……?”

괴불자와 파각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남궁천이 다시 물었다.

“본 가는 이제 이현의 상권을 되찾으려고 한다. 그러니 값을 불러보란 말이야.”

“허!”

괴불자가 헛웃음을 내뱉더니 건들거리며 말했다.

“상권을 되찾으시겠다고? 글쎄, 남궁세가에서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을 텐데.”

“그래서 얼마냐고, 이 땡중 새끼들아.”

“이익……!”

괴불자가 결국 참다못해 나서려는데, 파각이 얼른 그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시간이 흘렀으니 물가도 변했지요. 백만 냥은 주셔야겠소이다.”

“백만 냥?”

“그렇소만.”

“광승회가 얼마에 샀지?”

“십만 냥이오만.”

“그사이에 열 배를 처올려 받는다고?”

괴불자가 히죽 웃었다.

“우리가 상권을 활성화시켰으니 그만한 대가는 당연하다고 봐야지.”

“오만 냥. 많이 쳐줬다.”

“……?”

“오만 냥 받고 꺼져라. 다신 이현에서 어슬렁거리지 말라고.”

파각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시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

“시끄러워, 이 새끼야. 내가 왜 시주야. 시주도 안 하는데. 오만 냥 받고 꺼지라고. 마지막 기회다.”

“이런 미친 새끼가 한 대 맞아주니까 천지분간 못하고……!”

퍼억!

순간 괴불자는 왜 자신의 배가 뜨거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왜 남궁천이 바로 코앞에 서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탁자에 앉아 있지 않았나?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만 같다.

쿠당탕탕!

그대로 튕겨 나간 괴불자가 다시 탁자를 부수면서 나뒹굴었다.

파각이 이맛살을 구기며 성큼 나섰다.

“이게 무슨 짓이냐!”

차차앙!

동시에 손우곤과 차무진이 검을 뽑아 들고는 파각을 겨눴다.

살기 어린 예기가 풀풀 날아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해도 검기가 전신을 난자해 버릴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

꿀꺽……!

파각이 마른침만 삼긴 채 빤히 노려보자, 남궁천이 그에게 다가가 뺨을 톡톡 쳤다.

“쫄지 마. 나는 한 놈만 패는 버릇이 있으니까.”

“…….”

“가서 회주에게 전해라. 내일 이 시간까지 협상할 생각이 있다면 오만 냥 받으러 이 자리로 나오라고. 내가 생각할 시간을 더 주고 싶어도 사정이 좀 급해서 말이야.”

“이 미친……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무사할 것 같으니까 이러지.”

“……!”

“만약 협상할 생각이 없다면 언제든 장씨 장원으로 쳐들어와도 좋다. 두 팔 벌려 맞이해줄 테니까.”

“그 말…… 후회하지 않길 바라지.”

“물론이지.”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파각이 냉랭한 얼굴로 돌아서서는 괴불자를 부축해 일으켰다.

괴불자는 울분이 차오르는지 연신 씨근덕대며 남궁천을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일단 남궁천도 문제지만, 그를 호위하는 손우곤과 차무진도 예사롭지 않았기에.

게다가 조금 전 창응대가 한꺼번에 객잔 안으로 몰려 들어오지 않았던가?

머릿수에서도 밀리는 상황.

두 사람이 남궁천을 힐끔 보고는 객점을 나서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남궁천이 소흥주를 한 잔 따라 마시고는 물었다.

“또 왜? 더 처맞아야겠어?”

“그게 아니고.”

“그럼 뭐냐?”

“협상할 생각이 없는데 우리가 왜 장씨 장원으로 쳐들어가야 하지? 그 집구석에 딱히 건질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어? 듣고 보니 그건 그렇네.”

남궁천이 뜻밖에도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광승회에서 쳐들어올 필요가 없지 않나?

상권을 빼앗아야 하는 건 이쪽이니.

급한 것도 이쪽이고.

남궁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 쳐들어가더라도 이쪽에서 광승회로 쳐들어가야 하는 거네. 와, 하마터면 오지도 않을 땡중 놈들 기다리면서 시간 다 까 버릴 뻔했네. 고맙다, 새끼야.”

남궁천의 말에 왠지 뿌듯함을 느끼던 파각이 곧 정신을 차렸다.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참, 왜 너희들이 쳐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을까? 이래서 습관이라는 게 무섭다니까.”

다 전생의 버릇이다.

매번 쳐들어오는 놈들만 막거나 피해 다니다 보니 어딜 먼저 쳐들어간다는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도망 다니기도 바쁜 판국에 쳐들어가긴 왜 쳐들어가겠나?

그러다 보니 이번에도 자연스레 수가 틀리면 저쪽에서 쳐들어올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 저놈들이 올 이유가 없지. 뭐 빼앗을 것도 없는데. 자고로 뺏을 놈이 쳐들어가는 법이지. 좋은 깨달음이다.’

적임에도 이렇게 사사로운 것마저 인정하고 감사할 줄 아는 나란 남자. 매력 터진다. 이러니 남궁선이 첫눈에 반했지.

뭐, 남궁선이 듣는다면 또 망상 증세가 나타났다고 뭐라 하겠지만.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했다.

“그럼 수정하지. 내일 이 시각까지 협상하러 나오지 않으면, 내가 쳐들어가겠다. 회주에게 푼돈이라도 건질 생각이 있다면 나오라고 전해라.”

“…….”

“…….”

“……미친놈.”

파각이 한숨을 내쉬듯 욕을 하더니 객잔을 빠져나갔다.

남궁천은 아주 잠시 뒤따라가서 뒤통수라도 후려갈겨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때릴 기회가 많을 테니까.

마침 주인장과 점소이가 소흥주 한 병과 전병을 들고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소.”

“저어…… 그런데 아까 그 말이…… 사실입니까? 광승회로 쳐들어간다는…….”

“물론이오. 이제 두 다리 뻗고 주무시오. 앞으로 이현의 상권은 다시 남궁세가에 귀속될 거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한데?”

“아, 아닙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주인장과 점소이가 얼른 굽실거리고는 물러났다.

남궁천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다가 손우곤을 돌아보았다.

“왜들 저래?”

“아마…… 걱정하는 걸 겁니다.”

“걱정?”

“광승회는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너희들도 쫄았어?”

“그건 아닙니다만…….”

“다만?”

“굳이 본 대가 쳐들어갈 시기까지 알려줄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그들이 제대로 준비한다면 생각보다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머릿수도 저희가 밀리고요.”

남궁천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내가 쳐들어갈 시기까지 알려줬어?”

“예? 아까 내일 이 시각까지 협상하러 나오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고…….”

“그건 협상 기한이고. 쳐들어갈 시간은 다르지.”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마냥 기습을 늦출 수도 없습니다.”

“예고하고 습격하면 그게 기습인가?”

“예? 예고는 주군이 아까 하신…….”

“내가 언제? 나는 오늘 저녁에 쳐들어갈 거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오늘 저녁요?”

“그래, 다들 준비해라. 해 떨어지면 살풀이 한번 하자고.”

“하지만 협상 기한을…….”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원래 강호는 속고 속이는 비열한 곳이야. 어차피 그놈들이 협상할 것도 아니고.”

“오오, 쓰레기는 쓰레기 방식으로!”

“지금 내가 쓰레기라고 한 거지?”

“헛, 그, 그건 아닙니다!”

서둘러 말을 마친 손우곤이 얼른 소흥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이들을 지켜보던 주인장이 어딘지 불안한 표정으로 푸념했다.

“정말 저 미친 공자를 믿어도 되는 거냐? 일만 더 커질 것 같은데…… 괜한 불똥이 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게요…….”

점소이마저도 자신 없는 표정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