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모범답안
맹주전 접객실은 소박하면서도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어디 하나 사치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그 흔한 그림 액자조차 구경하기 힘들었다.
‘어지간하면 이런 장소에 고풍스러운 그림 한 장 정도는 걸어놓을 만도 할 텐데.’
확실히 이 영감탱이는 철두철미하다.
접객실이 이렇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 하나하나에 굉장히 신중하다는 뜻이겠지.
그나저나 이렇게 일찍 독대하는 날이 올 줄이야.
남궁천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다시 생각하니 뱃속부터 증오심이 끓어오른다.
맹주는 도대체 무슨 원수가 졌다고 그토록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혔을까.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온갖 인자한 척 다 하면서 죽어가던 자신에게 뱀 같은 미소를 짓던 그 얼굴.
환생을 한 후에도 맹주 얼굴만 떠올리면 그 눈알과 콧구멍, 주둥이에 손가락을 하나씩 박아 넣고 박박 찢어버리는 상상을 했을 정도니까.
하나 무릇 남자라면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대의를 그르칠 수 없는 법.
당장 맹주가 눈앞에 있어도 지금 몸으로는 상처 하나 주기도 어렵다.
그 영감탱이가 무림칠성(武林七星)처럼 절대 경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인 데다 칼밥 먹은 세월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천?”
그제야 진소홍의 목소리를 들은 남궁천이 고개를 돌렸다.
진소홍 표정을 보니 벌써 몇 차례 이름을 부른 모양이다.
‘이런, 너무 몰입을 해버렸군.’
아직도 수양이 부족하구나.
뭐, 그래도 살기라도 느꼈다면 몸이 먼저 반응했을 테지만.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어?”
진소홍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별로. 좀 피곤해서.”
“맹주님이…… 왜 우리를 보자고 하시는 걸까?”
“글쎄. 금혈서 때문 아닐까 싶은데.”
“역시…… 그렇지?”
진소홍이 넌지시 남궁천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응?”
“금혈서를 잡을 때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그렇게 빠른 영물을 잡을 수 있었던 거야?”
“우연이지. 너한테 바위 위로 달아나라고 하고선 나도 뒤따라가는데 마침 금혈서가 달려와 벽라검을 물었으니까.”
모든 대답은 사실이다.
하나 의도만 숨겼다.
진소홍이 가만히 남궁천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정말 수긍하는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이상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대신 진소홍이 조금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고마웠어.”
“응?”
“내 목숨을 구해줘서.”
“아…….”
남궁천은 그제야 말뜻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목숨을 구해준 셈이 됐군. 어차피 금혈서를 잡아야 해서 나선 것인데. 뭐, 이런 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런 거겠지.
그나저나 이 영감탱이는 사람을 불러다놓고 도대체 얼마나 기다리게 하는 거야.
불쑥 짜증이 올라오지만 남궁천은 심호흡을 하며 성질을 가라앉혔다.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맹주의 심리전이라는 것을.
맹주가 이렇게 약아빠진 인간이다. 어린 생도를 상대하면서도 이렇게 치졸한 짓을 한다.
일부러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상대의 심신을 지치게 만드는 수법.
‘늙은 구렁이다워.’
남궁천이 내심 투덜거리다가 진소홍을 슬쩍 돌아보았다.
어차피 기다리기도 지루하던 차에 궁금하던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넌 왜 굳이…….”
그때였다.
“두 사람 오래 기다렸군. 맹주께서 잠시 급한 용무가 있으셨네. 이제 곧 맹주님께서 오실 걸세.”
총관이 말하고 나서 잠시 뒤 정말로 맹주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작달만한 체구에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 예의 그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비록 체구는 작으나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존재감만큼은 역시 굉장하다.
“허허, 노부가 우리 용봉들을 기다리게 했구나. 늦어서 미안하네. 급한 용무가 있어서.”
“급한 용무시면…… 급똥?”
굳이 안 해도 될 말이지만 이미 마음이 삐딱해진 터라 남궁천이 툭 내뱉었다.
한편으로는 의도한 바도 있었다.
이러는 편이 더 철부지 생도처럼 보일 테니까.
뭐, 아니면 말고. 이 정도로 어린 생도를 잡아 죽일 거야? 어쩔 거야.
잠시 당황하던 맹주와 총관이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맹주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한다.
“아암, 생리 현상만큼 중요하고 급한 용무도 없지.”
“용천관 생도 진소홍입니다.”
“용천관 생도 남궁천입니다.”
진소홍과 남궁천이 나란히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네자, 맹주 묵천악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자자, 앉지.”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맹주가 총관에게 차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남궁천은 맹주의 단전에서 솟아오른 기운이 전신에서 퍼져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격기(格氣).
맹주의 기운이 남궁천의 전신을 더듬는다.
은밀하면서도 세밀하게.
구석구석 흘러들어가면서 남궁천의 내공을 탐색한다. 마치 실뱀 수십 마리가 전신을 휘감으며 기어 다니는 듯하다.
남궁천을 경계하는 게 분명했다.
‘이 영감탱이가……!’
남궁천은 불쑥 고약한 마음이 치솟았지만 내심을 다스리면서 최대한 모른 척했다.
모든 공력을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놔두면서도 오해받지 않을 만큼은 드러내보였다.
맹주는 아마 자신이 금혈서 내단을 복용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으리라.
때문에 남궁천은 적당히 공력의 흐름을 풀어두면서도 과하지 않게 조절했다.
초견파공안을 가진 남궁천에게 그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노부가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몇 가지 확인해보고 싶어서라네.”
‘이 영감탱이가 아주 대놓고 두드려대는구나.’
남궁천이 내색하지 않으면서 경청하는 척했다.
만약 남궁천이 초견파공안이라는 재능이 없었거나, 전생의 기억이 전혀 없었더라면 맹주의 격기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아무것도 모르는 진소홍이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말씀 듣겠습니다.”
“허허, 예쁘고 착한 소저로군. 그럼 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 자네들이 금혈서를 잡았다던데. 사실인가?”
진소홍이 남궁천을 슬쩍 돌아보았다.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은 척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잡았습니다.”
일부러 약간의 과시욕을 담아서 어깨를 폈다. 이 나이대의 생도들이 해볼 만한 행동이었으니까.
맹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소홍을 돌아보았다.
“자네는 그걸 지켜보았고?”
“예, 맹주님.”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 바로 옆에서 지켜본 자네가 그럼 더 잘 알겠군.”
맹주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진소홍을 바라본다.
하나 남궁천은 그 순간 맹주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확인했다.
속셈은 따로 있다는 뜻.
질문을 진소홍에게 던지지만 분명 남궁천의 반응도 살필 것이다.
‘아마도 진소홍의 대답에 따라 내 기운의 흐름이 어떻게 동요하는지도 살피겠지.’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
“어디 노부에게 말해주겠나? 당시의 상황을……?”
남궁천은 최대한 내기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조절하며 눈을 가늘게 여몄다.
‘맹주 새끼, 내게 초견파공안의 재능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거구나!’
결국 이건 소리 없는 싸움이다.
격기를 통한 탐색과 방어.
남궁천이 일부러 그 나이의 허세 가득한 생도답게 툭 뱉듯이 말했다.
“뭐, 운이 좋았던 거죠.”
“난 자네에게 묻는 게 아닐세.”
“아…… 네.”
맹주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을 던졌다.
만약 남궁천이 정말 어렸더라면 그 압박에 기가 죽어서 자칫 실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이야, 이 맹주 새끼야.’
남궁천이 표정을 관리하는 동안 진소홍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궁천은 금혈서를 잡은 경위를 숨기고 싶어 한다. 지금도 그렇고 자신에게도 거듭 운이라고 둘러대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자랑처럼 떠벌리지 않는다.
적어도 자신이 최근에 봐온 남궁천의 성격이라면 자랑스럽게 떠벌릴 만도 한데.
맹주를 적당히 속이느냐, 남궁천의 기대를 저버리느냐.
‘한 가지는 확실해.’
고위험에는 고수익이 따른다는 것.
그래, 애초에 남궁천을 믿고 투자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 게다가 남궁천은 자신의 목숨마저 구해줬다.
좋아, 끝까지 걸어보자.
남궁천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믿는 거다.
‘아버지, 그러셨죠? 먼저 나를 믿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을 굳힌 진소홍이 고개를 들고 상큼하게 웃으며 답했다.
“사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당황해서 잘 볼 수 없었어요. 주변이 너무 어둡고 또 금혈서가 워낙 빨라서요.”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맹주는 진소홍보다 그녀의 대답에 따라 변하는 남궁천의 표정을 살폈다.
진소홍이 거짓을 고하든, 진실을 고하든 경계해야 할 일이 있다면 분명 남궁천에게서 반응이 있을 것이므로.
하나 남궁천은 그가 아는 대살성의 아들이 아니었다.
‘영감, 나야, 나. 영감이 그렇게 치를 떨고 이를 갈았던 그 대살성이라고.’
그렇게 노려본다고 뭐가 나올 줄 알아.
남궁천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생도 역할에 충실했다.
진소홍의 대답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다시 진소홍이었다.
“저어…… 맹주님?”
“허허. 미안하네. 잠시 생각에 잠겨서. 한데 노루 뿔에 공력을 실어 태울 생각은 어찌 했을꼬?”
이번에는 진소홍도 답을 할 수가 없었기에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답했다.
“외조부님께 들었습니다. 노루 뿔에 공력을 불어넣고 태우면 금혈서가 환장한다고요.”
“과연 그렇군.”
남궁천이 남궁검을 들먹인 것은 괜히 둘러댄 게 아니다.
실제로 남궁검은 젊은 시절 무림맹에서 많은 조직을 거쳤는데, 그중 추영단에도 있었다는 걸 전생에 남궁선을 통해 들었었다.
맹주가 입매를 살짝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남궁 가주께서 자네를 어여삐 여기셨나 보군. 그런 이야기까지 시시콜콜 전한 걸 보면.”
“그럴 리가요. 대살성의 사생아지만 어머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주셨겠지요.”
“허허, 그렇게까지 생각할 일은 아닐세. 아비의 죄가 아들에게까지 미쳐서야 되겠는가? 모르긴 해도 아마 자네 아비는 저승에서나마 죄를 뉘우치며 올곧게 자란 자네를 흐뭇하게 바라볼 걸세.”
와, 이번 건 좀 셌다.
하마터면 운기가 흐트러지면서 본성이 드러날 뻔.
진짜 까딱하다간 저 늙은 너구리 면상에 주먹을 꽂을 뻔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런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 일전에 팽수혁에게 하늘에 계신 조부가 기뻐하실 거라고 했지.’
이제 보니 내가 쓰레기였네.
나중에 팽수혁에게 사과해야겠다.
다행히 남궁천은 정신 줄을 바짝 잡고선 큰 동요 없이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죄를 덮을 만큼 최선을 다해 협의를 실천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모범 답안이 되었을 테지.
맹주가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며 기를 거두었다.
몸 구석구석을 염탐하던 기운들이 안개처럼 물러나면서 늙은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지독한 영감탱이.
나도 모자라 내 아들도 옭아매려고 안간힘을 쓰는구나.
“용케도 금혈서의 내단을 소화해 냈구나. 그것도 꽤나 단시간에.”
“그 역시 조부님 덕분입니다.”
“그렇군. 사정은 잘 알았네. 특급 영물을 그런 식으로 처리한 경우는 전례가 없는 경우라 불러보았네. 두 사람은 이제 그만 돌아가도 좋네. 무연회 기간 동안 무운을 빌지.”
“감사합니다, 맹주님.”
두 사람이 동시에 포권하며 일어섰다.
남궁천과 진소홍이 접객실을 나가자, 맹주의 표정에서 웃음이 서서히 지워졌다.
이내 무정한 얼굴로 돌아온 그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내가 과민한 모양이군.”
하긴 초견파공안이 어디 그리 흔한 재능이던가? 대물림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 대살성의 자식이 저리도 돋보이는 것은 필시 경계해야 할 일. 그러니 집요할 만큼 꼼꼼하게 알아봐야겠지.
모든 파멸은 작디작은 균열에서 시작되는 만큼.
맹주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청랑단주에게 남궁세가로 가서 금혈서에 관한 사실을 알아보라 이르게. 정말 저 아이에게 세세한 것을 알려주었는지.”
“존명!”
이내 허공에서 기척이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