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모범답안
조그마한 인공 연못으로 꾸며진 남궁세가 가주전 후원.
그곳 정자에는 모처럼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고, 남궁검과 남궁화가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사실 밖에서 식사를 하기에는 늦가을의 계절이라 애매한 기온이지만, 모처럼 햇살이 따사로운 데다 누구도 아닌 남궁검이 마련한 자리였기에 남궁화는 말없이 수저를 들었다.
이렇게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한 게 얼마만이던가.
그러고 보니 묘령이 되기 전에는 여름만 되면 이곳으로 놀러 와서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그때도 이렇게 정자에 푸짐한 오찬을 차려놓고 연못 속의 잉어를 감상하며 여유 있는 식사를 즐겼었지.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었던 언니는 자신에게 이것저것 알려주었고, 아버지와도 죽이 잘 맞아서 무공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곤 했다.
듣는 걸 좋아했던 남궁화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래, 이 후원은 그랬던 곳이야.’
남궁화가 볶은 채소 요리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가만히 생각했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오찬 자리를 마련한 것인지는 모르나 두 사람의 식사 풍경은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 흔한 안부 대화조차 생략되어 있었으니까.
그저 수저가 접시에 닿는 소리, 이따금씩 잉어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소리, 바람 줄기가 옷깃을 스치는 소리가 전부였다.
분명 웃음이 넘쳐흐르던 그 옛날과 이곳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옛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큼 낯선 장소로 변해 버렸다.
언제나 푸근한 미소를 지어주시던 어머니와 활기차고 기운 넘치던 언니의 존재감은 확실히 남궁화의 생각보다 큰 모양이었다.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러니 아버지도 그 후로 웃음을 잃으셨을 테지. 아니, 원래도 아버지는 잘 웃지 않으셨다.
다만, 언니가 살아 있을 때는 이따금씩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하셨다.
그러나 언니가 죽고 나서는 그대로 얼음이 되셨다.
그렇게 가세가 천천히 기울어 본 가장을 팔고 별채로 사용하던 이곳을 본채로 사용할 때까지 아버지는 감정의 변화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으셨다.
알고 있다.
그것이 당신을 스스로 지키는 방법이며, 남은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선택이라는 것을.
하나 오늘처럼 독대하는 날이면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자리가 어색해지고 눈길은 방향을 잃어버린다.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반찬은 무슨 맛인지.
그저 두 사람은 말없이 부지런히 수저만 놀렸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옛 추억을 반찬삼아 모래알 같은 밥알을 삼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남궁검이 희미한 한숨을 내쉰다.
‘아…… 역시.’
남궁화가 멈칫하고는 다시 밥알을 젓가락으로 들었다.
입안에서 모래가 서걱거리는 기분.
아버지는 또 언니를 그리워하시는 거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한데 조금 화가 나기도 한다.
어차피 이럴 거면서. 자신을 앞에 두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죽은 언니를 못 잊을 거면서.
왜 굳이 오찬을 하자고 하셨을까.
늘 그랬듯 살아 있는 자신은 투명인간이 되고 어머니와 언니가 이 자리를 채울 게 뻔한데.
애초에 장소도 잘못됐다.
하필 이런 추억이 깃든 장소라니.
아버지는 언니가 죽은 이후로 과거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못했다.
시간이 멈춰 버린 것이다.
언제쯤이나 오늘을 사실까.
하긴. 아버지만 탓할 처지는 아닐지도.
자신이라고 다르던가.
어젯밤만 해도 하늘을 보며 언니를 가슴으로 부르지 않았던가.
강호에도 강인한 존재감을 남겼던 언니다. 하물며 가족에게는 그 존재감이 얼마나 컸을까.
이번에는 남궁화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남궁검이 멈칫하고는 남궁화를 보더니 시선을 후원으로 돌렸다.
“기억하느냐? 예전 그 녀석이 저기에 쪼그리고 앉아서 연못의 잉어를 구경하던 걸.”
남궁화는 가만히 밥알을 깨물었다.
또 시작.
이미 죽은 자가 이렇게 다시 소환된다.
남궁화가 고개를 저었다.
“기억나지 않아요. 언니가 그러던 모습은.”
설사 기억이 났다고 해도 고개를 저었을 거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너무 심신을 지치게 만드니까.
그런데 남궁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떨어진다.
“네 언니가 아니다.”
“네?”
“그 아이를 말하는 거다. 천이.”
“아…….”
남궁화가 입을 살짝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뜻밖이라서 잠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그 정도로 남궁검에게서 남궁천의 이야기가 나온 건 이례적이었다. 아니, 먼저 말씀을 하신 건 처음이다.
하면 지금 아버지는 남궁천을 생각하고 계신 건가? 어머니나 언니가 아니라.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린다.
이 묘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버지가 처음으로 지금의 가족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다니. 그것도 늘 탐탁지 않게 여기던 남궁천을.
“그때 네가 그 아이에게 다가가 물었더랬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고.”
“네, 기억납니다.”
“그랬더니 그 녀석이 잉어가 불쌍하다고 했다지?”
남궁화가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기억난다.
당시 남궁천의 천진한 표정까지.
“그랬지요. 너른 강가로 가고 싶을 텐데, 좁은 곳에 갇혀 지내는 잉어가 불쌍하다고요.”
“그래, 그랬지. 다음 날 결국 그 녀석이…….”
“잉어를 몰래 들고 별채를 나서다가 딱 걸렸죠.”
“그랬지.”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얼음 조각처럼 냉랭한 표정이지만 목소리만큼은 온기가 느껴진다.
남궁검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당시 나는 그 녀석의 마음이 너무 나약하다고 나무랐다. 하나 지금 생각하니 달리 보아야 할 일이구나.”
“어떤……?”
“녀석은 넓은 물에서 놀고 싶었던 게지. 어쩌면 우리가 그 아이를 너무 좁은 연못에만 가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가족으로서 보호하는 건 당연하나, 지나치게 외부와 단절시켰던 것은 옳은 처사가 아니었을 것 같구나.”
하긴.
어쩌면 그래서 남궁천이 사회성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학관에서 호구 취급당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고.
남궁검이 연못으로 시선을 던지고는 말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학관으로 다시 가겠다고 하던 녀석의 눈빛이 딱 그때와 비슷했다.”
“잉어를 들고 나가던 때요?”
“그래. 그리고 날 보던 제 아비와도 닮았고.”
남궁화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오찬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궁천이 깨어난 후로 묘한 변화가 느껴지는 건 분명 기분 탓만이 아니리라.
“지금쯤이면 무연회가 치러지는 중이겠군.”
“천이도 참여했겠죠?”
“모를 일이지. 그 아이의 재량이 얼마나 되는지. 그래도…….”
집을 나설 때의 그 눈빛이 여전하다면 분명 대회에도 참여했으리라.
“좋은 성적을 내면 좋겠네요.”
“일차시에서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역시 남궁검은 남궁검이다.
남궁천에 대한 인식이 꽤나 부드러워졌음에도 그는 허황된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래도 천이가 원하는 만큼 이루면 좋겠어요.”
남궁검도 거기에는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다 먹었으면 차나 한잔하자꾸나.”
“네, 아버지.”
늘 후식을 사양하고 일어섰지만 오늘은 남고 싶었다.
남궁검이 시종을 부르자, 뜻밖에도 복성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가세가 기울고 인원을 감축하면서 시종들의 역할이 정확히 구분되지 않았지만, 복성이 가주전에서 수발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남궁화가 낌새를 채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저어, 손님이 오셨습니다요.”
“손님? 누구지?”
“그게 무림맹에서…….”
복성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남궁화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맹에서? 무슨 일이라더냐?”
무림맹이라니 괜히 불안하다.
언니가 대살성과 엮이고 나서부터 무림맹은 남궁세가를 대역 죄인처럼 취급했으니까.
“딱히 용무를 밝히시진 않으…….”
그때였다.
훤칠한 키에 깎아놓은 얼음 조각 같은 남자가 후원으로 들어섰다.
“기다리다 지쳐 무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청랑단주 모용신입니다. 인근 임무를 왔다가 마침 남궁세가 장원이 보여 인사차 들렀습니다.”
모용신이 포권을 하며 깍듯하게 예를 차렸다.
하지만 언행만 그럴듯할 뿐, 이렇게 후원으로 허락 없이 들어온 건 명백한 실례였다.
남궁화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청랑단주께서는 성격이 꽤나 급하시군요. 지객당에서 잠시 기다리시면 어련히 안내해 드렸을 텐데.”
“거기가 지객당이었군요.”
“……!”
남궁화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지객당이 좁다고 무시하는 걸까.
의미를 알아채기 힘든 발언.
하지만 더 이상 따지고 들진 않았다.
상대는 무림맹에서 온 자.
그렇잖아도 가세가 기운 상황에서 괜히 무림맹의 수뇌인사를 건드려서 득 볼 게 없다.
남궁검이 예의 그 무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앉으시게. 복성은 차를 내오너라.”
“예, 가주 어르신.”
복성이 얼른 달려갔다.
남궁화가 슬쩍 자리를 비켜주어 모용신과 남궁검이 마주 앉게 됐다.
그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볼 뿐인데 탁자 위로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듯하다.
양쪽으로 빙벽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는 기분이랄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모용신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결례를 끼친 점 죄송합니다.”
“별말을.”
“인근 임무로 파견된 차에 궁금해 하실 만한 소식도 전할 겸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말씀하시게.”
남궁검의 딱딱한 말투에 모용신이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쉽지 않군.’
불필요한 말은 최대한 생략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남궁천이 이차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런가?”
“기쁘지 않으십니까?”
“어디까지나 그 아이 스스로 이뤄낸 성취. 노부가 동요할 일은 아닐세.”
“그렇군요. 그래도 가족이지 않습니까?”
“자네는 남의 가정사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얘기는 그걸로 끝인가?”
모용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 이런 바위 같은 인간이 다 있나.
좋든 싫든 최소한의 반응은 보일 줄 알았건만.
그가 곧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남궁천이 일차시에서는 일 위로 통과했습니다.”
“그 아이가 일 위로요?”
반응이 온 것은 남궁화였다.
그러다 보니 남궁검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묻혔다. 사실 별 변화가 없기도 했고.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차시는 영물 사냥이었는데…… 금혈서를 잡았습니다.”
“금혈서를……!”
모용신은 남궁화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남궁검의 반응을 예의주시했다. 그는 얘기가 나온 김에 모든 걸 털어놓았다.
“금혈서의 내단까지 복용했지요.”
“무사한가요?”
남궁화가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모용신의 입매에 아주 희미한 냉소가 맺혔다.
‘걸려들었군.’
한데 곧이어 반전이 일어났다.
남궁검이 예의 그 냉랭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리더니 무뚝뚝하게 말을 뱉는 게 아닌가.
“호들갑 떨지 마라. 무사할 것이다.”
모용신이 눈을 가늘게 여몄다.
“어째서 확신하시는지요?”
동시에 남궁검의 눈빛도 차갑게 식었다.
‘이것이 목적이구나.’
지금 남궁검은 모처럼 전장에 서서 적을 노려보는 심정으로 임했다. 그만큼 그의 이성이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상황에서 모범답안이라고 생각되는 답을 태연히 꺼내 들었다.
“그 아이에게 내가 가르쳤으니까. 금혈서를 잡는 방법뿐만 아니라, 복용법까지.”
“……!”
놀란 건 모용신만이 아니었다.
남궁화 역시 놀랐다.
그녀는 확신했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