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모범답안
무연회 삼차시가 열흘 후로 정해졌다.
생도들에게는 모처럼 긴 휴식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주최 측에서 그만큼 시간을 둔 이유는 부상자가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었다.
한창 기량을 끌어 올려야 할 생도들이 자칫 부상 때문에 무리를 하다간 창창한 앞날에 영향을 줄 수도 있기에.
덕분에 부상자들은 휴식 기간 동안 무림맹 약천당에 내원하면서 여유 있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외의 생도들은 각자 수련을 하거나 친목을 도모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무한 저잣거리에서 최근 떠오르는 화두는 단연 특급 영물에 관한 것이었다.
“그 소식 들었나? 무연회 유사 이래 처음으로 특급 영물이 잡혔다더군!”
“뭐? 그게 정말인가?”
“내가 분명히 들었다니까. 아마 모용강이 잡았다지? 금혈서라는 영물을.”
“금혈서? 그게 뭐여? 처음 들어보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 들어서 알겠나? 그나저나 더 놀라운 일은 그 영물의 내단을 빼먹었다더군.”
“허어! 무림맹에서 준비해 둔 영물인데?”
“그러게 말이야. 내단을 함부로 복용하면 주화입마에 걸린다더니 멀쩡한 모양일세.”
“괜히 모용세가가 아니구먼.”
물론 소문은 다양했다.
어떤 이는 약학 지식이 뛰어난 당우기가 복용했을 거라는 추측을 내놓았고, 혹자는 뭐든지 잘 먹을 것 같은 황보승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도 꺼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무림맹에서도 각별히 주시했다. 사실 특급 영물이 잡혀서 죽은 경우는 희대의 사건이기도 했고.
지금 모용강이 모용신의 집무실로 불려간 것 또한 그와 관련된 것이었다.
“왔느냐?”
모용신이 집무책상에서 일어나며 입구로 들어서는 모용강을 보았다.
두 형제는 약간 다르게 생겼는데, 그 특유의 차가운 표정 때문에 몹시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용강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꾸했다.
“예, 형님.”
“이리 와서 앉아라.”
모용신이 걸음을 옮기며 창가에 놓인 탁자로 안내했다.
햇볕이 드는 좋은 자리였다.
특히 창밖으로 무림맹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서 새삼 모용신의 지위가 낮지 않다는 것을 실감케 해주는 자리였다.
“차 한잔하거라.”
“괜찮습니다.”
“녀석, 여전히 딱딱하구나.”
“부르신 용무는?”
모용강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모용신이 엷은 미소를 띠며 찻잔을 들었다.
그는 모용강의 대답과는 상관없이 시녀에게 찻잔을 하나 더 준비해 오라고 시켰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모용신이 창밖을 보며 건조한 음성을 흘렸다.
“형이 아우를 보자는데 반드시 용무가 있어야 하느냐?”
피식.
모용강이 더 없이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런 형님의 태도가 조금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있다.
형님은 용건이 없으면 자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셔라.”
모용신이 찻주전자를 들어 모용강의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또로로롱.
맑은 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진다.
모용강이 찻잔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예의 그 칼바람처럼 삭막한 음성이 다시 흘러나온다.
“합격했더구나.”
멈칫거린 모용강이 찻잔을 들며 대답했다.
“그리 어려운 시험은 아니었습니다.”
“너 말고.”
이번에 멈칫거린 모용강은 결국 차를 마시지 못했다.
그가 찻잔을 다시 내려두는 걸 보며 모용신이 조용히 뇌까리듯 말했다.
“그 아이가 합격을 했더구나.”
“차질이 좀 생겼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계획이라는 건 늘 어긋나게 마련이니까.”
“…….”
“왜? 마시지 않고.”
“생각이 없습니다.”
“귀한 차인데.”
모용신이 중얼거리고는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은은한 차 향이 창밖으로 흘러나간다.
차 향이 퍼져 나가는 창밖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는데, 어쩐 일인지 창 안쪽의 분위기는 메마른 사막처럼 삭막하다.
“그만한 일로 기죽을 것 없다.”
“…….”
“특급 영물을 잡았다지? 그래도 가문의 체면은 세웠구나.”
말을 뱉는 내내 표정의 변화가 없으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비꼬는 말인지 구분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형님이 어디까지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도 파악이 안 된다.
“그렇다고 금혈서 배를 가른 건 좀 위험했다.”
“형님.”
“소화는 잘 시켰느냐? 쉽지 않았을 텐데.”
“형님.”
모용강이 다시 부르자 모용신이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여전히 무감한 표정으로 모용강을 보고 있었다.
“혹여 내 신뢰를 깨는 말을 하려거든 부디 다물어주길.”
“……!”
또로로롱.
찻물이 잔을 채운다.
찻물 소리는 맑은데, 모용강은 질식할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실망시켜서 죄송합니다.”
멈칫.
모용신이 찻주전자를 내려두고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모용강은 모용신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내단은 남궁천이 복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남궁천이라…….”
탁 탁 탁.
모용신이 검지로 탁자를 두드리다가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던졌다.
“경치가 좋지 않으냐?”
“…….”
“내가 이 자리에 오른 것은 상명하복(上命下服)을 지켰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모용강이 어금니를 꾹 씹었다.
모용신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무릇 아랫사람이란 생각을 멈추고 윗사람의 도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충실한 도구가 되면 언젠가 나도 그런 도구를 가지게 되지. 생각이라는 건 그때 비로소 할 수 있는 거다.”
“…….”
“아무래도 넌 도구가 되어야 할 때와 도구를 사용할 때를 구분할 줄 모르는 모양이구나.”
모용신이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저는…… 형님의 도구입니까?”
“글쎄. 그랬다면 너는 이 자리에서 감히 나를 마주 보고 앉아 있을 수 없겠지. 도구는 무조건 주인을 따른다. 부러질지언정 실패라는 건 없다. 하나 너는 실패했지. 그건 도구로서도 실격인 셈이다.”
“도대체……!”
“새겨들어라.”
“……!”
순간 모용강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엄청난 살기가 전신을 덮칠 듯 쏟아지고 있었다.
동생에게 살기를 쏟아붓는 형이라니.
어금니를 빠득 갈면서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 무시무시한 살기 속에서도 모용신의 목소리는 평온하게만 날아들었다.
“본 가가 모처럼 천하제일가문으로 올라섰다. 하나 세상 사람들 중 일부는 그것을 온전히 본 가의 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다시 내려앉을 거라고 생각하지. 그런데 하필 남궁천이 유독 도드라지고 있다. 본 가를 위태롭게 할 튀어나온 돌. 그렇다면 정으로 때려야 하지 않겠느냐?”
“다음에는…… 차질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명심해라. 도구는 부러질지언정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
“튀어나온 돌도 때리지 못할 도구라면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모용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찻잔을 보았다.
“차가 다 식었구나.”
“일어나겠습니다.”
“살펴가거라.”
모용강이 말없이 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 * *
“하앗! 하앗!”
“이여업! 으라차!”
별채 후원에서 연신 기합성이 차오른다.
대도를 들고 강맹한 초식을 이어가는 팽수혁과 허공에 연신 손바닥을 뻗어내는 윤종승. 그리고 한쪽 벽에 기대고 서서 한숨을 내쉬는 남궁천.
“하아.”
남궁천이 긴 한숨을 토해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 지랄들 한다.
아니, 왜 다들 여기로 기어와서 이 지랄들이실까.
보다 못한 남궁천이 한 걸음 나섰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보면 모르냐? 수련하는 중이지.”
“그렇지, 수련이지!”
팽수혁과 윤종승이 번갈아 가며 떠들어댄다.
남궁천이 이마를 살짝 짚었다.
“꺼져라. 여긴 내 공간이니까.”
그러자 윤종승이 슬쩍 눈치를 보고는 고집을 부렸다.
“그, 그래도 같은 조인데 당분간은 함께 모여서 수련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 단합! 그래, 단합의 의미로 말이야.”
“옳은 소리다! 윤종승!”
팽수혁이 버럭 소리치더니 말을 이었다.
“나 역시 단합을 위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 결코 너에게 영감 비스무리한 것을 얻기 위해서 온 게 아니란 말이다! 네놈이 한마디 툭 던진 게 내게 귀감이 됐다거나, 내 무공의 성취를 이뤘다거나 하는 일은 맹세코 없으니까!”
저렇게 속이 훤히 보이게 말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
남궁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칼이 너무 누웠어. 손목을 과하게 비트는 버릇 때문에 장기전이 되면 무리가 가는 거다.”
“응? 뭐가? 그럼 이렇게……?”
팽수혁이 엉거주춤 서서는 대도를 쥔 손을 옆으로 조금 꺾었다.
남궁천이 고개를 저으며 다그쳤다.
“더!”
“이, 이렇게냐?”
“그래, 왼팔은 힘을 좀 더 빼고.”
“이렇게……?”
“더!”
“자, 됐냐?”
“그래, 명심해라. 왼손은 거들 뿐.”
“알, 알았다. 왼손은 거들 뿐.”
팽수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남궁천의 말을 복창하고는 대도를 휘둘렀다.
쉬이이이잇!
대도가 허공을 가르며 나아가는 동안 팽수혁은 확신했다.
‘달라졌다! 확연히!’
공력의 흐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거기에 근육도 부드럽게 움직인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도신일체가 된 것 같다.
쑤아앙.
도기가 발생하면서 허공을 벴다.
그 모습을 보던 윤종승이 입을 동그랗게 모으며 감탄했다.
“오오. 엄청난데?”
팽수혁이 다소 멍한 표정으로 대도를 내려다보다가 얼른 자세를 바로잡았다.
“됐다! 남궁천! 이제 보니 너는 제법 재주가 있구나. 마침 딱! 내가 생각한 것을 네가 그대로 말해주었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첨언하자면, 나는 네 말을 듣고 한 게 아니다! 마침 딱! 내가 그렇게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네가 똑같은 지적을 해주었다. 아주 칭찬하마!”
“아, 눼에, 눼에.”
남궁천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아주 잠깐 저걸 죽여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귀찮아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디 보자.
종승이는 한참 멀었고.
그래도 혁련장의 기본만큼은 제대로 파악한 모양이다.
그것만으로도 어디 가서 호구 취급 받진 않을 터.
이제부터는 성장 속도가 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빠르리라.
남궁천이 두 사람 사이에 우뚝 서더니 툭 말을 던졌다.
“두 사람, 한 번 덤벼볼래?”
“뭐?”
“이 대 일로?”
팽수혁과 윤종승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돌아보았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여기에 왔으면 실전 대비도 하면 좋잖아?”
뭐, 사실은 황금 기운을 실험해 보고 싶은 거지만.
황금 기운은 금혈서의 내단을 통해 얻은 공력을 말한 것이다.
금혈서의 내단을 복용한 이후로 공력의 질이 전체적으로 민첩해졌기 때문에 실전에서 얼마나 효율적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후원으로 진소홍이 나타났다.
“수련은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은데?”
“또 무슨 일이야?”
남궁천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묻자 진소홍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맹에서 불러.”
“누구를?”
“너와 나.”
남궁천이 멈칫거리고는 미간을 좁혔다.
“누가 부르는데?”
“맹주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