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개회
“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윤종승이 목검을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팽수혁이 막무가내로 소리쳤다.
“잔말 말고 날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곧게 찔러 와라!”
“그러니까 왜…….”
“어서!”
결국 윤종승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곧장 몸을 쏘아냈다.
쉬이이잇.
경공까지 펼치며 검을 내지르자 제법 위협적인 검공이 펼쳐졌다.
찰나 팽수혁의 눈빛이 가늘어지면서 머릿속에 남궁천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기신풍을 용천혈에 집중해서 펼쳤으면 내 검을 피하고 뒤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 뭐, 이런 방식이 팽가의 한계이기도 하니까.”
‘건방진……!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어금니를 빠득 깨문 팽수혁이 순간 어기신풍을 펼치면서 보법을 밟았다.
‘용천혈에 공력을 집중하라고?’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지만 우선은 해본다.
파앙!
일순 용천혈에서 공력이 터져 나오자 몸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윤종승을 스치듯 돌아섰다.
쉬이이익.
그대로 목도를 휘두르자 도신이 윤종승 등짝에 사선으로 떨어져 내린다.
탁.
마지막 순간 공력을 거두니 도신이 윤종승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두 사람이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췄다.
팽수혁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되네?”
남궁천의 말대로 확실히 상대의 뒤를 잡았다.
물론 윤종승이 펼친 검식이 남궁천의 창천일섬에 비하면 그 위력이 한참 떨어진다.
하나 그만큼 팽수혁도 모든 공력을 다 쏟지 않았다.
윤종승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방, 방금 뭘 어떻게 한 거야? 순간 눈앞에서 사라진 것 같았는데?”
“시끄럽고. 다시 덤벼.”
“또?”
“어서!”
팽수혁이 다시 목도를 바로잡았다.
한 번은 운일 수도 있다.
윤종승이 투덜거리며 기수식을 취하더니 재빨리 검을 내질러온다.
파앗.
쉬이익! 탁.
“……!”
“……!”
제길…… 역시나 된다.
“다시!”
“언제까지 할…….”
“어서!”
윤종승이 결국 또 검을 내질러갔다.
파앗.
쉬이익, 탁.
“……다시!”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수차례 같은 방식으로 도검을 섞었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
통한다.
‘그 녀석 말이 맞았어. 도대체 남궁천, 너는……!’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아버린 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어째서…….
마침내 윤종승이 목검을 내던지더니 벌러덩 드러누웠다.
“헉, 헉! 못 해! 더는 못 해! 헉, 헉, 헉……!”
“칫! 약해빠진 녀석.”
팽수혁이 혀를 차고는 허리춤에 찬 수통을 꺼내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 역시 이미 전신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남궁천…… 넌 도대체…….’
팽수혁이 깊어진 눈으로 도신을 물끄러미 보았다.
* * *
‘누가 내 칭찬을 하나?’
귀를 후비던 남궁천이 침상에 앉아 정좌를 했다.
내공을 일주천해 본 남궁천이 천천히 눈을 떴다.
‘확실히 아직은…….’
성에 안 찬다.
숱한 경험과 초견파공안을 바탕으로 절정고수 정도는 상대할 수 있지만 내공이 턱없이 부족하다.
어젯밤처럼 떼 싸움이 벌어지면 초견파공안도 한계가 있다.
초견파공안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역시 일대일의 비무 상황이 좋다.
‘하지만 무연회가 일대일 비무만 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개회식이 내일이니까 영단을 구하러 다니기도 애매한데…….’
강호 곳곳에 마련해둔 안가를 일일이 다 뒤지려면 무연회가 다 끝나 버릴 것이다.
‘무한에 잠입해 있던 흑도 세력이 있던가?’
뭐, 당장 무연회가 코앞이니 거기에만 집중해야겠다.
그러다 보면 수가 생기겠지.
어차피 우승까지 갈 것도 아니고.
원래 나는 고민을 깊게 하지 않는 성격이다.
해결책이라는 건 늘 변하는 상황 속에서 때가 되면 절로 튀어나오게 마련이니까.
남궁천은 다시 눈을 감고 운기행공에 집중했다.
단전에서 일어난 한 줄기 공력이 혈맥을 따라 시원하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마침내 무한연합용봉회의 날이 밝았다.
개회식이 열리는 무림맹 대연무장은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광활한 대연무장을 둘러싼 관중석에는 강호인들도 있었지만, 호기심이나 가게 홍보를 위해 몰려든 양민들도 제법 많았다.
그리고 북쪽 정면에는 귀빈석과 함께 높은 단상이 설치되어 있었고, 대연무장 한복판에는 참가증을 받은 생도들이 왁자하게 몰려 있었다.
“와아, 무림맹 대연무장이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어요. 어머! 저기 당과도 팔아요!”
“그러고 보니 연화는 무림맹을 밖에서만 봤겠구나.”
화산파 후기지수이자 무맹관 이년생 생도, 유현.
그는 시종 들떠 있는 사매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마냥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아서 귀여웠다.
주연화가 말을 이었다.
“얼추 사오백 명은 될 것 같은데요?”
“그러게. 하지만 일차시(一次試)에서 아마 절반 이상이 떨어질 거야. 항상 그런 식으로 진행됐다고 하니까. 그러니 너도 방심하면 안 돼.”
“네, 사형. 아 참, 그 소문 들었어요?”
“어떤?”
“정협관 생도들이 올해도 용 사냥을 했대요.”
“용 사냥?”
“아이참, 왜 있잖아요. 자유견식기간만 되면 정협관에서 전통처럼 용천관 생도들을 사냥한다는 거요.”
“흐음. 그런 게 있단 말은 들었지만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걸?”
“아무튼 그런데 올해 사냥 대상이 누군지 아세요?”
“누군데?”
“용천관 공식 호구였대요.”
“공식 호구……?”
“네. 대살성의 아들, 남궁천요.”
주연화가 신나게 떠들자 유현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너마저 공식 호구니 뭐니 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뭐 어때요? 어차피 대살성의 자식인데요.”
“그렇다고 그 아들마저 대살성은 아니지 않느냐?”
“치, 매번 느끼지만 사형은 지나치게 늙은이 같다니깐.”
“뭐라고?”
주연화가 뜨끔한 표정을 짓더니 얼른 말을 돌렸다.
“아무튼 더 놀라운 건 정협관 생도들이 사냥에 실패했다는 거예요.”
“그렇구나.”
“에? 반응이 그게 다예요?”
“연화야, 그런 소문 신경 쓸 시간에 너 자신에게 더 집중하는 게 어떻겠니? 원래 큰 행사를 앞두면 이런 소문, 저런 소문 나오게 마련이야.”
“아, 눼에, 눼에. 그래도 사형은 놀랍지 않아요? 정협관 생도들이 사냥에 실패했다는 게?”
그때였다.
“우리가 뭘 실패했다고?”
굵직한 목소리에 주연화가 움찔거리고는 돌아보았다.
그녀 뒤에서 거구의 사내가 불길이라도 뿜을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그는 바로 황보승이었다.
“어이, 다시 말해봐. 우리가 뭘 실패했다고?”
“아…… 그게…….”
당황한 주연화가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마침 옆에 있던 유현이 한 걸음 나서며 정중히 포권했다.
“철없는 사매가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제가 대신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소협께서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황보승 뒤에서 한 사람이 스윽 걸어 나오더니 싸늘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따로 있는데 왜 당신이 사과를 하지?”
꽤나 신경질적으로 생긴 그는 다름 아닌 당우기였다.
상당히 공격적인 태도였음에도 유현은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고 대꾸했다.
“사매가 강호초출이라 아직 예법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부디 너른 이해 부탁드립니다.”
“글쎄, 전혀 이해를 못하겠는데.”
이쯤 되자 주연화가 발끈하면서 나섰다.
“이봐요! 제 잘못이긴 하지만 사형이 정중히 예를 갖추는데 시종 반말이라뇨? 그쪽도 결례를 저지르고 있단 생각은 안 들어요?”
“허! 이것 봐. 요즘은 방귀 뀐 사람이 더 성낸다니까? 이래도 내가 이해해야 하나?”
“그거야 당신이 계속 시비를……!”
“화야!”
“사형…….”
유현이 다그치자 주연화가 입을 꾹 다물고는 눈치를 보았다.
유현이 다시 포권하며 말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사매는 제가 따끔하게 야단치겠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황보승이 주먹을 손바닥에 팡팡 부딪치며 말했다.
“아니, 야단은 우리가 직접 치고 싶단 말이지! 그러니 당장…….”
“비켜, 돼지야.”
“……그래, 당장 비켜야지. 돼지…… 응?”
황보승이 말을 뱉다 말고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뿐만 아니라 당우기도 당황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순간 당우기와 황보승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너, 너, 넌……!”
“사람도 많은데 왜 길을 처막고 있어? 덩치도 산만 한 녀석이. 한쪽으로 좀 꺼져라.”
“이, 이……!”
황보승이 부들부들 떨면서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뒤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올려다보는 자는 다름 아닌 남궁천.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유현과 주연화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남궁천이 얕게 한숨을 쉬며 다그쳤다.
“돼지 새끼, 안 비켜?”
“이 쳐 죽일 노오옴!”
쑤우우웅.
창졸지간 황보승이 분을 이기지 못해 공력 실은 주먹을 내질렀다.
파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파가 사방으로 훅 불어나갔다.
그 바람에 주변의 다른 생도들도 놀라서 이쪽을 돌아보았다.
“뭐지? 싸움인가?”
“뭐, 또 생도끼리 기 싸움 중이겠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도 종종 보였다.
그런 가운데 황보승은 믿기 힘든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내 주먹을 한 손으로 받아?’
지켜보던 유현도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일권은 아무래도 황보세가의 권법 같았는데…… 그걸 한 손으로 막아내다니. 대단한 자다. 누굴까?’
주먹으로 바위를 부수고 칼을 깨뜨리는 자들이 바로 황보세가 사람들이다.
한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 버리다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먹이 잡힌 황보승이 이상하게 꿈쩍을 하지 않았다.
‘설마…… 못 움직이는 건가?’
유현의 예상은 정확했다.
황보승은 지금 남궁천의 손에 잡혀 꿈쩍도 못하는 중이었다.
화가 난 황보승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왼 주먹을 다시 내질렀다.
“이여업!”
“분명 네가 먼저 시작했다?”
꽈드득.
“끄아아악!”
뼈마디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황보승의 팔이 기괴하게 휘었다. 동시에 황보승이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무릎을 쿵 꿇어버렸다.
“승아!”
옆에서 지켜보던 당우기가 얼른 나서려고 하자 이번에는 그 앞을 유현이 스윽 막아섰다.
당우기가 눈을 부라렸다.
“뭐야? 넌!”
“도움을 받아버린 입장에서 지켜만 볼 순 없어서 말입니다.”
“이 새끼…… 한번 해보자는 거냐!”
촤촤앗.
당우기가 품에서 비수를 뽑아 양손에 쥐었다.
유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천당가 분이시군요.”
“그걸 이제 알았느냐?”
“의외군요. 명문세가의 자제분이 이렇게 분별없이 행동하다니.”
“다른 학관 뒷담화나 까는 건 어떻고?”
“그건 거듭 사죄드렸습니다만.”
“시끄러워!”
당우기가 손에 든 비수를 뿌리려던 참이었다.
두웅! 두웅! 두웅.
마침 단상 위에서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곧이어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조용! 지금부터 제십사 회 무한연합용봉회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