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하여튼 이놈의 인기란
“카아악, 퉤!”
황보승이 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팽수혁을 노려보았다.
그가 목을 우두둑 꺾으며 말했다.
“얌전히 기절한 척 있었으면 몸은 성했을 텐데. 머리가 나쁜 새끼구나.”
“원래 팽가에 돌대가리가 많잖소?”
휘리리릭, 차착.
악굉이 버릇처럼 창을 현란하게 휘두르고는 히죽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팽수혁이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걸어왔다.
다음 순간.
팟.
팽수혁이 바닥을 차더니 그대로 질풍처럼 내달렸다.
황보승이 양팔을 교차해 방어 자세를 취하며 소리쳤다.
“조심!”
파바박!
악굉이 창을 앞세워 방어 자세를 취했고, 다른 생도들도 저마다 공력을 한껏 끌어 올리며 충돌에 대비했다.
어기신풍을 펼친 팽수혁이 단숨에 정협관 생도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온다! 막……!”
버럭 소리치던 황보승이 코앞을 바람처럼 지나가는 팽수혁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파밧!
순간 허공으로 도약한 팽수혁이 짙푸른 도기를 이끌면서 혜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남궁처어어언!”
쉬잇, 쩌어어엉!
촤아아아악.
도검이 부딪치자 두 사람이 관성에 의해 한참이나 밀려났다.
그 바람에 뒤쪽에서 남궁천을 에워싸고 있던 정협관 생도들도 우르르 멀어졌다.
한편 한껏 긴장한 채 방어 자세를 취했던 황보승과 악굉 등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팽수혁의 뒤통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저 씹새끼가…… 우릴 개무시해?’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지는 순간이다.
무한에서는 어디 호패도 내밀지 못할 용천관 생도 따위가 감히 정협관 생도들을 무시하다니.
그러거나 말거나 팽수혁은 남궁천과 도검을 맞댄 채 으르렁거렸다.
“너는 반드시 내가 짓밟는다!”
“이야, 여전한 패기를 보니 아직 덜 처맞았구나.”
남궁천이 씨익 웃자, 팽수혁의 눈이 뒤집혔다.
“이 새끼가!”
쒸아아앙!
다시 한번 푸른 도기가 어둠을 가른다.
남궁천이 얼른 무한보를 펼치면서 검을 거꾸로 세워 도신을 막아냈다.
까앙!
불꽃이 튀면서 두 사람 사이에 도검이 어지럽게 쏟아졌다.
까강! 까가가강.
순식간에 수십 합이 오갔다.
그때 사방에서 정협관 생도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이 새끼들아! 우리가 호구로 보이냐!”
제일 먼저 달려든 자는 황보승.
그가 싯누런 권기를 이끌며 일권을 내질렀다.
후우우우웅.
팽수혁이 짜증을 내며 홱 돌아섰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
콰아앙!
도면과 주먹이 부딪치면서 폭음이 터졌다.
촤아아앗.
육중한 덩치가 떠밀리자, 황보승을 바짝 쫓아 달려들던 생도들이 우르르 쓰러지면서 비명을 터뜨렸다.
“우어억!”
그러는 사이 악굉이 장창을 지지대 삼아 딛고는 그대로 몸을 날려 남궁천에게 날아갔다.
부우우웅.
창기가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남궁천의 머리를 쪼개 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막아선 사람은 다름 아닌 팽수혁.
“꺼지라고 했다!”
파라라라.
팽수혁이 돌개바람처럼 회전하며 그대로 솟구쳐 올라왔다.
투까앙!
도신에 창이 튕겨 나가자 균형을 잃은 악굉이 얼른 공중제비를 돌면서 바닥에 착지했다.
“이익, 미친……! 도대체 당신 뭐요? 우린 남궁천을 사냥하려는 건데 왜 당신이 막는 거요!”
“시끄러워! 네깟 놈들이 어찌할 수 있는 놈이 아니다!”
부웅! 척.
팽수혁이 도신을 한 차례 휘두르고는 공력을 끌어 올렸다.
장삼 자락이 부풀어 오르면서 감히 범접하기 힘든 위압감이 풍겨 나왔다.
이쯤 되자 정협관 생도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팽가 놈은 남궁천을 잡아먹을 것같이 굴면서 왜 자신들에게 도를 겨누는가.
팽수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남궁천을 사냥해? 나도 어쩌질 못하는 중인데 네놈들이? 하!’
가소롭고 한심한 것들.
상대의 수준도 파악 못 한 주제에 땅바닥에 떨어진 물고기처럼 날뛰다니.
“그러다 뒈지는 거야, 병신들아.”
악굉이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너, 이 새끼. 확실히 해. 누구와 싸울 거냐?”
“남궁천이다.”
팽수혁이 턱을 치켜들며 오만하게 대꾸하자, 악굉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칼끝이 방향을 잘못 찾았다는 생각 안 드냐?”
“날 방해하면 네놈들도 가차 없이 벤다.”
“이 답답한 새끼야. 그러니까 우린 방해가 아니라…….”
“자자, 왜들 싸우고 그래?”
갑자기 불쑥 끼어 든 사람은 다름 아닌 남궁천.
남궁천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달밤에 이게 뭔 짓들이야? 다 같은 생도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둘이 화해해라. 보기 좋게.”
순간 팽수혁과 악굉이 얼빠진 표정으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이 뭔 개 같은…….
남궁천이 얕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진작 줄 섰으면 이런 일이 없잖아. 질서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차례대로 줄 서서 곱게 처맞고 돌아가자.”
“이 새끼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다시 눈이 뒤집힌 팽수혁이 대도를 휘둘러왔다.
동시에 남궁천이 발끝으로 바닥을 툭 차며 물러났다.
하여튼 이 새끼는 자꾸 흥분해서 탈이라니까.
쒸이이잉.
도기가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친다.
빠르게 물러난 남궁천이 벽을 발로 차면서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탁, 쉬이이이잇!
창궁무애검법의 창천일섬(蒼天一閃).
그야말로 한 줄기 빛이 날아든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팽수혁이 눈을 번뜩이며 얼른 도면을 들어 막아냈다.
쩌어어엉!
촤촤아아앗-
두 사람이 도검을 맞댄 채 미끄러졌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제법이다. 하나 어기신풍을 용천혈에 집중해서 펼쳤으면 내 검을 피하고 뒤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 뭐, 이런 방식이 팽가의 한계이기도 하니까.”
“이, 이익……!”
팽수혁의 눈이 귀신처럼 찢어졌다.
“이런.”
남궁천이 얼른 물러났다.
하여튼 성격이 거지 같다니까.
기껏 훌륭한 지적을 해줬더니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이렇게 화만 내다니.
팽수혁이 아예 눈을 까뒤집고 몸을 던져왔다.
“죽여 버린다!”
그때였다.
두 사람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 아닌가.
남궁천과 팽수혁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보니, 당우기가 달빛을 등진 채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이 하찮은 똥개 새끼들이 우릴 뭐로 보는 거냐!”
쉭쉭쉭쉭쉭쉭.
순간 당우기가 현란한 춤을 추듯 양손을 마구 휘저었다.
초견파공안으로 당우기의 운공을 파악한 남궁천이 얼른 외쳤다.
“천녀산화(天女散花)!”
이렇게 친절하게 무공명을 외친 이유는 나름 팽수혁을 배려한 것이다.
뭔지 알아야 녀석도 한쪽에서 막아줄 테니.
쏴아아아아아.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붉은 기운을 품은 암기들이 어둠을 채운다.
보통의 암기는 빛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적을 노리는 게 암기니까.
하나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쓰는 천녀산화는 암기가 빛을 머금는다.
적에게 공포심과 혼란을 가중하기 위해서다.
물론 지금 당우기의 적은 다수가 아니지만, 수중에 남은 암기 중 적당한 게 천녀산화뿐이었다.
그리고 천녀산화라면 두 사람을 벌집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리라.
‘뭐, 독을 바르진 않았으니 죽진 않을 거다.’
한데 상황은 생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크읏! 귀찮은 나방 같으니라고!”
따다다다당!
팽수혁이 넓은 도면으로 무수히 날아드는 천녀산화를 마구 쳐냈다.
뿐만 아니라 남궁천 역시 검기를 일으켜 빠르게 회전하면서 검막을 형성했다.
까가가강! 따다다다당!
요란한 불꽃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마구 터져 나왔다.
이윽고 남궁천과 팽수혁이 서로 등진 채로 암기들을 쳐내니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두 사람을 향해 날아갔던 천녀산화가 그대로 튕겨지면서 정협관 생도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푸푸푹! 푹.
“크아악!”
“아악!”
정협관 생도들이 마구 쓰러져 갔다.
“하앗!”
파앙!
따다다당!
황보승과 악굉도 얼른 주먹과 창을 휘둘러 날아드는 천녀산화를 튕겨냈다.
‘제길! 말도 안 돼!’
당우기가 바닥에 착지하면서 불신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저 두 놈이 천녀산화를 튕겨 내다니.
팽수혁이 어깨를 들먹이면서 등 뒤에 선 남궁천에게 뇌까렸다.
“썩을! 이 귀찮은 나부랭이들 처리할 때까지 기다려라.”
“그러시던지.”
남궁천이 검을 앞세우며 대충 대꾸했다.
한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당우기가 버럭 외쳤다.
“뭣들 해! 저것들 밟아 버려!”
“우와아!”
정협관 생도들이 다시 기합성을 터뜨리며 쇄도해갔다.
당우기가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가진 암기를 다 쓰는 한이 있어도 네놈들만큼은 반드시 망가뜨린다!’
그가 품속에서 폭우이화침(暴雨梨花針)을 매만졌다.
당문의 독문 암기.
삼매진화 수법으로 심지에 불을 붙이면 화약이 터지면서 수만 개의 침이 폭사되는 무시무시한 암기다.
물론 이걸 사용하게 되면 남궁천과 팽수혁은 중상을 넘어 목숨마저 위험할 수 있다.
독을 바르진 않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기에.
아무리 자유견식기간이라도 폭우이화침을 쓰는 건 선을 넘는 일.
하지만 상황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당우기는 점점 이성을 잃고 있었다.
따다당! 까강!
푹! 퍽! 빠악! 촤악-!
“크아악!”
“으악!”
금속성과 타격음, 신음과 비명이 마구 터져 나온다.
한데도 남궁천과 팽수혁은 여전히 야생마처럼 날뛰고 있다.
마흔 명을 끌고 왔는데, 단 두 명을 못 잡고 있다니.
황보승의 권법도 악굉의 창법도 번번이 두 사람에게 막힌다.
이래서야 모용강에게 돌아가면 뭐라 말한단 말인가.
은근히 정협관의 일인자 자리도 넘보던 당우기였다.
한데 일인자는커녕 망신만 당하게 생기지 않았나.
그렇잖아도 집안에서는 잘난 누나와 비교되느라 열등감에 시달리는데, 여기서는 기껏 용천관 공식 호구를 잡지 못해 이 지랄이라니.
“이익……! 이 개새끼들아! 내가 만만하냐!”
결국 당우기가 폭우이화침을 꺼내 들었다. 곧이어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심지에 불을 붙인 순간이었다.
쉬이잇.
때마침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손이 불쑥 나타나면서 심지를 냅다 뽑아 버리는 게 아닌가.
“헛! 어떤 새끼가……!”
반사적으로 돌아보며 소리치던 당우기가 흠칫거렸다.
흑의 경장 차림에 백발 사내, 비량이 싱긋 웃었다.
“아무리 급해도 선을 넘으면 안 되지.”
“누, 누구……?”
“나? 용천관 청룡반 교관.”
“아무리 교관이라도 지금은 자유견식기간……!”
“아쉽게도 여기까지. 방금 막 자정이 지나쪄요.”
비량이 놀리듯 하는 말에 당우기가 미간을 팍 구겼다.
때마침 하늘에서 흑의 경장 무인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슈슈슈슈슈슉.
가슴에는 교관을 뜻하는 ‘교(敎)’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무한의 삼대 학관 교관들이다.
정협관 생도들이 떠밀리듯 물러났다.
“자유견식기간 종료!”
교관 중 한 명이 외치자, 정협관 생도들이 맥 빠진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정신없이 싸우던 팽수혁도 그제야 벽에 등을 기대고는 연신 어깨를 들먹였다.
“헉, 헉, 헉……! 지긋지긋한 새끼들! 비열한 새끼들! 도대체 몇 명이나 끌고 온 거야? 헉, 헉……!”
숨을 몰아쉬던 팽수혁이 옆을 힐끔 보니, 남궁천이 깊어진 눈으로 저만치 선 비량을 보고 있다.
‘이 괴물 같은 새끼!’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그 모습에 팽수혁이 얼른 숨을 참으며 허리를 폈다.
‘질까 보냐!’
도끼눈을 한 팽수혁이 최대한 숨을 꾹꾹 참으며 힘들지 않은 척 말했다.
“후흡! 남궁천……! 너는…… 내가…… 흡! 반드시…… 밟…….”
“똥 마려워? 참으면 병 된다. 얼른 가서 싸라.”
말을 마친 남궁천이 홀연히 몸을 돌리더니 저벅저벅 걸어갔다.
팽수혁이 뒤통수를 맞은 듯한 표정으로 돌아보다가 뒤늦게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 저, 저……! 남궁처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