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일차시(一次試)
개회식이 선포되자 장내가 일순 조용해졌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적막해졌다.
단상에 선 여인은 뭇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어디에서나 눈에 바로 띌 것 같은 붉은 비단 옷에 백옥 같은 피부, 또렷한 눈망울.
그녀는 바로 무림맹 적랑단주(赤浪團主) 당예설이었다.
사천당가의 장녀이자, 당우기의 누이인 당예설은 무정하다 싶을 정도로 차가운 눈길로 장내를 훑다가 잠깐 시선을 멈췄다.
그녀의 눈길이 머문 곳은 바로 동생 당우기가 있는 곳.
‘저 멍청한 녀석이 또 무슨 사고를 치는 거야? 음? 저 아이는 분명…….’
남궁천에게 시선을 잠시 두었던 당예설이 곧 대연무장을 다시 훑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제십사 회 무한연합용봉회 개회식이 거행될 예정이니, 장내의 모든 생도들은 정숙을 유지해주도록!”
확실히 그녀의 존재감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딱히 사자후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부드럽게 귓속으로 날아든다.
그만큼 심후한 공력을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뜻이리라.
남궁천은 잡고 있던 황보승의 주먹을 한쪽으로 아무렇게나 부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단상 뒤쪽으로 마련된 귀빈석에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제법 있었다.
‘대충 절반은 아는 얼굴들이군.’
특히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찬 수맹당주(守盟團主) 철패강은 전생에 직접 손을 섞은 자이기도 했다.
‘다들 그사이에 많이 늙었구나. 저 눈깔은 어쩌다가 잃은 거야? 아…… 내가 그랬나?’
당시엔 워낙 덤벼드는 놈들이 많았기 때문에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한테 달려들다가 눈이나 팔다리 하나쯤 잃은 놈들이 어디 한둘이었어야지.
분명한 건 저 녀석도 내게 달려들 때까지는 두 눈이 멀쩡했다는 거다.
‘흐음. 그때 내가 저놈 눈을 찌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얼굴 어딘가를 찌르긴 찔렀을 텐데 애매하다.
이럴 땐 속 편하게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그 옆에 앉은 할망구는 누군지 도통 모르겠고, 다시 그 옆에 앉은 거구는 살충대주(殺蟲隊主) 고천수군.
얼굴 한쪽이 화상 흉터로 흉악하게 일그러진 고수.
저 녀석은 확실히 기억난다.
내가 화공으로 얼굴을 조진 놈은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에 도망치다가 폭약을 썼었는데, 하필 저놈이 걸려들어 화상을 입었었다.
얼굴 절반이 타들어가는 걸 직접 봤는데 용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나 보다.
그게 벌써 칠 년 정도 전이니까 지금은 직책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철패강도 원래는 수맹당주가 아니었으니.
저 녀석도 살충대주 정도에 머물러 있으면 수뇌인사라고 할 수도 없겠지.
그나저나 생각해 보니 기분 더럽네.
조직명이 살충대가 뭐냐? 살충대가.
내가 무슨 벌레야.
하여튼 무림맹 놈들은 사람 속 긁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
남궁천이 그렇게 수뇌인사들을 하나하나 훑는 동안 당예설은 간략한 연설을 이어갔다.
남궁천이 힐끔 돌아보니, 당우기는 괜히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고, 황보승은 부러진 팔을 쥐고 끙끙거렸다.
순간 눈이 마주치니 은근슬쩍 시선을 외면하는 황보승.
역시 사냥을 할 때는 확실히 물어 뜯어놔야 한다.
가끔 물소가 호랑이를 공격할 때가 있듯이, 확실히 상하관계를 해두지 않으면 이것들이 주제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그 외 다른 생도들은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당예설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맹주님의 말씀이 있겠다.”
당예설의 목소리에 생도들은 물론 구경하러 온 양민들마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만세를 부르짖었다.
그 열광적인 광경에 남궁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 원, 사이비 교주가 따로 없네.’
유사 이래 가장 인기 많은 맹주라지만 이건 좀 정도가 심한 것 아닌가.
도대체 그 늙은 구렁이가 왜 좋다는 거지.
마침내 단상 위로 비교적 왜소한 체구에 단출한 옷차림을 한 노인이 등장했다.
무림맹주.
두둥.
북이 울리면서 그의 등장에 효과를 더해주었다.
맹주가 손을 들어 올리자 함성이 멈추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옆에 선 당예설에게 시선이 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이다.
남궁천도 맹주를 빤히 올려다보며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가슴이 뛴다.
물론 맹주에게 열광하는 자들과 다른 의미다.
증오와 원망, 복수심과 울분이 그의 피를 끓게 한다.
저 인자해 보이는 얼굴 이면에 독사 수백 마리가 있다는 걸 남궁천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고, 아내의 가문을 몰락시키고,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원죄가 있는 자.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날아가서 일격에 때려죽이고 싶다.
하지만 참는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군자는 아니지만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격언에는 심히 동의하는 바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러나…….
‘맹주! 당신은 언젠간 내 손으로 반드시 죽인다.’
남궁천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는 동안, 맹주는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물론 남궁천의 귀에는 단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지만, 다른 생도들과 양민들에게는 한마디 한마디가 그저 감동의 물결인 모양이다.
“……이제 너희들의 기량과 재능을 마음껏 드러내어 우리 백도 무림의 앞날에 희망과 빛이 가득하다는 것을 증명하라.”
맹주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치자, 생도들과 양민들이 열렬히 환호성을 보냈다.
“와아아아아아!”
“맹주님 만세!”
“무림맹 만세!”
특히 관중석을 가득 메운 양민들이 꽃가루 같은 것을 뿌린 건지 하늘이 오색찬란하게 물들었다.
남궁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들 미쳐 돌았네.
그런데 단상에서 물러나던 맹주가 일순 정확히 남궁천을 응시했다.
귀빈석으로 가서 앉은 맹주가 옆에 선 사내에게 물었다.
“혹시 저 아이인가?”
“예, 맞습니다. 맹주님. 대살성의 사생아, 남궁천입니다.”
모용세가 소가주이자 무림맹 청랑단주(靑浪團主)인 모용신이 깍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당예설과 대조적으로 푸른 무복을 갖춰 입은 그는 동생 모용강만큼이나 수려한 외모에 특유의 싸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맹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중얼거렸다.
“외모만큼은 제 어미 쪽을 닮은 것 같군.”
“염려 마십시오. 재능은 미미한 편이라고 합니다.”
“그래야지. 대살성의 자식이 후기지수로 이름이라도 떨친다면 모양새가 썩…….”
모용신이 희미한 냉소를 지었다.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맹주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자네 동생에게 거는 기대가 크네.”
맹주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모용신과 상당히 닮은 모용강이 검을 끌어안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제몫은 해내는 녀석이지요.”
“모용세가는 든든하겠어.”
맹주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다시 시선을 남궁천에게 두었다.
“다만…….”
맹주는 뭐라고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속으로 뇌까렸다.
‘어딘지 그 녀석의 냄새가 난단 말이지.’
뭐, 그 녀석의 아들이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러나 늙은이의 육감이 말한다.
그보단 좀 더 다른 뭔가가 있는 것 같다고.
피식.
맹주가 실소를 머금었다.
육감이라니.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건가?’
그가 맘에도 없는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남궁천은 맹주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저것들이 지금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도망자로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날카롭게 다듬어진 직감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방금 자리로 돌아간 맹주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분명 옆에 선 기생오라비와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대살성의 자식이라지만…… 고작 생도 하나를 맹주가 신경 쓴다는 건?’
계획 변경이다.
대회에서 우승하면 자칫 안 좋은 쪽으로 눈도장이 찍힐까 경계했더니.
이미 눈도장은 찍힌 모양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대놓고 화려하게 해주지.
이렇게 되면 이번 무연회 목표는 우승이다.
‘최대한 빨리 네놈이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주마!’
그리 되면 적도 분명해질 터.
결심을 굳힌 순간, 당예설이 외쳤다.
“지금부터 치를 무연회 일차시(一次試)는 모든 무공의 기본이 되는 경공 시험! 최종통과자는 선착순 이백 명이다!”
생도들이 웅성거렸다.
“드디어 시작하는 건가?”
“경공이라면 죽어라 달려야겠네.”
당예설이 설명을 이었다.
“통과자는 선착순으로 숙소를 정할 권리가 주어진다. 너희들은 그저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만 하면 된다. 목적지는 바로 장강 복판에 떠 있는 누선(樓船)! 두 척의 배에 모두 이백 명이 승선하면 시험은 종료된다!”
생도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술렁거렸다.
“뭐야? 지금 바로 한다고?”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그러는 사이 눈치 빠른 생도 몇 명이 정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어? 이대로 시작하는 거야?”
“출발 신호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생도들을 보며 당예설이 가만히 냉소를 지었다.
‘애송이들아. 강호에서는 뭐든 예고가 없단다. 죽음이 그렇듯, 기회도 마찬가지. 결국 눈치 빠른 자가 살아남고 오래 가는 법이지. 눈치도 실력, 운도 실력인 곳이 바로 강호란다.’
이미 시험이 시작됐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생도들이 우르르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 가자!”
“젠장! 무슨 대회를 이렇게 뜬금없이 시작하냐고!’
* * *
윤종승은 모래 언덕에 앉아서 저 앞에 흐르는 장강만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손에 쥔 무연회 참가증을 보았다.
괜히 깊은 한숨이 나온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지금쯤 일차시를 치르는 중이겠지.
무슨 내용일까.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시험에 응할까.
아니다. 용천관 공식 호구가 된 주제에 무슨.
혹시나 해서 참가 신청을 하고 참가증까지 받았지만 역시 부질없는 짓이었단 생각이 든다.
무림맹 정문으로 들어오는 쟁쟁한 후기지수들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일차시도 통과하지 못하고 떨어질 게 뻔했다.
그래서 모든 걸 내려두고 발길을 돌려 이곳 강가에 죽치고 앉아 한숨이나 쉬는 중이다.
‘남궁천. 네 말대로 지옥을 겪고 있는 중인데 왜 난 강해지지 않는 거냐?’
어금니를 꾹 씹던 윤종승이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하긴. 남궁천에 비할 게 못 된다.
남궁천은 수년을 그렇게 지옥에서 버텨왔다.
한데 자신은 고작 몇 달도 지나지 않았다.
남궁천만큼 강해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오랜 기간 지옥을 겪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시험을 쳐볼까?”
괜히 혼잣말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벌써 일차시가 치러지고 있을 텐데, 내용도 모른 채로 돌아가서 임해봐야 무슨 소용이랴.
하아, 오늘따라 배가 많다.
여기저기 나룻배도 떠 있는데, 다들 무슨 일인지 강물 위에 크고 작은 통나무를 던져 놓고 있다.
뭐 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커다란 누선도 두 척이 보인다.
“응? 저건 무림맹 깃발?”
누선 두 척에서 무림맹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며 올라온다.
윤종승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전쟁이 난 건 아닐 테고.”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땅이 미약하게나마 흔들린다 싶더니 저만치 뒤에서 뿌연 먼지구름이 몰려오는 게 아닌가.
“어어……?”
분명 먼지구름은 윤종승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괜히 더럭 겁이 난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진짜 전쟁이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누군가 먼지구름에 앞서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저건…… 남궁천?”
놀랍게도 먼지구름을 이끌며 맨 앞에서 달려오는 자는 다름 아닌 남궁천.
아득히 멀리 있던 남궁천의 크기가 빠른 속도로 커지더니 찰나지간 바람처럼 곁을 지나쳤다.
쌔앵.
“으헛!”
깜짝 놀란 윤종승이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한 무리의 생도들이 소떼처럼 우르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우아아악! 이게 무, 무슨 일이야!”
윤종승이 몸을 말고 소리치는 가운데, 선두에 섰던 생도들이 남궁천을 따라 재빨리 모래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마침 누군가 윤종승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이 멍청한 새끼야! 길 막지 말고 꺼져!”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팽수혁이 성난 황소처럼 달려오다가 발을 힘껏 내질렀다.
뻐엉!
졸지에 발에 걷어차인 윤종승이 강물까지 날아가 버렸다.
“꺄오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