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하여튼 이놈의 인기란
휘리릭.
지붕 위에서 재주를 넘으며 바닥으로 떨어진 사내는 머리에 검은 띠를 두르고 기다란 창을 쥐고 있었다.
휘릭! 쉭쉭쉭쉭.
사내가 몇 차례 현란한 창술을 자랑하듯 보여주다가 왼발로 반원을 그리며 화려한 동작으로 마무리 지었다.
촤아앗! 척.
남궁천이 짝다리를 짚고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주 지랄을 한다. 악비 장군의 후손이신가?”
“산동악가의 차남, 악굉이오.”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창술이 그 모양이라니. 악비 장군이 지하에서 통탄할 노릇이군.”
“흥! 나름 격장지계를 쓰려는 모양인데 안 통하지.”
악굉이 차갑게 웃으며 창봉을 곧게 겨누었다.
남궁천이 귀를 후볐다.
“일대일도 아닌데 격장지계는 무슨.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악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배짱은 좋구나!”
지붕 위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더니 육중한 체격을 가진 거구가 혜성처럼 뚝 떨어졌다.
쿠우웅.
어찌나 무거운 몸인지 바닥에 착지하니 땅이 미약하게나마 흔들렸다.
처척.
그가 한 걸음 내딛자, 바닥에 깊이 찍힌 발자국이 드러났다.
거구가 두 주먹을 쥐며 기수식을 취하니 육중한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남궁천이 입을 동그랗게 모으며 감탄했다.
“오오, 넌 진짜 크구나. 귀왕한테 늙은 돼지라고 놀린 건 사과해야겠어. 진짜 돼지가 따로 있었네.”
“이 새끼가…….”
거구의 사내가 씹어뱉듯이 말하자 두 주먹에 누르스름한 기운이 팽팽하게 응집했다.
남궁천이 말했다.
“암갈색 가죽토시를 차고 권공을 쓰는 걸 보니…… 황보세가인가?”
“후후. 눈은 썩지 않았구나.”
“썩은 데는 없는데? 다행히 썩기 전에 내가 다시 살아나서.”
남궁천이 히죽 웃어 보이자, 황보승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 이런 긴장감 없는 새끼가 다 있지?’
때마침 지붕 위에서 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크큭. 재미있는 놈이네, 이거. 운 좋게 조강민을 때려눕혔을 거라고 생각했더니, 제갈기 말대로 뭔가 믿는 구석은 있나 보네.”
지붕 위에서 달빛을 등진 사내가 입매를 길게 찢었다.
그의 목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양쪽 건물 지붕 위에서 그림자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슈슈슈슈슈슉.
대략 서른 명에 가까운 인원이 남궁천을 앞뒤로 에워쌌다.
뿐만 아니라 지붕 위에는 여전히 열 명 정도가 남아서 감시하고 있다.
총 마흔 명에 달하는 인원.
도주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쯧, 귀찮게.’
땅을 파고 달아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정면 돌파할 수밖에.
스르릉.
남궁천이 벽라검을 뽑아 들며 입을 열었다.
“줄 서라.”
“……?”
“처맞고 싶은 순서대로 줄 서라고. 이렇게 무질서하게 서 있으면 줘 패기도 힘들어.”
“쿡, 하하하! 이거 진짜 웃긴 새끼네. 넌 둘 중 하나구나. 미친놈이거나 그저 웃긴 놈이거나.”
남궁천이 깜짝 놀랐다.
이렇게 정확히 파악하다니.
확실히 나는 전생에 미친놈이라는 소리와 웃긴 놈이라는 소리를 제일 많이 들었다.
주로 백도인들은 나를 미친놈이라고 했고, 흑도인들은 나를 웃긴 놈이라고 했으니까.
어쨌거나 녀석의 안목이 대단하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답례를 해줄 수밖에.
“그러는 넌 지붕에서 기어 내려오지도 않는 걸 보니, 어디 구석에 숨어서 암기나 깔짝대는 비열한 당가 새끼구나.”
노골적인 조롱에 당우기가 웃음을 뚝 그쳤다.
어둠 속에서 노기에 찬 그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을 뿌린다.
“넌 그 주둥이 때문에 뒈질 줄 알아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뭔가가 번쩍이며 날아들었다.
쒸에에엑.
물론 그보다 앞서 남궁천은 당우기의 단전에서 치솟은 공력이 빠른 속도로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을 내달리다가 엄지의 소상혈(小商穴)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여느 암기술이 검지와 중지에서 공력이 발출하는 것을 감안할 때, 소상혈에 공력이 집중되는 것은 당가의 절기인 추혼비접(追魂飛蝶).
아니나 다를까,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드는 암기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다.
마치 잘못 던진 암기처럼 납작한 암기가 마구 뒤집힌다.
언뜻 나비가 너풀거리며 날아오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암기술은 남궁천으로서도 제법 까다로운 무공이다.
초견파공안으로 파훼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체내와 연동된 상태.
하나 이미 손을 떠나 버린 암기는 초견파공안으로 본다고 한들 별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지금 남궁천이 재빨리 보법을 밟아 추혼비접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전생에 겪은 무수한 경험 덕분이다.
전생의 추격자들 중에는 당가주를 포함한 당가의 무인도 징글징글하게 많았으니까.
당가의 추혼비접을 피하거나 막으려면 코앞에 암기가 다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핵심.
이러다 죽겠다 싶을 때까지.
‘바로 지금처럼!’
암기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다랐을 때, 남궁천이 무한보를 펼쳤다.
스스슥.
마치 바닥이 얼음판이라도 된 것처럼 발길이 자연스럽게 미끄러진다.
쉬이익.
조금 전까지 남궁천이 서 있던 자리에 암기가 지나간다.
찰나.
쉬까앙!
벽라검이 번개처럼 치솟으며 시커먼 암기를 쳐냈다.
쒸에엑, 푹.
“커윽!”
눈 깜빡할 사이에 튕겨 날아간 암기가 정협관 생도 옆구리에 처박혔다.
생도는 두 눈을 부릅뜨더니 이내 경련을 일으키며 털썩 주저앉았다.
보아하니 목숨을 잃을 정도의 치명상은 아니지만, 암기에 마비 독까지 발라놓은 모양이다.
“이거 진짜 나쁜 새끼네. 암기에 독까지 처발랐어?”
남궁천이 미간을 푹 찡그리자, 당우기가 입매를 비틀었다.
“이 새끼, 제법 놀 줄 아는구나! 그 잘난 주둥이를 어디까지 털어내는지 보자!”
파바밧!
순간 당우기가 춤을 추듯 양손을 휘둘러댔다.
쉬쉬쉬쉬이잇.
그러자 총 열두 개의 암기가 마치 사슬고리처럼 이어지면서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당문절기인 연환십이참(連環十二斬).
동시에 사방에 퍼져 있던 생도들이 저마다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달려들었다.
“이여업!”
“하아앗!”
남궁천이 혀를 차며 튀어나갔다.
“새끼들, 줄 서라니까 참 말 안 듣네.”
남궁천이 제일 먼저 날아온 암기를 쳐냈다.
까앙!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첫 번째 암기가 튕겨 날아갔다.
푹.
“끄악!”
누군가의 비명 소리.
사실 당우기가 연환십이참을 제대로 펼쳤다면 이렇게 쉽게 쳐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우기는 아직 어리다.
적어도 이 갑자는 되어야 연환십이참을 위협적으로 펼칠 수 있을 터.
지금의 연환십이참은 그럴싸한 흉내에 불과하다.
세가의 자식이면 영단 좀 처먹지. 당가면 넘쳐나는 게 영단일 텐데.
앞서 던진 추혼비접도 마찬가지.
추혼비접이 왜 추혼비접인가.
혼까지 쫓아서 날아간다 하여 추혼비접이다.
이는 공력이 심후할수록 효과를 본다.
하나 공력이 얕은 당우기는 암기를 의지대로 다룰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공기 저항에 따라 어디로 튈지 모를 암기를 추혼비접이라며 던지는 거다.
역시 어설픈 흉내 내기다.
그렇다고 아주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지만.
‘뭐, 젊은 나이에 그 정도 흉내도 대단하긴 하지.’
만약 당우기가 한 치도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면 꽤 귀찮아졌을 지도.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없고!’
만천화우(滿天花雨)도 피해가며 경공을 펼쳤던 이 몸이시다.
물론, 그땐 진짜 뒈질 뻔했다는 건 비밀.
투까가가강.
연이어 대여섯 개의 암기를 쳐낸 후, 제일 빨리 달려온 생도를 이마로 들이받았다.
빠악.
“커윽!”
생도가 코를 부여잡고 물러나자, 암기 하나가 그의 등에 푹 처박힌다.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생도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멈칫거린다.
그럴 수밖에.
이건 뭐 남궁세가의 초식이고 나발이고 이마로 들이받질 않나, 그저 개싸움이 아닌가.
어쩔 수 없다.
절대 다수를 상대하면서 초식은 염병! 생존 본능에 따라 내 원래 방식이 나올 수밖에.
창궁대연검법의 검초와 막무가내식 개싸움이 뒤죽박죽 섞였다.
퍽! 촤악! 빠악! 퍽! 촤촤악.
“크악!”
“아악!”
적을 때리는 타격감과 살을 베는 감각은 늘 짜릿하다.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치니 전신의 감각이 깨어나며 환호성을 지르는 듯하다.
이 얼마 만인가.
아, 이런 걸로 전율하면 안 되는데…… 어쩔 수가 없다.
남궁천은 묘한 향수에 젖은 채로 훌쩍 몸을 날려 생도 하나의 이마를 발로 찍어 눌렀다.
퍽.
“커윽!”
그대로 솟구친 남궁천이 재빨리 당우기 코앞까지 날아갔다.
“이 새끼!”
당우기가 급한 대로 비도를 꺼내 휘둘렀다.
까앙!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일어난다.
“영단 좀 처먹고 내공 좀 키우지 그랬냐? 아빠가 너한텐 안 줘? 지 혼자 처먹겠대?”
“이 미친 새끼!”
역시 이놈은 날 잘 파악한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든다.
순간 남궁천이 금나술을 펼쳐 당우기의 소매와 멱살을 쥐고는 지붕 아래로 냅다 던져 버렸다.
슈우웃, 쿠웅.
어깨부터 떨어진 당우기가 어금니를 꽉 씹으며 재빨리 일어났다.
파밧!
그러는 사이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허공으로 치솟으며 그대로 남궁천을 향해 창을 휘둘러왔다.
악굉이었다.
쉬카아앙!
남궁천이 아슬아슬하게 창을 막아냈지만, 막강한 힘 때문에 기왓장을 부수며 떠밀리다가 골목으로 떨어졌다.
촤르르륵! 휘릭, 탁.
“노오오옴!”
이번엔 황보승이 황소처럼 돌진해왔다.
“그 주둥이 박살 내주마!”
쑤아아아앙!
권기를 머금은 황보승의 주먹이 정면으로 날아든다.
남궁천이 얼른 무한보를 펼쳐 이동하자, 황보승의 일권이 그대로 벽에 날아가 작렬했다.
꽈아앙!
단단한 벽에 금이 쩍 갔다.
황보승이 손을 거두며 씨익 웃었다.
“망아지처럼 날뛰는 것도 여기까지다.”
어느새 황보승 주위로 흉흉한 기도를 드러낸 정협관 생도들이 남궁천을 바짝 에워쌌다.
남궁천이 금이 간 벽을 보고는 황보승에게 말했다.
“돼지라고 한 말은 취소. 멧돼지로 승격.”
“이 미친 새끼…….”
그때였다.
퍼억.
“으악!”
저 뒤에서 둔탁한 소리에 이어 생도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협관 생도들이 움찔거리고 돌아보니, 팽수혁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으르렁거렸다.
“이 새끼들…… 멋대로 남의 밥그릇을 넘보다니…….”
“이건 또 뭐야?”
정협관 생도 한 명이 턱을 치켜들고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찰나, 팽수혁이 대도를 휘두르자, 넓적한 도면이 생도의 뺨을 정확히 후려쳤다.
퍼어억.
“컥!”
정말이지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
탄환처럼 튕겨 나간 생도가 그대로 건물 벽에 처박혔다.
쿠다앙!
팽수혁이 커다란 도신을 어깨에 척 걸쳤다.
“남궁천 손보고 싶은 놈은 내 뒤로 줄 서, 이 새끼들아. 새치기하지 말고.”
정협관 생도들이 멍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 봐. 내가 뭐랬냐? 줄 서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