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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72화 (72/115)

#72화

“내 치료제를 부탁하려고 왔습니다만.”

에카르트가 나 대신 대답하더니, 앞으로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듯이 쐐기를 박았다.

“다른 백마법사들은 저를 치료할 만한 실력이 없더군요.”

“그렇다니 유감이야. 그래도 황실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해요.”

퍽이나 그러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공녀, 아니, 공왕답게 깔끔히 예를 차렸다.

황실에서 돌아온 후.

나는 오늘도 변함없이 제국 최강의 미녀와 미남 사이에 끼였다.

둘은 내 자리와 닿을 정도로 그들의 의자를 가까이 붙이고 앉았다. 그러고는 포크로 타르트와 케이크를 각각 찍어 내게 내밀었다.

“시엘. 아, 해 봐. 아.”

“엘린, 제가 드리는 걸 먼저 드십시오.”

내 양 입가에는 다시 크림이 치덕하게 묻었다.

나는 결국 두 사람이 내민 포크를 잡고 동시에 입에 넣어 씹기 시작했다. 딸기 맛과 크림 맛이 섞인 디저트가 되었다.

“이제 나도 먹여 줘!”

“저 여자 말은 무시하고 마저 드십시오. 아.”

아무래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헬라가 들어왔다.

“공녀님. 황실에서 물건을 보냈습니다. 황후 폐하의 인장이 찍혀 있더군요.”

“황금 버섯인가 봐요.”

내가 에카르트에게 말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내 오른손을 잡았다.

“그럼…, 이제 연구실로 갈까요?”

“네.”

“가자!”

블랑세도 내 왼손을 잡았고 둘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양옆에서 스파크가 튀어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나는 둘에게서 손을 간신히 빼낸 후 테이블 아래로 도망쳐 나왔다.

우리는 연구실에서 원목으로 된 고급 상자를 열어 보았다.

버섯을 유심하게 관찰하니 내가 생각하던 색과 미묘하게 달랐다. 하여, 따뜻한 물을 준비한 뒤에 포자 끝을 떼어 넣어 보았다.

그러자 포자는 검은색으로 변했다.

“황색 버섯이구나.”

“응.”

성전에서 같이 수업을 들은 블랑세 역시 알아차렸다.

황금 버섯과 색깔도 똑같고 향도 비슷하지만 황색 버섯은 약재가 아니었다. 먹으면 몇 시간 정도 열에 시달리는 독버섯이니까.

나는 에카르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황실에서 재료를 잘못 보냈어요.”

“독이지요?”

“네. 극독은 아니지만요.”

“황후를 암살합시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죽였을 텐데 친구 어미라고 살려 뒀더니, 원.”

에카르트가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황태자 전하는요?”

“그놈도 이해할 겁니다. 드디어 엄마 품에서 벗어났다며 좋아할지도 모르지요.”

“진정해요! 우선 제가 먼저 이야기를 나눠 볼게요.”

가급적 황실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작금과 같은 사태를 순순히 넘어갈 마음도 없었다.

황후 역시 내가 알아차릴 만큼 약한 독을 보낸 이유는, 일단 경고하기 위해서겠지.

그래도 내 입장은 명확했다.

나는 에카르트의 편이고 그의 옆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

아렌다의 응접실. 라멜과 황후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황후와 단둘이 대면한 라멜은 잠시 넋이 나가 있었다.

“라멜 공녀.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였는데.”

“네, 네! 황후 폐하께 드릴 유리 세공품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황후가 생각보다 더 근사한 사람이라 하마터면 목적을 잊을 뻔했지만, 라멜은 얼른 테이블 위로 직접 상자를 열어 세공품을 보여 주었다.

라멜의 선물을 확인한 황후는 흡족하게 찬사를 늘어놓았다.

“고마워요, 공녀. 독특하면서도 섬세한 감각이 있어. 조각가의 사랑스러운 감성이 전해지네.”

“헤헤.”

엄마인 리셀이라면 예쁘다거나 비싸 보인다고만 말하는데, 저렇게 유려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단순히 예법과 인사말에 따라 차를 대접하는 행위도 우아해 보였다.

“차향이 좋으니 천천히 들어요. 동방에서 수입한 차인데, 발효도가 높아 색도 선명하고 꽃잎도 그대로 보존한 채 띄워 젊은 여성들이 좋아하더군요.”

“가, 감사합니다.”

황후가 엄마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푹 빠져든 라멜이 은색 눈을 반짝이며 황후궁 응접실에 걸린 그림을 흘긋 바라봤다.

그러자 아렌다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는 설명했다.

“센즈 왕국 화가가 그린 그림이야. 두 세기 전 모험 소설에 영감을 받아 그렸다고 알려졌지.”

조곤조곤하고도 고상한 목소리였다. 한때 리셀처럼 평민이었는데도 어쩜 저렇게 차이가 날까? 라멜은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엄마도 저런 사람이면 좋을 텐데.’

홀린 듯 황후의 말을 경청하는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해졌다. 황후는 반할 만한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늘어놓다가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셀 공작 부인은 좋겠군요. 이렇게 귀여운 딸이 있었다니.”

“귀, 귀엽다뇨.”

“후후.”

그들의 사담은 곧 귀족들의 단골 주제로 넘어갔다.

“공녀도 성인인데 혼담을 나누는 상대가 있나요?”

“아, 아직 없습니다.”

“그럼 관심 있는 쪽은? 크로덴 공작도 영애들에게 인기가 많을 텐데.”

라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말하지 않았는데 알아차릴 정도로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하니 황후가 더 좋아졌다.

물론 아렌다는 다 알던 사실이었다.

이전에 무도회에서 라멜이 무안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귀족 영애들이 에카르트에게 갖는 지대한 관심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황태자의 결혼 상대로는 아깝고. 블랑세를 에카르트와 결혼시킬 명목은 없으니. 잘 구워삶으면 충직한 말이 되어 주겠지.’

“그래요. 내가 자리를 주선해 보죠. 철혈의 공작이라는 그도 황실의 명령은 들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라멜은 에카르트와 자리가 마련되는 것보다도 황후에게 예쁨받는 기분이 들어 신이 났다.

‘황후 폐하께선 좋은 분이야.’

그리하여 그녀의 인정 욕구는 엉뚱한 데로 흘렀다.

***

나와 에카르트는 미리 약속한 시일에 정확히 마차를 타고 수도 황궁으로 들어왔다.

사실 에카르트가 황후를 만나기 위해서 썼던 편지는 결투장과 다름없어서 한번 적당한 수정을 거친 후 편지를 전달하였다.

여전히 웅장한 건축 양식과 화려한 기둥은 시선을 사로잡았다. 보면 볼수록 처음에 보지 못한 눈에 잘 안 띄는 부분의 무늬까지 섬세한 것이 느껴졌다.

마차 창문 너머로 황궁을 빤히 보자 그가 내 손을 붙들고 말했다.

“엘린. 황궁이 마음에 듭니까?”

“그럼요. 규모가 크다 보니 저도 모르게 관찰하게 돼요.”

“그럼 공작성도 증축하지요. 그래도 마음에 안 차면 황궁을 탈환하고 우리 보금자리로 삼읍시다.”

나는 이 남자가 어느 날 불쑥 황궁을 선물하기 전에 미리 단호하게 말하기로 했다.

“아니. 저는 공작성이 더 좋아요.”

“그러십니까?”

“그럼요.”

“얼마나 좋으시지요?”

대충 대답했다가 사달이 나기 전에 에카르트를 만족시키는 말을 생각해 봤다.

“음.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예전에 그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제법 흡족한 대답이었는지 그가 싱글벙글 웃었다.

이윽고 황후궁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아렌다의 시녀 한 명이 공손히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크로덴 공작님, 시엘리나 공녀님.”

그녀의 이름은 메리 오펀. 남작 부인이었다.

메리는 우리를 곧장 응접실로 안내했다. 문을 열자 응접실 안은 이미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뭐야?’

순간 잘못 찾아온 줄 알았지만 아렌다는 한 번쯤 가문의 이름을 들어 본 귀부인들과 함께 모여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그들은 웃음을 멈추고 나를 은근슬쩍 위아래로 훑었다.

‘보고 싶으면 보든가. 크로덴 공작께서 선물한 희귀한 보석으로 장식한 드레스다.’

나는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들어 올려 아렌다에게 인사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자 아렌다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오늘 보기로 했죠. 중요한 일이었을 텐데 나도 바빠서 그만.”

“벌써 깜빡깜빡해서야.”

에카르트가 내 옆에서 대놓고 비꼬았고 나는 속으로 장하다며 칭찬했다. 분명 이 시간에 불러 놓고 이딴 식으로 같잖게 무시하려고 들다니.

그녀의 전적을 아는 나로서는 다분히 고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렌다가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귀부인들은 알아서 눈치를 채고 물러갔다.

“자리가 정리될 동안 함께 걷지.”

***

황후는 우리를 근처의 온실로 안내했다. 반투명한 특수 막이 지붕처럼 덮여 있어 식물이 살아갈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북부에도 이런 마법을 설치하면 겨울에도 온대 작물을 재배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만한 마정석 양을 구하기 어려운 데다 지나치게 마수 출몰이 잦아 북부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게 문제였다.

흥미롭다는 듯이 내가 온실을 쭉 둘러보자 에카르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엘린. 공작성에도 온실을 지읍시다.”

이러다 내 눈길이 닿는 게 무엇이든 줄 기세였기에, 조용히 “지금도 좋아요.”라고 답하며 진정시켰다.

그러자 그의 귀가 확 붉어지더니 가볍게 신음하고선 굵고 긴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 넘겼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사담을 나누는 사이 앞서 걷던 황후는 붉은색과 분홍색 꽃무리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의 옆모습은 마치 초상화 한 점처럼 우아했다.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나팔꽃처럼 생긴 임파첸스 꽃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임파첸스는 흔하지만 꽃을 오래 피워서 좋아하지.”

“네. 아름답네요.”

그녀는 미소 짓고는 보라색 꽃 여러 송이 모인 길로 앞서 걸었다.

“이건 디기탈리스. 잘 알겠지만.”

성전에서 배우기로는 독성이 있어 위험한 식물이었다.

아렌다는 그다음에도 은방울꽃처럼 독성이 있거나, 꽃말이 무시무시한 품종 몇 가지 보여 줬다. 일부러 이런 것만 의도해서 보여 주는가 하는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온실은 1년 내내 꽃이 만개한다는 이야기. 들어 봤지?”

“네.”

“꽃이 지면 바로 다른 종으로 교체하거든. 좋아하는 꽃이 있다면 오래 봐 둬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노을화를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 꽃잎 안쪽은 금색이고 바깥은 붉은색으로 은은한 그라데이션이 지는 품종이었다.

에카르트가 언젠가 나를 닮았다고 선물한 꽃.

“꽃이 진 후에 더 아름다운 식물인데요.”

황후가 묻지도 않은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는 건 예법과 다소 어긋난다. 하지만 간접적인 협박처럼 느껴졌기에 그대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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