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73화 (73/115)

#73화

“감성적인 부분이 있네.”

“…….”

“귀여워라. 이제 응접실로 돌아가죠. 지금쯤이면 다 정리가 되었을 거예요.”

상황과 맞지 않는 황후의 품평에 나는 영 찜찜한 기분으로 온실을 나섰다.

“같이 들어가고 싶습니다.”

에카르트는 접견실까지 따라 들어오려고 했지만 나는 만류했다.

황족에게도 스스럼없이 말하는 그의 성격상 둘이 만나 봤자 사태가 악화될까 심히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접견실에는 황후가 미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차 한 잔을 내주며 말했다.

“동방에서 수입한 홍차랍니다.”

차를 마셔 보니 알싸한 맛이 느껴졌다. 원래 이런 맛인지는 몰라도 손님을 대접하려는 용도로는 좋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차향이… 독특하네요.”

“시간이 지나면 떫은맛이 제법 강하게 우러나지요.”

이쯤에서 물러나라는 노골적인 뜻이리라. 나는 그녀의 노골적인 경고를 무시하고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황후 폐하. 다름 아니라 황후 폐하의 이름으로 황금 버섯 대신 황색 버섯을 받았습니다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어머. 유통 중에 섞인 모양인데. 책임자를 벌하고 새로운 재료로 보낼게요.”

이런 식으로 꼬리를 자른단 말이지. 그녀는 사과할 생각은 단 하나도 없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고 했다.

“재료를 수급하다 보면 문제도 생기는 법 아니겠어?”

“물론 그렇지요.”

나는 차를 완전히 마신 후 덧붙였다.

“하지만 별의 꽃을 연구하는 치료법도 허가하지 않을 만큼 공작님의 안전을 염려하였는데, 이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생기면 안 되지요.”

내가 모순을 지적하자 황후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공녀는, 동생과 다른 의미로 귀엽군요.”

나는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라멜과 황후 사이에 접점이 있었는지 떠올려봤지만, 딱히 짚이는 바는 없었다.

“젊음이란 좋은 거지요. 내가 공녀의 나이였을 때가 생각나.”

그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황후의 시선을 그대로 거리낌 없이 마주 봤다.

시엘리나가 황후를 대면하는 동안. 에카르트는 응접실 앞을 충직한 개처럼 지켰다. 마침 복도를 지나던 다비온은 그와 마주쳤다.

“에카르트.”

“황후가 재료를 잘못 보냈더군.”

다비온은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에 미안해서 말문이 막혔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

“몰랐다고? 공녀를 화나게 하지 마.”

에카르트는 저에 대한 경고가 아닌 시엘리나에 관한 경고를 하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네 어머니니까 더 잘 알겠지. 공녀가 부탁한 재료는 단 한 가지. 황후가 그 하나를 실수할 사람이 아니야.”

“…….”

“주변에 남을 사람도 정하지 못해서야 어떻게 황위에 오르겠나.”

에카르트는 황태자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그러고는 시엘리나가 접견실에서 나오자 누가 데려가기라도 할세라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시엘리나와 다비온이 가볍게 목례를 나누자 손을 잡은 힘은 더 강해졌다.

“살살 잡아요. 잡아먹겠어요.”

“그래도 됩니까?”

“참 한결 같으셔라.”

그녀는 그러면서도 손을 빼지 않았다. 둘은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걸어갔다.

***

사흘 후. 황태자 다비온이 다시 공작성에 찾아왔지만, 그의 방문을 에카르트는 반기지 않았다.

“돌려보냅시다.”

“아뇨. 어서 응접실로 모셔요.”

“그 여자 아직 공작성에 있습니까? 이참에 둘이 만나게 하지요.”

“그건 블랑세가 원해야죠.”

결국 다비온을 응접실 안으로 데려왔다. 에카르트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차를 내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대신 하녀에게 무난한 차를 부탁했더니 그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공작성이 익숙해지신 것 같아서 좋습니다. 주인 같아서 기쁘군요.”

“안주인… 말이에요?”

“마음에 드는 거로 하십시오.”

에카르트는 앞에 다비온이 있다는 것도 잊은 모양이었다. 다비온을 바라보니 그는 덜 익은 감을 먹은 듯이 떫은 표정으로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며칠 전 에카르트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돌더군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혹시 반역한다고 했어요?”

내가 에카르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만약 허튼소리를 했다면 먼저 사과하라고 할 생각이었다.

“아뇨. 언제까지 황후에게 휘둘릴 건지 물어봤을 뿐입니다.”

에카르트가 나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다비온의 귀에 들리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는 게 재밌어서인 듯했다.

‘빙빙 돌려서 말하지도 않았구나.’

나는 에카르트답다고 생각하고 다시 다비온의 말을 경청했다.

“이번에는 어머니께서 만남을 주선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에카르트와 라멜 공녀의 만남이죠.”

“…그 애도 참 징하네요.”

“두 가문 모두 현재 공식적으로 교제 중인 상대나 혼담을 나누는 상대가 없으니, 거절할 명목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자 에카르트가 같잖다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반쯤 죽이면 된다, 대충 그런 거겠지.

“거절할 명목이라면?”

나는 그의 생각의 흐름을 끊기 위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리고 진정하라는 의미로 에카르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쳐 올렸다.

“제가 두 분이 비공식적으로 교제 중이라는 정보를 흘리겠습니다.”

“공녀와 내가?”

“저와 공작님이요?”

어느샌가 에카르트는 손을 뒤집어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다비온에게 신중히 말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네 행동을 보면 그럴 필요 없어 보이는데.”

“엘린은 어떻습니까?”

다비온의 말을 무시하고 에카르트가 내게 물었다.

사귄다. 그 말에 싫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떨리고 마음이 붕 뜨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전에. 나는 에카르트에게 다시 속삭이며 말했다.

“블랑세와 먼저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요.”

“그 여자와 정말 무슨 사이죠?”

“여태 셋이 함께했으니까요.”

“그럼 이 기회에 우리 둘만 다녀도 좋겠군요.”

“말 좀 예쁘게 하세요.”

“여기서 얼마나 더 예쁘게 합니까.”

다비온은 우리의 대화를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신기하다며 말했다.

“에카르트가 고분고분하다니. 고대 용을 길들이는 일보다 어려운 줄 알았는데 정말 놀랍군요.”

그러자 우리 마검의 지배자께선 무서운 눈빛으로 황태자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나와 손을 잡지 않은 반대편 손가락으로 다비온을 가리켰다가, 일직선으로 긋는… 시늉을 했다.

“에카르트!”

“이런. 화내지 마십시오. 별 뜻 아니었습니다.”

“그, 그럼, 내일 다시 올게.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지?”

다비온은 에카르트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헬라의 안내를 받고 나갔다.

둘만 남은 응접실. 에카르트는 시엘리나를 지긋이 보며 싱긋 웃었다.

“그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까?”

“네.”

“그럼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면 오십시오.”

그가 대기한다면 신경 쓰여서 오래 대화를 나누진 못할 텐데. 아무래도 그걸 노린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는 문제가 있냐는 듯 천연덕스러운 눈빛이었다.

***

“그래서 사귄다고 공표할까 하는데.”

나는 블랑세의 방을 찾아 다비온과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시엘. 망설이는 이유가 있어? 네 생각은 어떤데.”

“나는….”

여태 그가 신경 쓰였고 괴로워하면 나도 마음이 아팠다. 때론 도망치고 싶더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가끔씩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더 이상 두려움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에카르트는 이전에 블랑세의 백마법에 집착하다가 삶을 파괴했다.

그리고 블랑세가 그것을 기억하는 와중에.

‘내가 에카르트와 사귀어도 괜찮을까? 그렇게 자신에게 집착한 사람이 이번엔 나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블랑세의 마음은-’

그런 생각이 들어 선뜻 답하지 못하자 그녀가 먼저 말했다.

“그때, 아니 예전에 공작님이 내게 했던 행동. 나를 위한답시고 한 일들.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해?”

“응?”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게 사랑이 되어서는 안 돼.”

“…그렇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블랑세는 미소 지었다.

“시엘. 사람은 어떤 일을 겪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따라 나뉘는 거야. 너는 원래의 시엘리나뿐만 아니라 나와 에카르트까지 새로운 사람이 되게 했어.”

“내가?”

“맞아. 그러니 우리, 이번 생의 인연을 소중히 하자. 공작님과 사귀어도 괜찮아.”

“블랑세.”

“그리고 네 결혼은 어차피 나와 하면 돼.”

“결론이 또 그렇게 되는구나.”

블랑세는 나와 에카르트의 교제에 대해 내 마음을 따르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다비온에 대한 마음을 정리했는지 궁금했다.

“블랑세. 이전 생에서 다시 이어 가고 싶은 인연이 있다면… 돕고 싶어.”

내가 누구를 말하는지 그녀는 쉽게 알아차리고는 웃었다.

“일단 지하의 비밀을 먼저 풀어야지.”

“그렇긴 한데.”

“시엘. 다시 말하지만 나한테 부담 느낄 필요 없어. 나 못지않게 너도 부담감을 느껴 왔겠지. 이제는 우리 둘 다 행복한 길을 만들면 돼.”

그녀의 눈동자는 맑고 결단력 있으면서 부드럽고도 강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말했다.

“블랑세. 내 행복 중에 너의 행복도 있어.”

“너를 만나서 기뻐, 시엘.”

나는 블랑세와 이야기를 마친 후 다시 응접실로 향했다. 문과 가까워지자 안에서 뭔가 우당탕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오셨습니까?”

문을 열자 태연하게 차를 따르는 에카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의 소란은 잘못 들은 건가 싶을 때. 그의 찻잔은 물이 넘치고 있었다.

“에카르트!”

에카르트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수건으로 대충 테이블을 닦고는 우아함을 되찾았다. 조금 상황이 정리되자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에카르트. 우리… 사귈어요? 헙.”

“네.”

발음이 꼬였는데 뭐라고 정정할 틈도 없이 에카르트가 순식간에 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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