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엘린. 이제 어떤 힘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그 작자가 말하기를, 당신이 제게 마법을 걸면서 연결되었다고 했죠. 저와 엮인 이상 당신은 어디도 못 갑니다.”
“…….”
분명 통제하지 말라고 했는데.
전에는 부담스럽게 느껴진 말이 이제는 내게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에게 집착당하는 것보다 그를 잃는 게 더 두려워졌다.
“알았어요.”
순순히 대답하자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군요.”
“그래.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때 블랑세가 창문을 열고 난입했다. 대체 왜 중간이 없는지 자포자기했지만 나는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엘린. 당신의 마음을 더 많이 알려 주면 좋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두렵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지 말해 주세요.”
“제가 바라는 건….”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단 하나였다.
“이대로 제 곁에 있어 주세요. 블랑세도.”
“정말 그거로 충분합니까?”
“아! 하나 더 있어요. 에카르트는 틈나는 대로 죽인다고 하지 않기. 블랑세는 불쑥 튀어나와서 놀라게 하지 않기.”
“반도 안 됩니까?”
“그건 상황에 따라서요.”
“알겠습니다.”
“응, 나도 이해했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이렇게 서로 맞춰 가는 걸까.
둘에게서 도망친 후에도 나는 해방감을 느끼지 못했다. 내 마음은 언제나 그들을 떠올렸으니까.
내가 생각하던 자유로운 삶보다 함께 있을 때의 행복이 더 컸다.
하지만 에카르트는 누군가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게 싫었다. 그는 시엘리나와 오직 일대일적인 관계가 되고 싶었다.
시엘리나의 울먹이면서 행복해하는 여린 어깨를 다독이면서도 에카르트의 손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순수하지 못한 생각이 들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시엘리나를 독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기 전까지 아니, 온전히 자신의 마음과 같아질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했다.
지난 세월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단언컨대 시엘리나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처음 겪는 이 감정이 그녀를 두렵게 하고 상처를 입힐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의 백마법에 집착하기만 해서는 과거에 땅딸보에게 했다는 짓과 다를 게 없었다.
자신은 진정으로 시엘리나를 사랑하니까 존중하고 배려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남들을 대하는 것과 달리 부드럽고 정중하게 아끼겠다고 에카르트는 다짐했다.
***
한편 에카르트는 다비온에게 신전 지하의 상황을 간략하게나마 전달했다.
“지하에 내 저주와 관련된 마법진이 있었어.”
“뭐?”
에카르트가 마치 거미줄을 발견했다는 정도로 담담하게 말했다.
“마수가 생겨나는 균열을 만들 정도로 위험하더군. 우리 공왕께서 일단 결계를 치고 그 정체가 뭔지 연구 중이다.”
“…에카르트. 부디 내가 뭐라도 돕게 해 줘.”
“당연히 네놈도 할 일이 있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각 구역의 군사력을 점검해. 어디 떠벌리거나 괜히 신전 근처에서 깔짝대지도 말고.”
다비온은 선뜻 에카르트의 말에 수긍했다.
시엘리나가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와중 자신이 나서 봤자 짐만 될지도 모른다.
군주의 할 일이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역할이라면, 더 이상 나설 일은 없었다.
시엘리나만큼 제국에 뛰어난 마법사가 있는지도 의문일뿐더러 친구의 저주와 관련된 이상 다른 사람에게 쉽게 언급해서도 안 되니까.
“알았어. 혹시 상황이 위험해질 경우 바로 군사를 배치할게.”
“그러든지.”
“결계 전문 마법사들의 실력도 점검하고.”
“그래. 난 이만 간다.”
마검의 지배자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용건만 전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가 문득 시엘리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다비온 전하께도 때로는 감사를 전하는 게 어떨까요?”
에카르트는 다비온이 자신을 염려하는 걸 알았다.
하지만 막상 고맙다고 말하려니 영 어색하여 최대한 덤덤히 말했다.
“고…생이 많군.”
“……?”
순간 들릴 리가 없는 단어들의 나열에 놀랐지만. 에카르트가 다시 말해 주지 않았기에, 다비온은 역시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
다음 날. 우리는 곧바로 신전 지하의 마법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에카르트, 블랑세와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소중하게 느껴졌다.
둘은 대부분 내 시선이 머무르는 거리에 있었고, 어느샌가 고개를 들어보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이전엔 시선을 회피할 때도 있었지만 이번엔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둘의 뺨은 붉어졌다.
“그러고 보니 에카르트의 저주는 더 이상 아프지 않나요?”
“네. 같이 있으니 정말 하나도 안 아픕니다.”
“그래도 진통제는 만들어야겠어요. 아프다면 제가 곧바로 원인을 파악해 보겠지만요.”
당분간 마법진 연구를 진행하면서 겸사겸사 그의 치료제도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자 에카르트는 “네?”라고 반문하더니 안절부절못했다.
“엘린. 나중에 저 미워하면 안 됩니다.”
“왜 미워해요? 저야말로 그때 더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니. 당신은 늘 최고입니다.”
항상 나를 추켜세우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한 후, 나는 진통제로 사용할 재료 목록을 적었다.
- 황금 버섯.
다행히 황족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니 다비온에게 달라고 해야겠다.
‘겸사겸사 블랑세에 대한 일도 해결하고.’
지금 블랑세는 황후와 관계가 정리되지 않고 공작성에 머무르기로 한 상태.
블랑세가 첩자 노릇을 그만둔다고 황후가 순순히 그러라고 허가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원인이 되어 주어야겠다.
“블랑세.”
“응?”
“진통제 재료를 구할 겸 황실에 다녀와야겠어. 내가 에카르트의 백마법사로 복귀한 걸 알면 너와 황후의 관계도 끝나겠지. 다시 엮이거든 여전히 공작님을 감시하는 중이라고 해도 되고.”
그렇게 해 둔다면 공작성에 있는 이상 안전한 데다 황후도 섣부르게 블랑세를 해코지하진 못할 것이다. 혹시라도 위험할 경우 내가 나설 테고.
“하지만 시엘이 위험해지면 어떡해?”
“그럼 그땐 네가 지켜 주면 되지.”
“그, 그런 말 아무렇지 않게 하기는!”
블랑세가 흠흠 헛기침을 하는 사이 에카르트가 기회를 잡은 양 냉큼 나섰다.
“엘린. 저 못미더운 인간 대신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예전보다 더 양심이 사라졌군요. 시엘에게는 공작님이 제일 못미더웠어요.”
둘의 말싸움이 커져 가기 전에 내가 깔끔히 결론을 내렸다.
“싸우지 마. 내가 둘 다 지킬 테니까.”
“엘린.”
“시엘.”
둘은 감격스럽게 말하더니 내게 치댈 정도로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왔다.
***
며칠 후. 나는 에카르트와 함께 황실에 도착했다.
다비온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미리 전했기에, 곧바로 황태자궁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황태자인 다비온에게 스스럼없이 요구하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도… 블랑세가 고생하고 제국이 멸망하던 원작 엔딩에 비하면 이쯤이야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 행적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군요.”
다비온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한숨이 묻어 있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어떤 결정을 하여도 안심하실 만큼 강해지겠습니다.”
“공녀… 공왕이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블랑세 양은 어떻게 되었죠?”
나는 다비온에게 블랑세가 황후를 만난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
물론 블랑세는 황후가 다른 심복을 심기 전에 나섰다고 해명을 마쳤지만.
그 사실을 그대로 전해도 되는지는 고민이 되었다. 다비온이 아무리 에카르트를 돕는다고 해도 제 어머니를 속였다는 사실까지 좋게 받아들일지는 의문이었다.
“…오해가 있던 것 같습니다. 크로덴 공작님과도 대화로 풀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다행히 다비온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전 생에서 서로를 아끼던 남주와 여주였으면서, 회귀 후에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다니. 홀로 그와의 추억을 간직해 왔을 블랑세를 생각하자 어딘가 씁쓸해졌다.
그런데 에카르트가 뜬금없이 다비온에게 명령했다.
“너. 블랑세 양을 만나 봐.”
“뭐?”
“네 취향일 거다. 눈도 두 개고 팔다리도 붙어 있어서 건강해 보이더군.”
블랑세를 황태자비로 만들어 내 근처에서 치우려는 속셈이다! 심지어 저렇게 형편없는 어필을 하면서 말이다.
“…….”
놀랍게도 다비온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넘겨짚는 대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내가 알아서 하지. 그보다, 공녀의 방문 목적을 먼저 말해 주시죠.”
“아아, 네!”
하마터면 오늘 황태자를 찾은 목적도 잊을 뻔했다. 나는 곧바로 에카르트의 치료를 위해 황금 버섯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황금 버섯이라. 크로덴 공작성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몇 마디 대화도 나누지 못했는데 에카르트는 다리를 꼬고 손가락으로 소파 손잡이를 톡톡 쳤다. 이야기가 다 끝났으면 이제 가자는 뜻이겠지.
내가 그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자 에카르트는 다 알겠다는 듯이 미소 짓고는 말했다.
“다비온. 공왕께 감사 인사를 들었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그게 아닌데! 주객이 더 이상 전도되기 전에 나는 에카르트를 잡아끌고 나왔다. 물론 그의 뻔뻔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엘린. 손잡고 걸읍시다.”
“황실…인데요.”
“네, 그러니까 잡아야지요. 제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저의 마법사가 되었음을 황후에게 보여 주려는 것 아닙니까?”
“손을 굳이 잡지는 않아도-”
에카르트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슬쩍 내 손을 잡고 앞장섰다.
마차가 있는 곳까지 걷는 내내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시녀들과 기사들부터 시작하여, 이전에 무도회장에서 흘긋 본 귀족들까지.
에스코트라고 부르기엔 너무 과한 자세였다.
우리는 그렇게 궁을 걷다가 황후와 마주했다. 나는 잡았던 손을 떼고 예법에 맞게 공손히 인사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어머, 시엘리나 공녀. 오랜만이네요. 공왕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황실에 무슨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