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왜 동쪽으로 안 가고?”
나는 의아함을 느끼고 물어보았고, 실라는 잠시 망설임이다가 이유를 말했다.
“도련님께서 마법을 연습하는 중이라고, 다른 하녀들에게 들었어요.”
도련님이라면 루솔릿 가문의 막내, 공작가 후계자 리타겠지.
어쩐지 정원에서 묘한 힘이 느껴지더라니 그 정체가 마법이었던 걸까. 나는 그의 실력이 궁금해졌다.
“걱정하지 마. 조금만 걷다가 올게.”
“괜찮으시겠어요?”
“응, 너는 먼저 방으로 가서 욕조 물 좀 받아 줘.”
나는 실라가 리타의 눈 밖에 날까 봐 먼저 보냈다.
그 후 홀로 정원으로 들어가 안쪽을 향해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붉은 머리에 은색 눈을 가진, 10대 중반의 소년이 보였다. 그가 쥔 지팡이 끝과 주변에 마력이 둥둥 떠다녔다.
‘이후에 마법 실력으로 원작에서 몇 번 언급된 조연이던가. 공작도 리타를 차기 가주로 점찍어 뒀고.’
그때. 리타가 나를 눈치챘는지 뒤를 휙 돌아봤다.
“해충.”
“…해충?”
“그래요, 당신. 차기 가주를 봤으면 인사를 하셔야죠. 위아래가 없습니까?”
목소리는 성가대원을 해도 될 정도로 상냥했는데 말뜻은 그렇지 않았다.
리타는 마주칠 때마다 늘 시엘리나를 굴복시키고 싶어 했고 그것에 우월감을 느꼈다. 그를 만족시키고 싶지 않던 나는 대충 손을 흔들어 줬다.
“그래, 안녕.”
“드레스 잡고 다시 하시죠?”
“인사 못 받아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나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리고 그를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내 앞에 미세한 전류가 느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함을 느끼고 멈춰 섰다. 무슨 마법인지는 몰라도 함정이 분명했다.
내가 멈춰 서자 간단한 문양의 마법진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전부터 짐작했지만 역시. 당신도 마력이 있었군요.”
“…….”
“뭐, 어차피 지팡이도 없고 고작 느낄 뿐 제대로 마법을 다루지도 못하는데 무슨 소용입니까? 이제 와서 관심이 생겨서 나를 염탐하던 거라면 관두세요.”
‘뭔 도끼병 같은 소리…. 아. 내게 마력이 있다고만 알지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는 모르는구나!’
별달리 대꾸하지 않자 수긍했다고 생각했는지 리타가 피식 비웃었다.
그는 천천히 내게 걸어오더니 내 구두를 꾹 눌러 밟았다. 그러고선 마치 벌레를 눌러 죽이듯 문질렀다.
“무례를 저지른 벌입니다.”
뭐 이런 꼬마가 다 있담. 나는 엄지와 중지를 동그랗게 쥐고 힘을 실었다.
“교육이 필요한 건 너 같은데?”
그리고 리타의 이마에 대고 있는 힘껏 딱밤을 날렸다. 리타가 이마가 붉어진 채 인상을 찌푸렸다.
“이 해충이!”
곧바로 주변에 마력이 모이는 걸 느낀 나는 그대로 몸을 피했다.
리타가 내게 다짜고짜 공격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다행히 비껴갔지만 귓가에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다. 피해도 그 위력은 어느 정도 느껴졌다.
“품행이 방자한데다 예법은 하나도 모르는군요.”
그는 어디론가 가더니 아니나 다를까 루솔릿 공작을 데리고 왔다. 능력과 성격은 달라도 이르는 건 남매가 똑같았다.
“아버지. 누님이 제 능력을 질투해 저를 폭행하려 들었습니다.”
“내가 언제.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을 뿐인데….”
나도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공작을 바라봤다. 물론 공작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못난 것! 리타와 라멜을 잘 챙겨야 공작가가 화목한 법이야.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군.”
‘그럼 시엘리나는 누가 챙겨 주냐?’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일단 화를 참고 답했다.
“네. 하지만 내리사랑이란 말이 있듯이…. 아버지께서 저를 잘 챙겨 주시면, 제가 사랑하는 동생들을 더 아껴 주죠.”
딱밤을 때린 것에 후회는 없었다. 세 사람의 악행은 적당히 참아 주는 거로 충분했다.
***
다음 날 점심 무렵. 실라가 내게 보고했다.
“공녀님, 라멜 님께서 2시까지 회의장으로 오라고 전하셨습니다.”
회의장이라니. 평소엔 시엘리나가 장녀임에도, 가문의 대소사나 영지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 그나마 가족 모임에 참석할 땐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자리만 지켰을 뿐.
“흐음, 무슨 이야기인지 들은 건 없니?”
“네, 저야 하녀일 뿐인걸요.”
나는 차를 마시다 말고 일어섰다. 시엘리나의 기억상, 이전에 라멜이 시간을 일부러 잘못 알려 준 적이 있었다. 당연히 모든 질타는 고스란히 시엘리나에게 향했고 말이다.
“그럼 지금 가자.”
“앗,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벌써요?”
이번에도 라멜이 제대로 된 시간을 알려 줬을 리가.
“일찍 가면 좋잖아.”
내 말에 실라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앞장섰다.
아니나 다를까. 회의장에는 이미 모두가 모여 있었다. 그래도 장소는 제대로 알려 준 게 다행이었다.
“앉거라. 때맞춰 왔군.”
중앙에는 루솔릿 공작이, 양측에는 라멜과 리타가 앉아 있었다. 라멜은 나를 보자마자 다급히 시선을 회피했다.
무슨 변덕인지 루솔릿 공작은 오늘따라 너그러워 보였다. 설마 이런 막장 가족이 벌써 회개했을 리는 없었고.
“오늘 너를 부른 건 네 혼담을 논하기 위해서다.”
“혼담요?”
“네, 누님의 혼인이요. 누님도 루솔릿 공작가의 일원이니 가문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마땅하죠.”
공작 대신 리타가 말했다.
‘이럴 때만 일원이라고 하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일단 초상화를 훑어보았다. 최소한 삼촌에서 아빠뻘로 보이는 데다가 작위도 자작 급인 남자였는데 무엇보다 돈이 많았다.
‘광산을 보유한 귀족이군. 그럼 결혼시키려는 목적은 단 하나. 지참금으로 뭔가 받는 게 있겠지.’
리타는 이미 내 혼인이 성사된 듯 말했다.
“신부 수업을 빠르게 배우면 무지렁이라도 몇 달 안에는 좋은 신부가 될 겁니다.”
원작에서 시엘리나의 약혼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에카르트에게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하지만 지금은 내가 공작가에서 호락호락 당하지 않으니, 적당한 곳으로 치우기로 정한 모양이었다.
이런 아저씨와 결혼하려고 빙의한 게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한쪽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었다.
“결혼 안 할 건데요.”
“누님. 이만한 혼처를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리타는 루솔릿 공작 앞에선 내게 꼬박꼬박 누님이라고 불렀다.
“뭐래? 이만한 돈줄 찾기 쉽지 않은 거겠지.”
물론 돈이 가장 많은 건 서브 남주 에카르트였지만, 당연히 그쪽은 접근하기가 어려웠을 터. 나는 남동생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정략결혼의 덕을 보는 것도 결혼 생활이 순탄할 때 얘기일 뿐. 결혼식부터 피바다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야!”
“불경한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군요.”
리타의 얼굴에 경멸이 어렸고 루솔릿 공작 역시 그러했다. 라멜은 초조하게 눈만 굴리며 둘의 눈치를 살폈다.
“멋대로 결혼시키면 남편 죽이고 도망칠 거야.”
조금 심한 말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경고해야겠지. 내가 회의장을 나감으로써 회의는 살벌하게 끝났다.
며칠 후 공작과 라멜, 그리고 리타가 나를 찾아왔다.
‘뭐지. 셋이서 같이 온 적은 처음인데.’
공작은 이번엔 다짜고짜 내게 고함을 질렀다.
“대체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것이냐! 회의장에서 막말을 할 때부터 알아봐야 했거늘.”
“네?”
“네 드레스룸에서 찾았다.”
그는 파란색 사파이어 목걸이를 보여 줬다. 시엘리나의 기억에도 없는 목걸이라서 공작에게 반문했다.
“…이게 뭔가요?”
“그저께 밤, 네가 영지 보석상에서 훔친 목걸이다.”
나는 그저께의 일을 떠올렸다.
실라의 도움을 받아 잠시 공작성을 몰래 나서서 다녀온 곳이 있었다. 이 막장 집안에 언제까지고 있을 순 없었기에, 나름대로 살아남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누명을 쓰게 되다니.
“저는 보석상에 얼씬도 안 했는데요.”
“발뺌해도 소용없다. 붉은 머리의 여자가 급히 보석상을 뛰쳐나왔다는 목격담이 있으니 말이다!”
적발은 극히 드물어서 루솔릿 공작 가문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증거로 삼아 나를 몰아세우기엔 너무 빈약했다.
“신뢰할 수 있는 증언인가요? 게다가 라멜의 머리색도 저와 비슷한걸요. 뭐, 리타도 가발을 쓰면 비슷하겠죠.”
“내 자식들을 끌어들이지 말거라!”
“하. 저도 당신 자식이에요. 그렇다면 목격자라도 만나게 해 주세요! 제 결백을 증명해야 공작가의 명예도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순순히 물러서지 않자 리타가 말했다.
“아버지. 누님은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아빠가 없을 땐 라멜을 매질했어요.”
“내가 라멜을 때렸다니 무슨 소리야?”
“왜 모르는 척하십니까? 라멜 누님, 소매를 걷어 아버지께 보여 주시죠.”
라멜은 굳은 얼굴로 망설이다가 소매를 걷었다. 팔이 새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상처를 가까이 보기 위해 다가서려고 했다. 티가 나는 자작극이었음에도, 공작이 나를 밀치고 라멜을 감쌌다.
“내 딸에게서 떨어지거라!”
“…….”
“네 어미도 신관 출신인 주제에 보석만 보면 눈이 뒤집혔지.”
나는 그때 깨달았다.
라멜의 친모를 공작 부인으로 올려 주기 위해 병에 걸린 체닐을 방치했듯, 내가 도둑으로 몰려도 일부러 방관하려는 거구나.
루솔릿 가문에 시엘리나의 자리는 없었다.
나는 허탈하게 웃고 공작과 라멜을 차례로 바라봤다.
“온 가족이 합심했군요. 리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리타는 아니나 다를까 잡아뗐다. 당연히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영악함이 기가 막혔다.
“뭐, 그래. 네 뜻대로 해 줄게.”
나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능력을 숨기고 사랑을 갈구하던 시엘리나가 아니었다.
“나도 사랑이 식었다는 이유로 부인을 죽인 아버지와, 사랑을 받기 위해 자작극을 벌이는 동생들과 함께 지낼 필요 없으니까. 뭐 유유상종이겠죠.”
“거, 건방진 것! 혼자 집을 나가 봤자 남은 일은 뻔하지. 네 어미처럼 남자를 꾀어낼 생각이냐!”
루솔릿 공작이 발끈했다.
시엘리나의 어머니가 내 친모는 아니었지만, 도저히 흘려 넘길 수 없는 헛소리였다.
이제 가문을 나가서 잘 먹고 잘살기 전에 짚을 건 짚고 가야지. 나는 넌더리 나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한쪽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우리 집은 개도 안 키우는데 왜 개 짖는 소리가 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