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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2화 (2/115)

#2화

낯선 곳에서 깨어나 내 모습에 의아해하고 있는데, 곧 하녀복을 입은 소녀가 들어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시엘리나 공녀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시엘리나?’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란 게 기억이 났다. 내가 사고로 죽기 전에 잠시 휴식 시간에 짬을 내어 읽은 웹소설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내가 <빛이 사라진 제국>의 악녀인가?

내 인상도 작가의 묘사와 완전히 일치했다.

동생들을 괴롭히며 집에서 행패를 부리고, 남주와 여주를 훼방하다가, 서브 남주에게 살해당하는 그 조연 악녀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하녀는 울상이 되었다.

“다이닝룸으로 모셔도 괜찮을까요?”

내가 괴롭힐까 봐 지레 겁을 먹은 건가….

“좋아.”

나 역시 서비스직의 고충을 알기에 일단 순순히 하녀를 따라가기로 했다. 그런데도 하녀는 내 눈치를 보며 느릿느릿 걸었다.

***

시엘리나가 사용하는 방은 내부에 작은 다이닝룸이 있는 구조였다.

다이닝룸에는 내 또래의 여자애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언니! 오늘은 안 늦었네?”

나와 길이가 비슷한 빨간색 머리카락이었지만 눈동자는 은색으로 달랐다. 누군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라멜 루솔릿. 루솔릿 공작 가문의 둘째였다.

이복 여동생인 라멜은 성력 없어도 성녀 같았다. 시엘리나가 못되게 굴어도 그저 홀로 눈물을 훔치며, 같은 자매인데도 인성이 대조되던 착한 조연.

“내가 언니 먹으라고 스프를 만들었어!”

라멜은 시엘리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가끔 직접 요리를 했다.

‘그때마다 시엘리나는 라멜의 요리를 집어 던지며 화냈지….’

하지만 빙의자인 나는 얌전히 앉아 그 스프를 맛있게 먹어 줄 생각이었다. 원작의 나쁜 성격을 고수해서 라멜과 마찰을 빚는 건 불필요했다.

책에서 표현된 것처럼, 무엇보다 라멜의 얼굴은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다.

고맙다고 말하며 의자에 앉으려던 그때. 나는 멈칫했다.

‘요리가 엉망이잖아. 도저히 먹을 수 있는 게 아닌데.’

빵 끄트머리에 곰팡이가 펴 있었고, 스프엔 정체불명의 건더기가 가득했다. 심지어 벌레도 들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했다.

“라멜, 이건….”

“내가 정성스럽게 한 요리잖아. 어서 먹어.”

그러나 라멜은 천사처럼 웃으며 나를 재촉했다.

<시엘리나는 라멜이 만든 파이를 집어 던졌다.

“가증스러운 년. 이딴 쓰레기는 너나 처먹어!”

“언니, 저는 언니가 좋아할 것 같아서 열심히 만들었는데….”>

나는 그 장면에서 시엘리나의 인성을 욕했다. 악녀답게 이유 없이 트집 잡고 라멜을 괴롭히는 줄로만 알았다.

‘쓰레기가 맞잖아! 이렇게 만들었으면 당연히 먹기 싫을 만하지.’

나는 작가의 묘사가 부족했던 걸 탓하며, 라멜은 마음씨가 좋지만 요리 실력이 부족한 타입이라고 넘겨짚었다.

하지만 혼자 다 먹을 자신은 없었다.

“고마워, 라멜. 그런데 배가 좀 부르네. 같이 먹을까?”

라멜의 표정이 돌연 싸늘해졌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뒤바뀐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미쳤냐? 내가 이걸 왜 먹어.”

“…라멜?”

“공작가에 꾸역꾸역 남아 있는 너 같은 벌레에게 딱 맞는 식사잖아.”

그녀가 은색 눈을 부릅뜨고 말을 이었다.

분명 원작에선 이런 성격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혼란스럽던 그때 원작에서 나오지 않은 시엘리나의 기억이 합쳐졌다.

라멜이 시엘리나의 침대에 죽은 쥐를 놓고, 일부러 옷을 찢어 망신을 주고, 탐나는 가구를 몽땅 가져간 기억.

심지어 루솔릿 공작은 라멜만을 사랑하고 시엘리나를 천덕꾸러기 취급했다. 그러면서도 성의 모든 고용인에게도 라멜을 잘 따르고 보살피라고 교육했다.

원작에서 악녀 시엘리나가 라멜을 싫어하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장난해? 이런 이야기는 원작에서 설명해야지!’

하지만 작가를 원망할 시간은 없었다. 라멜이 하녀에게 윽박질렀기 때문이었다.

“뭐해, 네가 어서 먹여!”

“고, 공녀님….”

하녀가 벌벌 떨면서 접시를 들고 내게 가져왔다.

‘저걸 내게 정말 먹이겠다니. 나도 원작처럼 음식을 집어 던질까?’

하지만, 하녀가 먼저 접시를 떨어뜨렸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바닥에 흩어져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야!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해?”

라멜이 씩씩거리면서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자,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예측이 갔다. 그래서 나는 하녀의 손을 붙잡고 슬쩍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라멜의 손이 하녀의 뺨을 내리치는 대신 허공만을 갈랐다. 그녀는 무게중심을 잃고 휘청였고, 나는 순간 새어 나온 웃음을 참았다.

“괜찮아?”

“네, 네-에.”

내가 묻자 하녀는 볼이 붉어진 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나를 돕기 위해 일부러 접시를 떨어뜨렸겠지.’

시엘리나의 기억을 되짚으면 이 하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미리 이불 위의 쥐를 치워 두거나 드레스 여벌을 준비하던 하녀였다. 라멜에게 따르는 척할 뿐. 다행히 똑같이 괴롭힐 생각은 없어 보였다.

“두고 봐!”

라멜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분했는지 씩씩거리다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하녀가 퍼뜩 정신이 들은 듯이 내 손을 놓았다.

“공녀님! 아까는 감사했어요. 어서 치워 드릴게요.”

“아냐, 지금 치우지 마. 보여 줄 사람이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라멜은 곧 희끗희끗한 연한 붉은 머리에, 후덕한 중년의 남자와 함께 등장했다.

바로 루솔릿 공작이었다. 라멜은 공작의 뒤에서 흐느끼며 하녀를 삿대질했다.

“아빠…. 언니 하녀가 제 음식을 집어 던졌어요. 저를 무시하는 게 틀림없어요.”

“어떻게 된 것이냐!”

앞뒤 가리지 않고 공작이 화부터 냈다. 나는 공작이 하녀에게 분풀이하기 전, 침착하게 상황을 보고했다.

“하녀는 음식을 가져다주다 놀라서 실수했을 뿐이에요. 보다시피 벌레가 들어가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라멜은 제 하녀를 때리려고 했죠.”

나는 바닥에 너저분하게 흩어진 음식을 가리켰다. 그런데도 공작의 태도는 가관이었다.

“이렇게 방구석이 지저분하니 벌레가 들어가도 모르겠지.”

깨끗하기만 한 자신의 방을 보면서 공작은 괜한 트집을 잡았다. 나는 시엘리나의 기억을 되짚어보며 말했다.

“…제 방 청소를 담당하는 하녀들도 라멜에게 배정했잖아요. 그럼 하녀들을 돌려보내 주시겠어요?”

“일손이 부족하다는 핑계는 집어치워라. 주인이 이 모양이니 하녀라고 제대로 되었겠느냐. 틀림없이 맞을 짓을 했겠지!”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게다가 음식이 바닥에 떨어져 형태가 엉망이 됐어도, 애초부터 먹을 만한 게 아니라는 견적이 나오는데. 그저 라멜에게 유리한 대로 끼워 맞출 뿐이었다.

‘공작은 라멜의 실체를 알고도 사랑하나 보군.’

나는 일단 적당히 넘어가서 하녀를 먼저 보호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하녀는 저의 전속 하녀니까 제가 책임지고 잘 교육할게요. 그리고 라멜.”

그리고 라멜에게 안타깝다는 듯이 연기했다. 상황에 따라서 착한 척하는 건, 라멜뿐만 아니라 나도 할 수 있었다.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었는데 이 정도쯤이야 껌이지.’

“대신 사과할게. 아까는 나도 정신이 없어서 말이야. 기껏 만들어 왔는데 많이 속상했겠네.”

라멜은 내가 고분고분한 의도를 짐작하려는 듯했다. 물론 그대로 사과만 하고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다음엔 내가 요리해 줄게. 네가 만든 것처럼 정성스레 말이야.”

“…뭐?”

“사양하지 말고 맛있게 먹어 주면 좋겠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경고였다. 나는 그날 빙의하자마자 찾아온 위기를 일단은 넘겼다고 생각했다.

그날. 시엘리나의 기억이 완전히 떠오르며 원작에서 몰랐던 능력을 알게 되었다.

‘시엘리나에게 순도 높은 성력과 상당한 마력이 있었어.’

시엘리나의 친모 체닐은 신관이었다.

그런데 신전 행사에 참석한 루솔릿 공작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루솔릿 공작은 아름다운 체닐과 결혼하기를 원해 온갖 달콤한 말로 그녀를 꾀어 신전을 나오게 했다.

그렇게 체닐은 공작 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공작은 체닐이 임신하자 다른 여자들과 만남을 즐겼지.’

어린 시엘리나는 아버지의 외도를 지켜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체닐은 백마법이나 의술로도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렸고, 루솔릿 공작은 일부러 그녀를 방치했다.

이미 볼 장 다 본 체닐이 죽는다면 새로운 공작 부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체닐은 공작성에서 외롭게 숨을 거둔다.

그 뒤 시엘리나는 제가 마력과 성력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러나 그 사실은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금색 눈동자라니. 죽은 계집과 똑같이 생겼군.”

“그렇게 사근사근하지 못하고 애교 없는 성격은 네 어미를 닮은 거냐?”

“네게 줄 재산은 단 한 푼도 없다! 그년처럼 사치스럽게 살 꿈은 꾸지도 말아라.”

지금도 제가 엄마를 닮았다고 싫어하는데 내쳐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시엘리나에게 공작은 하나 남은 가족이자 절대적인 존재였다.

‘아버지에게 거슬리기 싫어서 능력을 숨기고 살았다니!’

그녀의 마력은 원작의 여주인공, 블랑세보다 많은 양이었다. 게다가 시간 흐름상 남주와 여주를 만나기 전이었다.

‘이 마력을 활용하면…. 시엘리나가 죽는 원작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

나는 방에 틀어박혀서 기초적인 마법을 탐구하는 데에 집중했다.

다행히 집 안에 마법이나 신력에 관한 책들이 많이 존재했기에 한결 수월하게 알 수 있었다.

원래의 시엘리나가 어떻게 됐는진 알지 못해도, 그녀의 몸에 빙의한 이상 최대한 잘 살아남기로 했다.

며칠간 공작성에서 얌전히 지내는 동안, 나를 도와줬던 하녀와 좀 더 가까워졌다. 그녀의 이름은 실라였다.

“그래서, 나중에 약초학을 배우고 싶어요. 동방 의학으로 유명한 한나 님도 만나 뵙고요!”

“그렇구나.”

실라는 아직 공작성에 빚이 남아 열심히 돈을 모으는 중이라고 재잘거렸다.

시엘리나의 기억상 이렇게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었는데, 내가 라멜에게서 보호한 후로 부쩍 말이 많아졌다.

나는 실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원을 걸었다. 공작성 정원은 식물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넓었다.

그런데 실라가 평소에 산책하던 곳과 다른 정원으로 안내했다.

“공녀님. 서쪽 정원으로 가시는 건 어떤가요? 꽃이 예쁘게 피었거든요.”

“…왜 동쪽으로 안 가고?”

나는 의아함을 느끼고 물어보았고, 실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유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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