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우리 집은 개도 안 키우는데 왜 개 짖는 소리가 날까요?”
“뭐?”
“개는 귀엽기라도 하지. 당신은 병든 아내를 캄캄한 방구석에 방치하고, 친딸이 도둑으로 몰려도 외면하는 무능한 남자에 불과해요.”
“무능? 감히 공작인 내게 무슨 소리를!”
공작은 내 뺨을 내려치려고 했지만 나는 그의 손을 휙 피했다. 이전에 별의별 진상과 몸싸움이 붙었을 때도 있어서, 기본적인 호신술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공작을 내버려 두고 유유히 문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저, 저년을 잡아! 오늘이야말로 똑바로 교육시켜 줘야겠다.”
공작이 큰 목소리로 침을 튀기며 내게 삿대질했다. 공작의 명령에 어려 보이는 기사 두 명이 내 앞을 막아섰다.
“공녀님. 그대로 멈추십시오!”
“비켜. 누구한테 명령이야?”
내가 으름장을 놓았다. 기사들이 순간 흠칫했지만, 이내 곧바로 칼을 빼 들었다.
천대받기는 해도 공녀인 내게 정말로 검을 겨눌 줄이야. 나는 놀랐지만 얕잡아 보이지 않도록 애써 태연한 척했다.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나는 시엘리나의 힘을 믿어 보기로 했다. 빙의한 후 며칠간 방에 틀어박혀 마법을 연습한 데다가, 마력이 많아 지팡이 없이도 기본적인 마법은 사용할 수 있었다.
즉 어린 기사 둘을 겁주기엔 충분한 실력이었다.
“막아 보든가.”
“네?”
내가 손끝에 힘을 집중하자 흰색으로 반짝이는 마력이 손끝에 모여들었다.
“무슨! 지팡이도 없으면서 마법을?”
“그, 그건 도련님도 불가능한데….”
기사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내 마력은 커다란 구체 형태가 되어 기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둘은 양옆으로 급하게 마법을 피해 보려다가 넘어졌다.
“뭐하는 겁니까!”
리타가 지팡이를 들어 내게 겨눴다.
하지만 나는 그전에, 리타가 이전에 내게 사용한 마법 장벽을 똑같이 복제해 냈다. 리타의 지팡이는 그대로 마법진에 흡수되었다.
“대, 대체….”
“이런 인재를 그동안 몰라봤다니 유감이네.”
나는 가족들의 얼어붙은 표정을 잠시 감상했다.
그리고 그들을 뒤로한 채 가볍게 문을 열어젖히고 나왔다. 실라가 계속 문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는지 깜짝 놀랐다.
“공녀님, 괜찮으세요? 큰 소리가 들리던데!”
“응, 멀쩡해.”
나는 공작성 입구로 향했고 그녀가 나를 졸졸 따라왔다.
“…아까 어떤 분이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하셔서 받아 왔어요.”
“그래? 보여 줘.”
“여기요.”
내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손으로 편지를 뜯었다.
“아.”
편지를 읽고 미소가 지어졌다. 예상은 했지만 직접 읽으니 더 기쁜 내용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구나. 직접 대답을 들으러 갈 참이었는데.”
그렇게 말해도 실라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녀는 내가 잠시 공작성을 떠나도록 망을 봐줬을 뿐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으니 말이다.
‘그래도 지금 모든 걸 설명할 순 없지.’
나는 빠른 걸음으로 공작성 입구까지 도착했고 실라에게 작별을 고했다.
“실라, 나는 여길 떠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야. 동방이든 어디든 너도 이곳을 떠나렴.”
“네? 하지만… 빚이 있는걸요.”
“그 문제는 곧 해결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나는 몸을 의탁할 곳에 도착하면 실라에게 약간의 돈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럼 그녀도 일을 그만두고 동방으로 유학갈 수 있겠지. 제국을 떠나는 게 실라에게도 좋을 터였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를 도와준 사례는 하고 싶었다.
“고, 공녀님.”
“그럼 잘 지내. 고마웠어. 안녕!”
나는 실라를 남겨 두고 그대로 공작가를 떠났다. 공작성과 멀어진 나는 손에 쥔 종이를 다시 펼쳐보았다.
<성력 최우수.
이하 물, 불, 바람, 빛, 토양, 초목, 금속 마력 속성 모두 우수.
마력값 전체 석차 2위.
귀하는 백마법사 적성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렇다. 나는 며칠 전 몰래 공작성에서 빠져나와 수도에 있는 성전으로 가 백마법사 적성 시험을 치렀다.
그것도 내 실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않고도 2위가 되었다. 성전 도장이 찍힌 종이는 그 결과지였다.
이런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면, 장르가 피폐물이라도 잘 살아남을 수 있다!
절대 악녀 따위로 죽지 않겠다.
이왕 이 몸으로 살아났으니 끝까지 살아남으리라!
원작 따위 개나 줘 버리라지 뭐!
***
내가 막장 집안을 바로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데에는, 가주가 이미 리타로 정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빛이 사라진 제국>의 내용을 떠올려 보면…. 제국에 남아 있다간 어찌 됐든 다 같이 죽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제국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게 무슨 소용이랴!
‘전부 흑막 서브 남주 때문이지.’
서브 남주 에카르트는 크로덴 공작가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마검을 다룬다. 그런데 마검의 저주 때문에 지독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은 단 하나.’
백마법사가 마력을 나눠 주고 주기적으로 치유하는 것이었다.
여주 블랑세는 수습 마법사였는데, 그녀는 다친 에카르트를 우연히 발견하고 치료해 준다.
블랑세의 치유 효과는 다른 백마법사보다 뛰어나서 아니, 그에게 찰떡으로 딱 맞아서 에카르트는 처음으로 평온함을 느낀다.
그 후 에카르트는 블랑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관심은 점점 집착으로 발전해 그녀의 앞길과 자신 사이에 방해되는 세력을 뒤에서 살해한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백마법사의 길을 택한 블랑세는 그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나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다니….”
블랑세는 자괴감 때문에 빛의 성전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블랑세가 죽자 에카르트는 제국을 무너뜨리는 흑막이 된다.
그를 고통스럽게 하던 검의 저주가 달콤한 말로 그를 집어삼킨 것이다.
“블랑세가 없는 세상을 굳이 지킬 필요가 있나?”
저주의 힘에 삼켜진 에카르트는 흑화하여 자신을 설득하는 모든 주요 인물을 몰살한다. 그리고 남주인 황태자까지 그의 손에 죽는다.
설상가상 마수가 쏟아져 제국군이 무너지고 까마귀가 하늘을 덮으며, 에카르트 역시 어둠으로 침잠하는 피폐한 내용이었다.
이렇듯 원작은 피폐에 주인공들 몰살 비극으로 엔딩을 맞는 새드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작품은 상당히 빛을 보기 힘든 장르였는데도, 내 인생보다 피폐하겠냐는 마음으로 결말까지 읽은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에 빙의하게 될 줄 알았으면 무조건 평화롭고 행복한 소설만 읽었지….’
어쨌든 그 피폐함은 도저히 내가 막을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라, 섣불리 원작에 끼어들거나 뭔가를 바꿀 생각이 없다.
‘물론 블랑세에게 나중에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지 말라고 조언 정도는 해야지.’
하지만 여주를 막는다고 해도 해피 엔딩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공작성에서 라멜을 보고 깨달은 결과, 원작과 다른 여러 변수가 존재했으니까.
블랑세와 에카르트의 기분에 내 목숨을 맡기는 것보다 안전한 방법이 있었다.
바로 최대한 빨리 제국과 이 주인공들 주변에서 멀리 떠나는 것이다.
절대로 얽히지 않도록!
***
백마법사를 양성하는 기관, 빛의 성전.
수도에 있긴 하지만 서쪽 외곽과 가까이 닿아 있어 루솔릿 공작령과 마차로 열 시간쯤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시험을 치르고 입사하게 되었지만 성전의 규칙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외출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고, 따로 사치품을 구매하는 것도 금지며, 기상 시간과 하루의 일과가 엄격히 정해져 있었다.
말이 백마법사지 성직자 코스와 똑같았다.
그래서 처음엔 공작가를 나온 나를 두고 수습 백마법사끼리 이런저런 추측이 오갔다.
“부유한 공작가에서 자란 공녀님이 백마법사가 된다고?”
“부를 누리며 편히 살아도 될 텐데 어째서 고된 길을….”
모르는 소리! 내가 빛의 성전에 온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성전에서 3년간 수습 기간과 실습 활동을 마치면 증명서가 나온다. 말하자면 학위 같은 거였다.
그 종이 한 장만 있다면 어느 왕국이든 나를 받아 줄 것이다.
물론 백마법사는 병사의 생존을 좌우하는 전력이었다. 하여, 국가 소속으로 들어가 엄격하게 관리되거나 타국으로 갈 시에는 전쟁에 관여하는 건 금지였다.
그러나 다 꼼수가 있었다.
‘돈 많은 귀족들은 전담의를 두듯 백마법사를 고용하니까. 개인 간 계약은 가능해.’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면 망명도 가능할 터.
하지만 성전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문제가 생겼다.
성스러운 하얀색 머리카락에 맑은 파란색 눈동자. 여리여리한 체격까지 청순 그 자체인 내 룸메이트는….
블랑세 비바체. 바로 소설 속 여주인공이자, 마력값 1위를 차지한 먼치킨이었다.
블랑세는 갓난아기일 때 신전에 버려져 신관들에게 키워졌다. 그랬기에 신전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수습 신관으로 조용히 살아왔다.
그러나 묵묵히 기도하는 대신 백마법사가 되어 사람들을 직접 돕고자 빛의 성전에 들어왔다.
‘수습 동기가 스무 명은 넘으니 나와 같은 방을 쓸 확률은 아주 낮았는데.’
“…시엘리나 공녀?”
블랑세도 놀랐는지 짐을 정리하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나는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저를 아시는군요.”
“아, 네. 예전에…. 공작님과 함께 신전에 오셨을 때 봤어요. 제 이름은 블랑세입니다.”
“아하.”
블랑세는 내가 공녀라서 대하기 어려워하는 듯했다.
내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블랑세가 쭈뼛거리다가 손을 잡았다.
“반가워요, 블랑세. 말 편하게 하세요.”
“그럼, 시엘이라고 부를게.”
“…그래.”
이렇게 쉽게 애칭을 만들어도 되는 건가.
그 후 블랑세는 내가 공부할 때 슬쩍 기웃거리더니.
“시엘, 같이 밥 먹자.”
어느샌가 나와 식사도 함께하고 수업도 같이 들으며 늘 근처를 맴돌았다.
‘어차피 나중에 제국을 떠나면 알아서 관계가 정리되겠지.’
나는 내심 아직 원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으니,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다고 편히 생각했다.
같은 방을 쓰게 된 지 일주일째 되는 밤.
나는 잠들었다가 도중에 깼다. 그런데 옆 침대에 있어야 할 블랑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졸린 눈으로 찾아보니, 블랑세는 창가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이 방은 가장 꼭대기 층이다. 원작에서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던 순간이 왜 지금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막아야 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블랑세, 죽으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