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누구도 에카르트 크로덴을 막지 못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과 이글거리는 루비색 눈동자가 악마 같았다. 넓은 어깨를 덮은 망토 자락이 피로 젖었고 허리춤의 마검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젊고 잘생긴 공작, 마검의 지배자, 제국의 수호자!
전부 그의 수식어였다. 그는 빠르고 넓은 보폭으로 황태자궁 복도를 지나 집무실 문 앞에서 멈췄다.
“크, 크로덴 공작님!”
문을 지키던 기사 둘이 벌벌 떨며 그를 저지하려다 살기에 압도당했다. 곧바로 들여보내라는 황태자의 명이 있긴 했어도, 예고도 없이 찾아오니 어쩔 줄 몰랐다.
“비켜.”
에카르트는 기사들을 무시하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고 중저음의 목소리로 스스럼없이 황태자의 이름을 불렀다.
“다비온.”
“에카르트!”
책상에서 얌전히 서류를 처리하던 황태자, 다비온이 에카르트를 맞아 주었다. 그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에카르트. 북부는 어떻게 되었지?”
이틀 전 에카르트는 마수를 소탕하기 위해 북부로 출전했다. 아직 지원군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혼자 복귀하다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부 처치했다.”
“…전부 처치했다고?!”
“그래, 여기 보고서. 남은 기사단도 사흘 안으로 복귀할 거다.”
에카르트는 책상에 서류 하나를 던지듯 놓았다. 참 여러모로 대단한 인간이라고 황태자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한 일주일은 걸릴 거로 생각했는데…. 고생 많았군. 차를 준비할 테니 앉아서 쉬고 있어.”
황태자가 일단 맞은편 의자를 권했지만 에카르트는 앉지 않았다. 그는 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
“사양하지. 당장 시엘리나를 찾으러 가겠어.”
“그래서 일주일이나 걸릴 토벌을 단 이틀 만에 정리하고 온 건가?”
“물론. 다른 이유는 없다.”
시엘리나 루솔릿 공녀.
붉은색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를 가진 백마법사. 에카르트가 다치거나 마검의 힘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면 늘 시엘리나를 찾아 치유받았다.
“아프다면 지금은 일단 다른 백마법사를 불러 줄게.”
“아니. 나를 치료할 사람은 그녀뿐이야!”
“참 한결같다고 해야 할지….”
황태자는 이런 폭군에게 시달리는 시엘리나에게 연민을 느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게다가 에카르트 한 명뿐이 아니라 다른 광기 어린 여자까지 집착하지.’
회상을 더 이어 가기도 전에 에카르트가 으르렁거렸다.
“다비온, 당장 황실의 워프 마법진을 사용해.”
마치 맡겨 둔 물건을 내놓으라는 것처럼 당당한 태도였다.
“그래, 마법진을 준비할 테니 일단 진정하고.”
황태자가 화난 맹수를 진정시키듯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친구처럼 오랜 시간을 지낸 게 죄였다.
***
황태자궁에 도착하기 전.
북부 전장에 있던 에카르트는 시엘리나의 편지를 받았다.
이름만 봐도 미소가 새어 나와 마수 떼의 괴성마저 세레나데처럼 들렸다. 편지를 뜯어 내용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안녕하세요, 공작님. 그간 친하게 지내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괴발개발한 글씨도 귀여웠지만, 과거형이라서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 다름이 아니라 저는 이제 동방을 찾아가려고 해요.
동방?
이전에 언뜻 비 오는 날에 “국밥에 깍두기가 생각나네요.”라고 동방의 음식을 언급하고, 먹고 싶은 건 먹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기는 했다만…. 설마 그 이유 때문일까.
- 그럼 건강히 계세요. 저보다 더 좋은 백마법사를 만나길 바랄게요. 공작님이라면 하실 수 있어요!
작별 인사였다. 에카르트의 미간이 좁혀졌다.
편지를 몇 번 더 빠르게 읽은 후 그는 순식간에 전장을 정리했다. 그런 그의 기세에 병사들은 두려움까지 느꼈다.
“마수 한 군단을 날려 버렸어. 과연 마검의 힘을 다루는 전장의 지배자인가!”
“크윽, 멀리 떨어져도 포스가 느껴지는군.”
수천 구의 마수를 베며 마검이 붉게 물들었다. 에카르트는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그저 눈앞의 적을 섬멸하는 데에 집중했다.
어서 돌아가 시엘리나를 붙잡아야 한다!
그 하나에 사로잡힌 그의 눈빛이 모든 걸 집어삼킬 듯 번뜩였다.
***
날도 따뜻하고 바람도 선선하니 도망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제국 동부 검문소로 향했다.
‘편지가 잘 도착했으려나?’
에카르트가 전장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제국에 없을 것이다.
빙의한 후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남주, 여주와 헤어지고 멀리 떠나는 순간!
‘물론 정이 들기는 했지만…. 살아남으려면 이 방법뿐이야.’
저 앞의 검문소만 지나면 이제 제국 밖이다. 나는 히죽 웃다가 멀미 때문에 울렁거려 울상을 지었다. 미리 주머니에 챙겨 왔던 멀미약은 이미 다 먹었다.
“잠시만요. 마차 좀 세워 주세요.”
나는 마차를 멈추게 한 후 마차 짐칸을 확인하여 트렁크처럼 커다란 가방을 꺼냈다.
‘여기에 약 몇 개를 더 챙겼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마부가 가방을 번쩍 들어 내려 주었다.
“어이쿠, 생각보다 무겁군요!”
“그래요? 별거 안 들었는데….”
가방을 열자 하얀색 가발 같은 실타래가 엉켜 있었다. 이런 건 챙기진 않았는데. 기억을 되짚으며 순간 마른침을 삼킬 때.
가방 속에 하얀 손이 튀어나와 내 손목을 잡았다.
“아악!”
“악!”
나와 마부는 동시에 우렁찬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라는 소리와 함께 꾸깃꾸깃한 옷차림의 여자가 가방에서 나왔다.
그리곤 그녀는 주변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평하게 기지개를 켜고 가방 위에 걸터앉았다.
“아, 벌써 들켰네.”
블랑세가 파란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브, 브, 블랑세. 여, 여, 여기서 뭐해?”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을 하는데 절로 더듬었다.
블랑세 비바체.
지금쯤이면 어딘가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을 줄 알았던 원작 여주가 대체 왜 내 가방에 있단 말인가.
“나? 너 따라가고 있었지. 네 허락까지 받았는데 뭘.”
“내가 언제?!”
“생각해 봐…. 너 기억력 좋잖아.”
그러고 보니 동방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가방에 나도 넣어서 데려가.”라고 조르기에 웃으며 “그러든가.”라고 답한 기억이 간신히 떠올랐다.
“그, 그건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지! 내 가방에 있던 옷은 다 어쨌어?”
“내가 들어갈 공간이 부족해서 버렸어. 가는 길에 예쁜 옷으로 사 줄 테니 걱정 마.”
무턱대고 나를 따라온 블랑세 때문에 머리가 새하얘졌는데, 그와 동시에 검문소 문 앞이 빛나기 시작했다.
워프 마법진이 발동되고 있었다. 동서남북 검문소마다 설치된 마법진은 오직 황족만 발동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마법진이 발동될 일이 뭐가 있겠어.’
나는 작은 불길함을 느끼고 증명서를 챙겼다. 마차와 블랑세를 두고 맨몸으로라도 당장 떠나야겠다.
지금이라도 최대한 멀리 가야만 할 것 같았다. 빠르게 달려가 검문소 앞을 지나가려고 했는데.
“공녀님!”
“시엘!”
어느새 내 앞은 탄탄한 가슴에 가로막혔다.
“…에카르트.”
“저를 마중 오신 겁니까, 시엘리나?”
훤칠한 키와 근육이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인사했다. 블랑세 때문에 놀란 게 채 가라앉지 않은 와중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마수를 토벌하러 북부로 떠났잖아요!”
“네. 당신의 편지를 받고 일찍 정리해서 왔습니다.”
에카르트는 나 외에 다른 사람은 투명 인간 취급하곤 한쪽 무릎을 꿇더니, 내 손을 쥐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 번뜩이는 두 루비색 눈동자를 보고 나는 시선을 피했다. 손도 슬쩍 빼내려고 했는데 놓아주지 않았다.
“저는 공작성으로 편지를 부쳤는데 어떻게 전장에서 받으셨어요?”
“집사에게 시엘리나 공녀의 편지를 받으면, 보관하지 말고 제게 당장 보내라고 했습니다. 잘했지요?”
“아뇨, 그럴 필요 없었어요.”
편지를 곧장 전해 준 집사도, 몰래 따라온 블랑세도, 헐레벌떡 온 에카르트도, 워프 마법진을 사용하게 해 준 황태자도 지금 이 순간 모두 미웠다.
나는 도망치려고 했는데!
내가 검문소를 아련하게 바라보자 에카르트가 돌연 가슴을 감싸 쥐고 신음했다.
“윽….”
“왜 그러세요?”
순간 당황해서 그의 안색을 살폈다.
“무리해서 마검을 사용했더니 힘이 불안정합니다.”
“괜찮아요?”
“아뇨, 심장이 뜯겨 나가고 피 대신 유리 파편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백마법사에게 치료를 받아야겠습니다.”
“그럼 어서 빛의 성전으로 가세요.”
“바로 제 앞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백마법사가 계시는데요.”
그게 내가 아니길 바랐지만, 불행히도 지금 그의 앞에는 나뿐이었다.
도주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기 전,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자 그가 추궁을 시작했다.
“시엘리나.”
“네?”
“혹시 몰래 도망칠 생각이었습니까?”
에카르트가 솔직히 말해 보라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왠지 그렇다고 말한다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설마 그럴 리가요? 그랬다면 편지를 남겼겠어요?”
내 등 뒤로 한 방울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몰래 도망가려고 했던 것이 맞았다.
나는 3년 전 이 피폐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빙의했다.
한국에서 스무 살의 나는 트럭 운전사였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보수가 더 나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배송업이라는 게, 젊은 나이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물건을 배달하느라 늘 바쁘게 살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평소처럼 트럭을 모는데 브레이크가 고장 났지. 뻔한 삼류 드라마처럼 말이야.’
그 상황에 횡단보도의 불이 바뀌어 어린이가 지나가는 중이었고, 차마 사람을 칠 수가 없어 급하게 핸들을 돌려 방향을 틀었다.
나는 그렇게 전봇대를 박고 어이없게 죽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넓은 방 안이었다. 그곳은 뭔가 가구도 없어 보이고 황량했다.
거울로 다가가자 이전 세계의 단정한 내 모습과 전혀 다른 인상의 여자가 보였다.
가슴까지 오는 빨간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를 가진 화려한 얼굴.
갓 성인이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앳된 모습이었다.
‘설마 내 트럭이 이세계로 가는 트럭이었나?’
빨간 머리 색깔은 보통… 악녀의 마스코트 같은 건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