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
땅딸막한 키에 다부진 몸. 덥수룩한 수염.
지로티 공작은 눈을 크게 뜬 채 목각인형처럼 가만히 서서 말이 없었다. 그의 부릅뜬 시선을 받으며 에밀 듀레인은 뒤늦게 불안감을 느낀 듯했다.
“……아. 공작 각하. 그러니까 제 말은…….”
“듀레인 남작.”
이윽고 지로티 공작에게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과할 기회를 주겠네.”
무도회장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고, 이제는 모두가 에밀 듀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밀 듀레인 남작은,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사과하는 자신의 모습을 용납할 수 없는 듯했다.
그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부아가 치밀었는지 충동적으로 말했다.
“제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습니까? 솔직히 자식 문제로 공작 각하께 조언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식 교육을 그렇게 잘 시키셨으면 애초에 죽지도 않았겠지요.”
“…….”
“허…….”
“세상에…….”
모두가 작게 탄식했다.
그리고 지로티 공작은 눈은 더 깊게 가라앉았다.
“……그런가. 그렇군. 내 자식은 부모보다 일찍 떠났으니…… 그렇기야 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두껍고 뭉툭한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루치아노 지로티 공작.
그는 북부의 광활한 지로티 공작령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오르퀘니나의 국방대신이기도 하고, 네 공작 중 한 명이며, 크라우스 공작가의 세가 약해진 지금 오르퀘니나에서 가장 강한 세력의 주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키토 후작과 더불어 일찌감치 황자 아딜로트를 지지할 만큼 안목도 있었으며, 그런 동시에 매우 신중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체로 나서지 않았고, 경거망동하지도 않았다. 쉽사리 움직이기엔 지로티 공작가의 이름은 너무나 무거우니까.
그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낯으로 에밀 듀레인 남작을 바라보았다.
“기회를 걷어차 주어서 아주 고맙네.”
루치아노 지로티 공작은 그렇게 말한 뒤 상석에 앉아 있는 아딜로트에게 즉각 몸을 돌렸다.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달,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폐하.”
“……!”
지로티 공작이 깍듯하게 아딜로트에게 예를 차리며 말했다. 그 모습에 에밀 듀레인이 당황했으나 지로티 공작은 거침이 없었다.
“폐하의 검이 폐하께 여쭙습니다.”
“허한다.”
“방금 에밀 듀레인 남작은 그의 딸인 세레니티 듀레인에게 절연을 선언했으며, 오르퀘니나의 유일한 법이자 재판관이신 폐하의 앞에서 그러한 말을 한 바, 이를 수리해 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에?”
“수리하지.”
에밀 듀레인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가 뒤늦게 상황을 이해하고는 놀라 외쳤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문제라도 있나?”
“방금 그건 그냥 흔한 부녀 싸움이었습니다!”
“그래? 그대가 직접 말한 게 아닌가, 듀레인 남작.”
아딜로트가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리며 답했다. 그의 붉은 눈이 무심히 빛났다.
“아니면 설마 내 앞에서 거짓을 말했단 뜻은 아니겠지?”
“아, 아니. 그렇지만……!”
“나를 속였다는 뜻인가?”
“……!”
에밀 듀레인 남작은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했다간 황제를 능멸한 죄로 단칼에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지로티 공작이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세레니티에게 다가갔다.
“세레니티 듀레인 양. 아니, 이제 세레니티 양인가.”
“네?”
세레니티가 화들짝 놀라 답했다.
“이제 자네에게 물을 차례네.”
그녀의 금빛 눈이 멍하니 깜빡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지로티 공작은 망설임 하나 없이 물었다.
“자네는 자네의 가문을 뒤로할 각오가 있는가?”
“…….”
그 순간, 세레니티의 눈에 작은 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리고 빨리 거절하라는 듯한 얼굴의 에밀 듀레인 남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석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미아도 바라보았다. 강아지처럼 순한 인상의 벗은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하겠다는 듯이.
세레니티는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지로티 공작에게 답했다.
“……네.”
“그럼 내 후계자가 되겠나?”
“네?”
“……!”
“뭣……!”
이번에는 무도회장 전체가 뒤집혔다.
“지로티 공작가엔 후계자가 없네. 모두가 알다시피 말이네. 그래서 슬슬 후계자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지로티 공작이 슬쩍 미아 쪽을 바라보았다.
“노리던 토끼는 아무래도 사자가 채간 모양이더군.”
그 시선에 미아는 휘파람을 부는 척 하며 시선을 피했고, 아딜로트는 당연하지 않으냔 듯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잘 모르는 할아버지가 이런 말 하면서 따라오라고 하면 원래는 따라가면 안 되는 게 맞지만…….”
“하겠습니다.”
놀란 것도 잠시, 빠르게 결정을 마친 세레니티는 차분하게 답했다.
“세레니티!”
옆에서 에밀 듀레인 남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지만, 그녀는 그를 완벽하게 무시했다. 지로티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될 걸세.”
“각오했습니다. 그리고, 청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최대한 들어주겠네.”
세레니티가 듀레인 남작에 대해 말하리라 생각했는지 지로티 공작이 그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후계자 말고 딸처럼 생각해 주세요.”
세레니티가 사붓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
그 말에 지로티 공작은 누가 머리를 내려치기라도 한 듯 굳었다.
“혹은…… 미아처럼 손녀든가요.”
세레니티가 덧붙였다.
잠시 멍하니 굳어 있던 지로티 공작은 이내 눈을 흐렸다.
“자네는 내가 안쓰러운가 보군.”
“공작 각하도 제가 안쓰러워 나서 주신 게 아닌가요?”
“내가 자네보다 네 배는 더 인생을 더 살았는데 그럼 안쓰럽지 않겠나.”
“공작 각하보다 네 배를 덜 살고도 같은 생각을 하였으니 저희는 괜찮은 가족이 될 수 있겠네요.”
“……이 나이에 딸이 다시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
“저도 무도회장에서 호적이 바뀔 줄은 상상도 못 했답니다.”
“허……. 허허허!”
능청스러운 말에 지로티 공작이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얼굴을 했다.
“한마디도 안 지는구만. 꼭 제 친구를 닮았어.”
“미아와 닮았나요? 제게 가장 큰 칭찬이에요.”
지로티 공작이 피식 웃고는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세레니티는 부드럽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악수가 끝나자 지로티 공작은 곧장 황제에게 몸을 돌렸다.
“폐하. 본적을 잃고 평민이 된 세레니티를 제 딸로 들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황제의 이름으로 허락하지.”
너무나 빠르고 간결하게 이루어진 입적이었다. 모두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황제가 공인한 이상, 세레니티는 이제 지로티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세레니티!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네 아비는 나야! 지금 내 눈앞에서 패륜을 저지르겠다는 거냐!?”
에밀 듀레인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예 자신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세레니티는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 패륜인가요? 저를 가문에서 내친 건 아버지셨어요.”
“그건 그냥 네 훈육을 위해 그런 거야! 진심은 아니었단 말이다!”
“아니요. 아버지……. 그런 건 훈육이 아니에요. 세간에선 그걸 학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그 학대에서 벗어나려고 해요. 그동안 길러 주신 건 감사했습니다.”
“……!”
에밀 듀레인 남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레니티가 진심이라는 걸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며 미아는 낯선 기분을 느꼈다.
‘원래 렌이 이 자리에 있어야 했는데.’
그런 세레니티가 지금 지로티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쭈뼛거리며 나란히 서 있는 세레니티와 지로티 공작을 바라보며 미아는 살짝 미소 지었다.
‘소설 제목 바꿔야겠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가 아니라 <북부 대공 세레니티>로.’
그쪽이 더 마음에 드네.
그렇게 생각하며 미아가 활짝 웃었을 때였다. 무도회장의 열린 문으로 기사들이 난입했다.
“뭐지?”
“어머, 무도회인데…….”
“죄송합니다. 급한 용무이기에…….”
기사들은 아딜로트에게 경례하고는 곧장 에밀 듀레인 남작에게 다가갔다.
“듀레인 남작.”
“예, 예!?”
“당신을 국보를 탈취하고 달아난 혐의로 체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