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세레니티가 지로티 공작과 대화하는 내내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에밀 듀레인은 이제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그의 부인과 두 딸도 마찬가지였다. 셜리는 재빨리 자기 목걸이를 움켜쥐고 드레스 안으로 숨기려 했지만, 기사 한 명이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악! 엄마아아!”
“셜리! 이봐요, 무슨 짓이에요! 그건 선물로 받은 거라고요!”
“마, 맞아! 그건 미아 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거란 말이다!”
그 말에 기사들과 귀족들의 시선이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미아에게 돌아갔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미아는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촤 하고 넘긴 뒤 팔짱을 끼고서 외쳤다.
“아니!? 난 모르는 일인데!? 근데 아저씨네가 다녀간 다음에 어쩐지 아딜이 줬던 선물이 없어졌더라!?”
“……!”
“저……!”
듀레인 일가는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듯이 놀라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당장 미아를 향해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이 계집애! 옆에서 본 사람이 몇인데!”
“그, 그래! 저기 시녀장도 분명 봤다고! 저 사람이 그걸 날랐단 말야!”
베티 듀레인이 무도회장 구석에 서 있던 제인 고트샬크를 가리켰다.
하지만 제인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이 제인은 모르는 일입니다만.”
“……!”
“거짓말! 거짓말이야!”
기사들에게 붙잡힌 베티 듀레인과 셜리 듀레인이 악을 썼지만 귀족들은 눈을 게슴츠레 뜰 뿐이었다.
“고트샬크가 얼마나 엄격한데요. 저런 걸로 거짓말했을 리가 없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미아 셀레스티얼의 물건을 훔칠 생각을 했죠?”
“전 기껏 훔친 걸 착용하고 왔다는 게 좀 이상한데요.”
“세레니티 듀레인을 약점으로 잡았으니 미아 님이 뭐라고 못할 거라고 생각했겠죠. 약았네요, 정말.”
들리는 소리에 듀레인 일가는 점점 안색이 새파래졌다. 에밀 듀레인은 구명줄을 찾듯 세레니티를 바라보았다.
“세레니티! 네가 말해 보렴! 그건 선물이었잖니!!”
“…….”
잠시 침묵하던 세레니티는 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슬쩍 시선을 피했다.
“모르겠네요. 제 눈엔 역시 강탈이나 절도로 보였어서요.”
“……!”
“이……, 이 사기꾼들아!”
“너희 다 짜고 친 거지! 이 개잡놈들……!”
악에 받친 절규에 미아는 이마를 짚으며 포르르 황제의 품으로 쓰러졌다.
“아딜! 쟤가 나한테 사기꾼이래! 어떡하지!? 아딜 반려동물은 너무 슬프고 충격을 받아서 쓰러져 버릴 것 같아!”
“사형시켜.”
“네!”
“자, 잠깐만! 실수입니다! 말실수!”
“으아앙! 으와아아앙!”
체면을 내던지고 난동부리는 에밀 듀레인.
머리카락이 다 흘러내리도록 악을 쓰는 잉그리드 듀레인.
비명을 내지르는 베티 듀레인과 목걸이를 붙잡고 울기 시작한 셜리 듀레인.
개판이었다.
‘어차피 렌의 가족이라 물건만 돌려받고 그냥 풀어 줄 테지만, 경고는 됐겠지.’
세상에는 먹고 떨어지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도 있지만, 미아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떨어뜨릴 놈인데 왜 마지막 선물까지 줘야 해? 속옷까지 탈탈 털어서 쫓아내야지!’
세레니티까지 도와줄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이걸로 무사 해결이었다.
그때, 미아와 세레니티의 눈이 마주쳤다.
세레니티는 환하게 웃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 * *
모든 게 다 끝난 뒤, 황제궁의 정원에서 만난 세레니티가 말했다.
“미아. 저는 앞으로 좀 바쁠 것 같아요. 궁에도 들를 수 없을 것 같고요.”
그녀는 묘하게 전보다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 약간은 수심에 잠긴 듯한 사연 있는 미인이었던 그녀가 이젠 당당하고 자신 있게 미아를 향해 미소 지었다.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그 모습에 미아가 씩 웃었다.
“듀레인 가문을 떠난 심정은 어때?”
세레니티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먼 곳의 장미 정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외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꼭 그랬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아, 미아가 한 일 말고요. 결국 듀레인가는 다 풀려났으니까요.”
“응. 그치만 바로 세무 조사 들어갔더라고. 아르르 어쩌고가 말하길 요아힘이 화났댔나?”
“미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화났을 거예요. 미아가 그런 말을 들었으니까.”
“난 괜찮은데…….”
미아의 작은 중얼거림에 세레니티가 활짝 웃었다.
“미아의 그런 점을 정말 존경해요.”
세레니티는 그렇게 말하고서 미아의 손을 잡아 왔다.
“저는 늘 그러지 못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아니, 듀레인 남작이 저를 가문에서 내쫓겠다고 말한 순간, 여기까지구나 싶더라고요.”
“…….”
조용히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세레니티를 미아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세레니티는 태어나서 한 번도 남에게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어느 소설의 주인공이 될 만큼 멋지고 착한 사람이니까.
“미아. 저는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언젠가 나는…… 누군가의 부인이 되어 팔려가듯 결혼하겠구나. 그걸 깨부숴 준 게 미아예요. 미아는 제게 다른 길을 알려 줬어요. 그것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요.”
금빛 눈은 점점 젖어 들고 있었다.
“그리고 미아는 셀레스티얼 가문을 운영했을 때의 지식을 알려 주었고, 요아힘 님에게 공부할 수 있게 말해 주었고, 애초에 저는 미아 덕에 황궁에 들어오게 되었고, 지로티 공작 각하와 알게 된 것도 미아와 함께여서였고…….”
“다 내 덕이래.”
“정말이니까요. 참, 그리고 지로티 공작 각하가 의원이셨어요! 황제 폐하의 주치의시래요. 미아는 알고 있었죠?”
미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레니티가 환하게 웃었다.
“제 공부를 봐주신대요. 엠브라 양과 렌나 양에게도 계속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세레니티가 말을 멈췄다. 미아는 소맷자락으로 세레니티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울지 마.”
“…….”
세레니티는 울고 있었다.
우는 모습마저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녀는 진주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미아의 손을 잡았다.
“미아는 저의 구원자예요.”
“다 네가 노력해서 이뤄 낸 일인걸.”
“아니에요. 저는 정말…… 미아가 아니었다면 그냥 정해져 있는 길을 따라 살아갔을 거예요.”
기어코 세레니티가 미아를 끌어안았다.
“제 눈앞에 나타나 줘서 고마워요, 미아…….”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런 세레니티의 등을 토닥이며 미아가 활짝 웃었다.
“나도 방금 어쩐지 이 세계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어.”
* * *
미아와의 티 타임을 마치고 세레니티는 황제궁을 나섰다.
수석 시녀인 제인 고트샬크, 그리고 다른 궁인들과도 인사를 마쳤다.
아마 당분간은 후계자 공부 때문에 바쁠 테고, 그게 끝나면 지로티 령으로 떠나야 해서 황궁에 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세레니티는 자신의 모든 삶을 송두리째 뒤바꾼 사람이 있는 궁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
그러다 세레니티는 문득 익숙한 옆모습을 발견했다.
늘 단정하게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는, 황태후 크리소르의 측근 시녀. 루넬 피아였다.
‘루넬 씨…….’
세레니티가 걸음을 멈추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루넬도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세레니티를 발견하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
“…….”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곧 세레니티에게 묵례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듯한 모습에, 세레니티는 재빨리 루넬에게 다가갔다.
“루넬 씨!”
“……!”
루넬은 세레니티가 설마 다가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차분한 낯으로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레니티 지로티 님.”
“아.”
세레니티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역시 어감은 조금 별로네요…….”
“…….”
순진한 아이 같은 말에 루넬은 저도 모르게 피식했다가 얼굴을 굳혔다.
“지로티 공작가는 명망 높은 가문입니다. 그런 가문의 후계자가 되셨으니 그런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질타하는 말인데도 세레니티는 마냥 즐거운 듯이 미소 지었다.
“그렇죠? 역시 저는 아직 배울 게 많아요. 지적해 주셔서 감사해요.”
“……지로티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신 이상 제게 존대하는 것도 품위에 맞지 않습니다.”
“다음부턴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지금이 세레니티로서 루넬 씨를 마주할 마지막 날이잖아요.”
루넬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런 루넬의 모습에 세레니티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크리소르 황태후 폐하의 명으로 궁에 들어왔을 땐, 루넬 씨와 가끔 이야기를 나누고 그랬는데.’
그 시간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사이 크라우스 공작가는 갑작스럽게 명예가 실추당했고, 자신은 지로티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더는 예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런 건 싫어.’
세레니티가 곧은 눈으로 루넬을 바라보았다.
“루넬 씨.”
“말씀하십시오.”
“무슨 목적이었든 저는 저를 황궁으로 불러서 미아를 만나게 해 주신 점에 대해서는 황태후 폐하께 감사드리고 있어요.”
“…….”
루넬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세레니티가 살풋 미소지었다.
“저희의 길이 이렇게 갈라지긴 했지만, 그것만은 진심이에요.”
루넬은 멍하니 세레니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당신은…… 어릴 적의 크리소르 님을 닮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