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왜 그렇게 우릴 나쁜 년으로 만들려고 하는 건데?”
“언니?”
“우리가 너보다 부족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우린 가족이잖아!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서로 보듬어 줄 수도 있는 거잖아!”
베티 듀레인은 양손으로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셜리도 눈치껏 우는 척을 시작했다.
하지만 베티는 손 안쪽에서 남몰래 웃음 짓고 있었다.
‘세레니티 계집애. 쟨 절대 대놓고 내 치부를 드러내진 못할 거야.’
그렇게 매일 당하면서도 티 낼 줄을 모르던 고지식한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그건 언니가……!”
아니나 다를까 뭔가 말하려던 세레니티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아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서 애정 결핍이 있다고 베티가 말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잘못 와전되면 미아 셀레스티얼에게 해가 갈 수도 있는 말이었다.
게다가 어쨌든 이런 걸 까발려서 언니의 앞길을 막을 순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멍청해 빠져선.’
베티 듀레인의 입이 쭉 찢어졌다. 그녀는 곧 울먹이며 말했다.
“넌, 넌 그렇게까지 날 밀어내고 싶은 거야?”
“베티 언니…….”
셜리가 타이밍 좋게 베티를 토닥였다. 세레니티의 눈에서 점점 빛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며 베티는 쾌감을 느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지. 자기만 고결하고 자기만 착한 척.’
이대로 소란이 커져서 미아 셀레스티얼이 세레니티를 내치고 자신을 옆에 두면 좋을 텐데.
베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 명이 더 상황에 난입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니!”
다른 가문의 가주들에게 어떻게든 비벼 보려고 하던 에밀 듀레인 남작이었다. 베티는 그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저 작자도 마음에 안 들어. 엄마는 재혼할 거면 좀 부잣집이랑 재혼할 것이지.’
하지만 그는 항상 꽤 도움이 되는 편이었기 때문에 베티는 조용히 물러나 주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순간 에밀 듀레인은 가장 먼저 세레니티에게 말했다.
“세레니티. 또 싸운 거니? 대체 이런 곳에서까지 날 부끄럽게 만들어야겠어?”
에밀은 처참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화목하지 못한 가정이 들통난 게 수치스러운 듯했다. 그는 심드렁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언니에게 사과하고 좋게 끝내렴. 알겠니?”
에밀 듀레인의 말에 세레니티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뭘 기대했던 걸까?’
아버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네가 착하니까 넘어가렴.’
지금까진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들이 미아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깨달았다.
이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고.
이대로 가면 자신은 미아와 같은 소중한 사람들을 가족 때문에 잃을 수도 있었다.
그건…….
“싫어요.”
세레니티의 입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사과하지 않을 거예요. 사과는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들이 미아에게 해야 해요.”
자신이 거론되자 에밀 듀레인 남작의 표정이 굳었다.
“세레니티. 너 아버지가 말이 말 같지 않은 거니?”
“네. 이젠 그러네요. 어제 가져온 것들도 미아에게 돌려주세요.”
“그건 미아 님이 우리에게 선물해 주신 거야!”
잉그리드 듀레인이 끼어들었으나 세레니티는 냉랭했다.
“그게 선물이었나요? 제 눈엔 강탈로 보였는데요. 혹은 절도거나요.”
“오……!”
“어머니!”
잉그리드 듀레인이 과장되게 이마를 짚었고, 그런 그녀를 셜리 듀레인이 부축했다.
“네가 기어코 우릴 범죄자로 몰아가는구나, 세레니티!”
베티 듀레인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어떻게 네 가족에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그것도 심지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까지! 그게 네 본성인 거지!?”
“네. 이게 제 본성이에요. 전 그동안 당신들의 천박한 태도가 정말 싫었거든요.”
짝!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레니티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만하거라!”
세레니티를 때린 건 침통한 표정의 에밀 듀레인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뭘 배우고 다녔길래……!”
“적어도 아버지의 가르침보다는 훌륭한 걸 배운 것 같은데요.”
“이게 그래도……!”
에밀 듀레인 남작의 손이 다시 올라갔을 때였다.
“흠, 흠! 아무리 그래도 손찌검은 좀 심한 것 같네만, 남작.”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지로티 공작이 끼어들었다.
“그것도 남들 다 보는 데서 말이네. 그렇다고 안 보이는 데서는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네만.”
그는 평소와 달리 분위기가 굳어 있었다.
거의 처음 보는 듯한 지로티 공작의 진지한 모습에 여기 모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미아마저 약간 놀란 상태였다.
‘할아버지가 왜?’
그도 그럴 것이, 지로티 공작은 이런 일에 끼어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에밀 듀레인 남작도 약간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하고서 말했다.
“지로티 공작 각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괜히 가족 문제로 심기를 불편하게…….”
“내 심기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그게 아니라 애를 너무 몰아세우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지극히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도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하아. 세레니티가 아직 철이 없습니다. 예의도 모르고 부모에게 대들기나 하니…….”
지로티 공작은 그 말에 묵묵히 세레니티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부어오르는 뺨이 아프지도 않은지 눈을 내리깔고서 침묵하는 중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황궁에선 평판이 좋았네만. 게다가 공부도 열심히 하는 듯했고. 내 오다가다 본 게 있어서 말이네.”
“예? 공부요?”
“의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황립 의료원 의원분들께 도움을 받아서요.”
의아하다는 듯한 에밀 듀레인의 말에 세레니티가 답했다.
“의학?”
에밀 듀레인은 당황했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쉬었다.
“세레니티. 네가 심성이 고운 것은 알지만, 이제 그런 취미는 그만둬야 하지 않겠니? 시집갈 준비를 해야지.”
“……취미가 아니에요. 저는 의원이 되려고 해요.”
“세레니티. 안타깝지만 의원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란다.”
에밀 듀레인 남작은 아주 곤란하다는 얼굴로 연신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네가 배운 건 고작해야 자수나 악기가 전부인데, 어떻게 그 어려운 전문지식을 익히려고 그러는 거니?”
“……하지만 의원분들이 제게 재능이 있다고 하셨어요.”
“네 마음을 꺾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말한 거겠지. 정신 좀 차리렴. 모두가 큰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거야.”
“…….”
“평범하게 시집을 가서 평범하게 남편에게 사랑받는 삶도 행복한 거란다. 세레니티. 알겠니?”
에밀 듀레인 남작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 아빠가 에스코트해 줄 테니 저택으로 돌아가서 자숙하고 있으렴.”
그러나 세레니티는 무정한 얼굴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뇨.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지금 뭐라고 말했니?”
“그동안 저를 길러 주신 건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제 길을 정했어요. 저는 의원이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세레니티의 얼굴에서는 미약한 기대감이 엿보였다.
“세레니티. 네가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는 너를 가문에서 내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에밀 듀레인 역시 지지 않고 말했다.
“…….”
그 말에 세레니티의 눈에서 빛이 완전히 꺼졌다. 그 모습에 되레 지로티 공작이 안절부절못하며 나섰다.
“이보게, 듀레인 자네……. 그러지 말고 애랑 얘기를 좀…….”
“공작 각하. 이런 철부지와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때, 세레니티가 차분히 말했다.
“……아버지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는 듀레인가를 나가겠습니다.”
“뭣……?”
에밀 듀레인 남작이 놀라 외쳤다.
“너 지금 말 다 한 거니? 그게 아비 앞에서 할 소리야!”
“제가 그러기를 바라시는 것 같아서요.”
“하!”
가당찮다는 듯이 혀를 찬 에밀 듀레인 남작은 이내 세레니티에게 삿대질하며 외쳤다.
“그래! 그럼 어디 그래 보거라! 가문의 힘도 없이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자꾸나!”
“…….”
“네가 듀레인가를 나가서 평민이 되면 누가 널 돌아보기라도 할 것 같으냐? 네가 뭘 할 줄 안다고! 능력이 있길 해, 돈을 벌 줄 알아! 남에게 예쁨받는 것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게 있기나 하느냐?”
“이보게……. 애가 그래도 많이 노력하던데 말이 너무 지나친…….”
“아니요! 이 애는 멍청해서 이 정도로 말해야 알아듣습니다! 감히 아버지 앞에서 저런 패륜적인 말이라니요!”
에밀 듀레인 남작이 치가 떨린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어디 가서 험한 일이라도 당해 봐야 제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알 아이입니다!”
그 말에 세레니티와 지로티 공작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자네, 아무리 그래도 지금 그게 자식한테 할 소린가?”
에밀 듀레인 역시도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는지 움찔했다. 지로티 공작의 아들 부처 일을 떠올린 듯했다.
그러나 에밀 듀레인 남작은 아까부터 자꾸 사사건건 말을 얹는 지로티 공작의 태도에 짜증이 났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 딸은 제가 더 잘 압니다! 공작 각하는 이런 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시겠지요! 애초에 자식을 그리 잘 키우진 못하시지 않았습니까!”
“……!”
“저 X놈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기 위해 미아가 작게 중얼거리며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아딜로트가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 참아.”
“아딜!”
미아는 당장 날뛸 기세였지만, 아딜로트의 시선은 여전히 지로티 공작에게 향해 있었다.
비단 무도회장의 모두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