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57화 (157/193)

157화

귀족들이 자주 모이는 울름의 어느 시가 바.

크라우스 공작가의 오랜 가신인 플랑크 백작은 막 바에 들어선 누군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보시게, 메르켈 자작!”

상대는 메르켈 자작이었다. 두 사람은 크라우스 공작가의 가신이기도 했으며 막역한 사이였다.

그런데 최근 메르켈 자작이 황제의 밑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어떻게 크라우스 공작 각하를 배신할 수가 있어!”

자작은 백작을 흘끗 보고는 그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자네는 아직도 공작가 아래에 있나?”

“그야 공작 각하께선 늘 우리를 보살펴 주지 않으셨나!”

그 말에 자작은 시가에 불을 댕기며 피식 웃었다.

“반란을 종용했다가 실패하자 내친 사람을 모시라고? 난 그러기 싫네.”

“그건……!”

말문이 막힌 백작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우리는 공작 각하의 그런 냉철한 점을 존경했던 거잖나…….”

“그야 그렇지. 그렇지만 다른 소문도 있는데, 못 들었나 보지?”

“다른 소문?”

“솔직히 우리가 크라우스 공작가에 붙어 있던 이유가 뭔가? 공작가에서 찔끔찔끔 나눠 주는 비료 때문이 아닌가?”

백작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게 아니었다면 굳이 가신이 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작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아주 귀한 정보를 알려 준다는 듯이 속닥였다.

“황실에서 그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면 이용할 수 있게끔 해 준다는 말이 있네.”

“뭐!?”

백작이 주변을 살폈다가 물었다.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크라우스 공작가의 비료 기술은 지금껏 아무도…….”

그는 말하다 말고 흠칫했다.

“설마 미아 셀레스티얼이……?”

“그 설마가 맞네. 나들이에서 크라우스 공작령에 들렀다가, 보자마자 방법을 간파했다더군.”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야 보통은 불가능하겠지만…….”

자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미아 셀레스티얼 아닌가?”

이제 오르퀘니나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반역자의 딸로 죽을 뻔했다가, 황제의 총애로 살아남고, 종국에는 호흐실트 후작까지 찍어눌렀으며, 결국 유력한 황후 후보였던 릴리벳 크라우스마저 꺾어 버린 사람.

당황한 백작은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궁 내부에서도 그녀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고는 듣긴 했네만…….”

“그래. 크라우스 공작이 지휘하는 상무부에조차 그녀를 지지하는 인물들이 있다고 하는군. 궁인이나 관료들은 이미 전부 넘어갔다고 하네. 재무부는 그녀를 여신으로 모실 기세라던데.”

“허…….”

탄식한 백작은 착잡하게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 정보, 확실한 건가?”

“확실할 거네.”

자작이 헛기침한 뒤 슬쩍 입을 열었다.

“사실…… 뒤모어 남작에게 들었네. 폐하와 크라우스 공작령에 함께 갔던……. 그녀 역시도 릴리벳 크라우스의 계략에 죽을 뻔했는데, 다행히 미아 셀레스티얼이 살려 줬다고 하더군.”

“허어…….”

“알잖아? 그 나들이에 참석했던 가신들이 전부 이탈한 것을. 모르긴 몰라도 더한 일이 있었으면 있었지, 덜하진 않을 걸세.”

그는 씁쓸하다는 듯이 말했다.

자작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백작의 눈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하지만 나는…….”

“잘 생각해 보게.”

그런 백작의 어깨를 자작이 툭툭 두드리며 시가를 건네주었다.

“잘 생각해 보게. 흐름은 이미 변하고 있네.”

* * *

“우선, 다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해 주셨습니다.”

요아힘이 말했다.

집무실에 둘러앉은 것은 아딜로트, 미아, 요아힘, 그리고 궁내관인 슐츠 공작이었다.

미아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페르는요?”

아딜로트가 멈칫하더니 선선히 답했다.

“상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죗값을 치르는 중이야.”

“흐음! 그래? 왜 그랬지?”

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죄인지, 어떤 벌을 받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아딜로트가 픽 웃었다.

“산트나르 쪽은?”

그가 곧 요아힘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미리 얘기한 대로 잘 해결하고 물러났습니다.”

아딜로트가 기가 찬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오르퀘니나의 재상이 산트나르의 해적이랑 한통속이 될 줄이야.”

“하하. 그럼 제가 괜히 산트나르에서 그 오랜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요아힘의 능청스러운 웃음에 미아는 내심 감탄했을 때였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요아힘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연둣빛 눈을 빛냈다.

“공작가의 세가 정말 빠르게 줄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로 전부 미아 님 덕입니다.”

“흐음.”

“특히 알트 언덕에서 하셨다는 말씀이 정말 전략적이었습니다. 근거가 뒷받침되는 실마리를 주면서도 온전히 기술에 대해 풀지는 않는다……. 완벽한 화술이었습니다.”

꿈보다 해몽이었지만 미아는 그저 샐쭉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그 기술에 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어느 정도는요!”

미아가 펜을 들었다.

“그러니까 질산 화합물이 필요한 건데, 미로미스 상회에 있을 때 마법사 두엇이랑 얘기해 본 결과…….”

이야기를 전부 들은 요아힘은 잠시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심스레 물었다.

“미아 님. 혹시…… 천재십니까?”

“아뇨! 그냥 기억력이 조금 좋은 정도?”

“이게 기억력이 조금 좋은 정도로 고안해 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건 그렇겠죠!?”

미아는 말을 돌리며 웃기만 했다.

요아힘은 그녀가 뭔가 숨기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추궁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다른 것을 물어 왔다.

“더 있죠?”

“네?”

“이런 기술 말입니다.”

요아힘이 종이를 손가락으로 탁탁 쳤다.

“…….”

찔끔한 미아가 땀을 삐질 흘렸다.

‘없는 건 아니지. 아직 현대 기술은 많이 남았으니까……. 이를테면 화약이라든가!’

인공 비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질산 화합물. 그리고 그건 화약의 재료이기도 하다.

즉 농업생산량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화약의 발달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크라우스 공작가의 나들이에서 말하려다 만 것도 그것이었다.

‘이쪽은 아무래도 소설 속 세계라 그런지 화약 쪽으로는 억제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내가 그걸 풀 이유는 없잖아…….’

냉병기 위주인 세계에 열병기를 도입하는 게 자신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말 안 할 거예요…….”

미아가 삐질거리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조금 시무룩해 보였기에 요아힘은 아쉬움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직은 좀 이르다’는 거죠.”

“네엥…….”

“그럼 그건 차차 대화와 협상을 통해 얘기해 보도록 하죠.”

역시 포기는 안 하는구나……. 미아가 흐린 눈을 했다.

그때, 아딜로트가 끼어들었다.

“그보다 이걸로 그 지긋지긋한 릴리벳 크라우스랑 결혼하라는 소린 더 안 들어도 되겠지.”

소파에 깊게 몸을 묻은 채 턱을 괸 그가 진력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요아힘은 아주 짧은 침묵 후,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되겠군요. 크라우스 공작가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가신들 역시 다수가 빠져나갔죠. 물론 아직 건재하긴 합니다만, 미아 님의 비료 기술을 공개해 풀면 더 많은 가신이 빠져나올 겁니다.”

그가 다시 미아를 바라보았다.

“저는 솔직히 일이 이 정도로 잘 풀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바랐던 결과는 크라우스 공작가의 세력을 깎아 먹는 것 정도였습니다만…… 이대로 계속 압박해 간다면 크라우스 공작가는 이른 시일 안에 보통 귀족가가 될 겁니다.”

말을 마친 요아힘이 미아를 향해 짧게 묵례했다.

“재상으로서 감사드립니다.”

“한 것도 없는데요, 뭘!”

“그건 아니지. 죽을 뻔했잖아.”

아딜로트가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목숨을 거셨지요.”

“그렇다기보다 그냥 노려진 것에 가까운데…….”

요아힘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자신의 공을 축소하는 건 미아 님답지 않군요. 뭐가 됐건 그 상황에서 독을 예측하고, 그걸 이용해 크라우스 공작가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린 건 미아 님의 계책이었습니다.”

“그, 그런가…….”

“그리고 아무래도 반역이 더 주된 안건인지라 미아 님이 죽을 뻔했던 일은 조금 뒷전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요아힘이 싱긋 웃었다.

“혹여 그렇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적으로 처리는 못 하더라도 뒤로는 확실하게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니 말입니다.”

“아하…….”

의미 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미아가 순진하게 물었다.

“죽인다는 거죠?”

천연덕스러운 질문에 아딜로트와 요아힘이 동시에 입을 닫았다. 그리고 슬슬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미아는 그들의 반응으로 답을 예측했다.

‘죽겠구나.’

미아가 시무룩한 강아지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불쌍한 릴리벳…….”

“……혹시 구명을―”

“그러게 작작 개기지…….”

“―원하지 않으시는군요. 잘 알았습니다.”

요아힘이 물 흐르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