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황제의 표정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곧 끝나.”
“응! 에취.”
미아는 무릎 꿇고 투구의 물을 받아 마시는 릴리벳을 심드렁히 보고 넘기기만 했다. 그 모습에서 동정의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허…….”
크리소르 공작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애초에 내가 잘못 판단했군.’
처음 미아 셀레스티얼이 화두에 올랐을 때, 크리소르 공작은 그녀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끽해야 미로미스 상회를 운영한 게 전부인 백작 영애.
고작 그 정도.
‘하지만 아니었던 거다.’
가장 먼저 그녀를 쳤어야 했다. 이 정도의 심계를 꾸밀 줄 알았다면.
크라우스 공작의 눈이 흐려진 순간이었다. 아딜로트를 바라보던 미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리고 크라우스 공작과 미아의 눈이 마주쳤다.
“…….”
크라우스 공작이 흠칫했다. 크고 동그란 분홍색 눈이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크라우스 공작은 묘한 오한을 느꼈다.
‘……내가 긴장하고 있는 건가? 저 핏덩이 같은 것 때문에?’
그것을 깨달은 크라우스 공작이 호기를 끌어 올리기도 전에 미아는 다시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약간의 허망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크라우스 공작은 많은 것아을 깨달았다.
방금 그건 경고였다.
‘마치 먹잇감의 위치를 확인하듯이…….’
거기까지 생각한 크라우스 공작은 칼날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허.”
아무래도 미아 셀레스티얼은 이 정도에서 만족할 줄 모르는 듯했다.
이 싸움은 크라우스 공작의 완벽한 패배였으나,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으리라.
오연하게 선 아딜로트와 그 앞에 무릎 꿇은 크라우스의 핏줄을 보며 크라우스 공작은 중얼거렸다.
“……진검 승부를 해야 할 때가 왔는가.”
* * *
수도 울름으로 돌아온 릴리벳은 황립 의료원에 맡겨졌다. 1인실 침대에 누운 채 릴리벳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살았다. 그대로 있었다면 분명 모든 반역 누명을 쓰고 즉결처형 당했을 것이다. 그것도 크라우스 공작의 손에.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다니. 너무 대단하잖아.
릴리벳이 작게 미소 지었다.
‘물론 미아의 편지가 있긴 했지만, 그딴 거 없었어도 짐작할 수 있었어.’
릴리벳은 아직 발진이 남은 팔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된 이상 황제 쪽에 붙는 게 낫겠어.’
릴리벳이 자신을 바라보던 황제의 시선을 떠올렸다.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쓸모가 있으니 잠깐은 살려 준다는 듯한 시선. 하지만 미아를 죽이려고 했던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살아남지?’
릴리벳은 초조해졌다. 어떻게든 가치를 보여야 했다. 그가 자신을 살려 둘 가치를.
그렇게 그녀가 앞으로의 일을 계산하던 와중,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릴리벳!”
그리고 환한 얼굴의 미아가 들어왔다.
“안녕!”
명랑한 인사였지만 릴리벳은 그보다 미아의 반말이 더 신경 쓰였다.
‘내가 크라우스 공작가에서 내쳐졌다고 지금 반말하는 거야?’
원래대로라면 자신을 올려다봐야 마땅한 주제에. 심기가 불편해진 릴리벳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답하지 않았다.
“으쌰.”
하지만 미아는 그런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았다.
“몸은 좀 어때?”
싱글싱글 웃으며 하는 말에 릴리벳은 다시 한번 울컥할 뻔했다. 자기가 먹여 놓고 할 소리인가?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미아는 실망한 얼굴을 했다.
“그래? 안 되는데.”
릴리벳이 움찔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뭐, 됐어! 그보다 이제 우리 쪽에 협조할 거지? 어차피 크라우스 공작가로 못 돌아가잖아! 가면 너 죽을걸!”
미아의 말에 릴리벳은 눈을 빛냈다.
‘지금 확실히 해 두는 게 좋겠어.’
릴리벳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응?”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모르겠네요. 우리가 무슨 계약이라도 했나요?”
“거야 크라우스 공작가가 반란을 저질렀고, 공작가는 그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러니까 그건 공작가가 질 거예요. 왜 나한테 ‘협조’ 같은 걸 요청하는 건가요?”
“네가 우리가 내민 손을 잡았으니까?”
“네? 하!”
릴리벳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저는 그냥 자발적으로 크라우스 공작가의 잘못을 시인했을 뿐이에요. 그거 말고 무슨 의미가 있죠?”
미아는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음……. 릴리벳아. 정치가 뭔지는 알지?”
“……알아요!”
릴리벳이 발끈해 외쳤다가 다시 도도하게 말했다.
“어쨌든 나는 지금 말하자면 사자 자격으로 와 있는 거예요. 손님인 거죠. 그러니 내게 뭔가 ‘특별한 협조’를 원한다면, 응당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겠죠?”
아마 미아는 자신이 해독제를 준 것만으로 ‘뭔가를 베풀었다’라고 생각할 테지만, 알 게 뭐란 말인가? 모른 척 하면 그만이지.
릴리벳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그러게 누가 순순히 내 몸을 회복시키래?’
순진해 빠져선.
“나는 크라우스 공작가가 황후로 밀던 사람이에요. 당연히 아주 많은 걸 알고 있죠. 구미가 당길걸요?”
릴리벳은 그렇게 말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미아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니? 그런 거 필요 없는데?”
“…….”
“…….”
“다시―”
“필요 없는데?”
미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차피 놔두면 알아서 망할 텐데 굳이?”
“허세도 정도껏 부려야죠. 크라우스 공작가가 망할 거라니―”
“벌써 너네 가신들 아딜한테 붙고 있던데?”
“……!”
“물론 네가 정보를 주면 더 편하고 빠르긴 하겠지! 그걸 가지고 거래하고 싶은 거야?”
미아가 다시 고개를 반대로 갸우뚱했다.
“근데 우리가 거절하면 너 죽잖아. 그냥 죽으려고?”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릴리벳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미아는 그런 릴리벳의 반응에 “아!”하고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려치고서 발랄하게 외쳤다.
“네가 먹은 거 완전한 해독제 아니야! 넌 아직 중독 상태고. 몰랐어?”
“……!?”
“네가 먹은 건 반쪽짜리 해독제야! 제대로 된 해독제는 이거!”
미아가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살랑살랑 흔들었다. 릴리벳의 시선이 그를 따라 좌우로 흔들렸다.
“이렇게 뒤통수칠 거 같아서 그랬던 건데, 어떡해! 나 선견지명 있나 봐!”
릴리벳은 경악했다.
‘그럼 내가 지금 안 낫고 있는 게 완전히 독이 풀리지 않아서……!?’
“이……, 이 사기꾼!”
릴리벳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고함이 튀어나왔다.
“원하는 대로 해 주면 해독제를 주겠다고 했으면서!”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미아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전혀 모르겠네? 우리가 무슨 계약이라도 했어?”
“……!”
“너는 그냥 자발적으로 크라우스 공작가의 잘못을 시인했을 뿐이야. 그거 말고 무슨 의미가 있어?”
자신의 말을 똑같이 되돌려 주는 미아의 모습에 릴리벳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이 계집애가……!”
“이제야 본성을 드러내네. 자, 그래서!”
미아가 손에 든 해독제를 흔들며 아이처럼 웃었다.
“내게 뭔가 ‘특별한 협조’를 원한다면, 응당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겠지?”
“이……!”
릴리벳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이미 크라우스 공작가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면서!”
“흐음.”
미아가 씩 웃었다. 아까까지 짓던 아이처럼 순진한 미소와는 결이 다른 미소였다.
“사실 원하는 건 이미 얻었어. 확신이 필요했거든.”
“확신?”
“응.”
미아는 수줍게 뺨을 붉히며 릴리벳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해독제 더는 없는 거구나?”
“……!”
“난 또 크라우스 공작가에 돌아가면 해독제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네 반응을 보니 아닌 게 확실하네. 게다가…… 말하는 걸 들어 보니 공작가의 정보도 꽤 많이 아는 것 같고?”
아뿔싸.
릴리벳의 얼굴이 굳었다.
‘유도신문이었구나!’
반쪽짜리 해독제였다는 점에 너무 놀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독은 원래 크라우스 공작가에서 나온 것. 미아라면 당연히 공작가에 돌아가면 해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패를 내보인 건 자신이었다.
“……!”
릴리벳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패배였다. 그것도 완벽한.
미아는 그런 릴리벳을 꼭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그러고서 천사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릴리벳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네가 죽지 않으려면 내가 필요한 거네?”
“…….”
“어떡하지! 날 죽이려 한 사람을 이제는 내가 죽일 수 있다니. 너무 짜릿해!”
릴리벳은 미아의 수줍은 속삭임을 들으며 여린 숨만을 쌕쌕거렸다.
‘뭔가……, 뭔가 말해야 하는데.’
머리로는 알면서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크라우스 공작가에서 배운 화술은 목숨을 저당 잡힌 상태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그 크라우스 공작가라는 뒷배마저 사라진 지금에서는 더더욱.
“릴리벳.”
미아는 까르륵 웃으며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네가 잘하면 목숨만은 살려 줄게!”
* * *
라쉬트 평야에서의 반란은 빠르게 모든 이들에게 알려졌다.
백성들과 귀족들이 숨을 죽였다. 황제의 칼날이 다시 번쩍일 시간이었으니까.
예상대로 처형대는 다시 피가 마를 날이 없어졌다.
그리고 그 외에 특이한 현상이 생겨났다.
바로 크라우스 공작가 가신들이 속속들이 그의 세력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