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그럼 이제 급한 불은 껐으니 미아 님은 조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래야 할 상황이었다.
수석 시녀 제인과 궁인들이 그녀가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게거품을 물었기 때문이다.
‘절대 안정을 취하세요. 이 제인은 더는 미아 님이 그런 식으로 위험에 빠지시는 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들 좀 오바야……,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이 보내는 애정이 좋아서 미아는 그냥 그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릴리벳 크라우스의 격퇴를 축하하며 웃어주는 것도 기분이 좋았고 말이다.
‘그치만 역시 앞으로의 일을 준비해야겠지. 무엇보다 제일 의문스러운 문제도 하나 남아 있고.’
미아가 황립 의료원의 수석 의원인 렌나를 떠올렸다.
렌나와 그녀가 알려 준 해독법이 아니었다면 이번 일은 이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렌나는 대체 어떻게 그 독약의 해독제를 알고 있었을까?’
* * *
‘렌나는 오리존 아카데미에서 제 후배였어요. 딱히 특별한 건……, 으음. 그냥 성적이 좀 좋았다는 것 정도?’
‘그래요?’
‘네. 아마 어디서 의학을 배우고 들어온 것 같았어요. 그것도 꽤 자세히?’
크라우스 공작령으로 떠나기 전, 엠브라는 그 독약이 크리소르에게서 건네받은 크라우스 공작가의 비독이라고 말하자 몹시 의아해했다.
‘크리소르가 그런 일을 진행했다는 건 돌아가신 부모님께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렌나는 어떻게 그 해독법을 알고 있지……?’
그러면서 따로 조사해 보겠다고 했으니, 의료원에 가서 무슨 성과가 없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다 나선 정원을 지나치던 미아는 문득 본 적 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찬란한 금발에 녹색 수가 놓인 신관복.
“드미트리…… 씨!”
미아가 잠깐 고민했다.
님을 붙여야 하나? 하지만 니네 대신관이지 내 대신관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냥 아무렇게나 불렀다.
다행히 드미트리는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그가 미아를 발견하곤 감은 눈을 살짝 휘며 웃었다.
“미아 님. 이런 곳에서 또 뵙는군요.”
“그러게요! 또 새라도 떨어져 있나요?”
“다행히 그런 슬픈 사건을 또 목격하진 않았습니다. 그저 바람이 좋아서요.”
부드럽게 대답한 드미트리는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미아 님은…… 몸이 안 좋으셨군요?”
“앗. 네.”
드미트리의 말대로 나들이에서 걸린 감기 기운이 아주 약하게 남아 있었다. 거의 다 낫긴 했지만 말이다.
선선히 대답한 미아가 물끄러미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지금 황실과 크라우스 공작가의 신경전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걸까.’
그런 미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드미트리는 조심스레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미아 님을 위해 기도해도 될까요?”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 괜찮지만, 그거 되게 귀한 거 아니에요?”
보통 신관, 그것도 차기 대신관쯤 되는 이에게 기도를 받으려면 어마어마한 기부금을 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쉽게 해 주겠다니.
‘꿍꿍이라도 있는 걸까?’
그렇게 의심하려던 찰나 드미트리가 말했다.
“신관은 늘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섬기라고 배우곤 합니다. 그 뜻을 따를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드미트리의 얼굴에는 약간 씁쓸함이 맴돌았다.
“물론 신전이 더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자조적인 중얼거림이었다.
망설이던 미아는 입을 오므렸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부탁드려요! 저야 좋죠, 뭐!”
그녀의 대답에 드미트리의 밝아졌다.
“그럼 잠시 그대로 계셔 주십시오.”
“네!”
드미트리는 미아를 세워 놓고 양손을 모았다. 곧 그의 몸에서 금빛 기운이 흘러나왔다.
‘와. 따뜻해…….’
포근한 온기 같은 것이 미아의 몸을 감싸더니, 얼마 안 있어 사라져 버렸다.
“됐습니다.”
드미트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모았던 손을 풀었다.
미아는 휙휙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몸이 좀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고마워요!”
“별거 아닌 힘인걸요. 만능도 아니고 말입니다.”
“으음. 하긴 불치병 같은 건 못 고치죠?”
“예. 여신께서는 거기까지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드미트리의 미소가 슬퍼졌다. 그는 마치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먼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슬픈 일입니다. 사람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야 봐야 하는 건……. 그 때문에 사람들이 온갖 해괴한 방식을 써서라도 병을 고치려고 하니까요.”
“해괴한 방식이요?”
“예.”
드미트리가 조금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때는 다른 세계의 자신과 영혼을 바꿀 수 있다는 낭설까지 떠돌았거든요.”
예상치 못한 말에 미아가 멈칫했다.
‘영혼을…… 바꿔?’
심장 부근에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듯했다.
“혹시 영혼을 바꾼다는 게 어떤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낮아졌다.
“음……. 현재 자신이 처한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육신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믿곤 한 가설입니다.”
드미트리는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로도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다른 세계의 자신과 영혼을 바꾸면, 서로의 영혼이 지평선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재구성되어 더는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
미아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그리고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어릴 때부터 앓았던 ‘미아 셀레스티얼’.
그러나 빙의 이후, ‘미아 셀레스티얼’의 몸은 갑자기 아프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아팠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건강하고, 튼튼한…….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미아가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드미트리가 살짝 곤란하단 듯이 미소 지었다.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알아도 하지 못하실 테니까요.”
“네?”
“사이비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가도 결국은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하죠.”
드미트리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미소 지었다.
“그 의식을 진행하려면 대량의 피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아…….”
미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다른 생각에 휩싸인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미아의 머릿속에 셀레스티얼 백작가의 하인들이 쑥덕거리던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몸이 안 좋으면 가만히 침대에서 뒤지길 기다리기나 할 것이지, 왜 포도밭까지 기어들어 가서 그 짓을 한 거래? 관심받고 싶었나?’
미아가 빙의하기 전, ‘미아 셀레스티얼’은 자살하려던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셀레스티얼 백작가의 포도밭에서, 그 넓은 포도밭을 다 헤집어 놓아 온 땅이 붉게 물든 상태로…….
* * *
나선 정원에서 빠져나온 드미트리에게 곧 누군가 다가왔다.
“드미트리 님. 여기 계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드미트리가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아도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 나온 행동이었다.
“세비앙.”
그의 부름에 푸른 머리를 한 신관이 크게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어디 가셨나 했더니!”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어. 황궁의 정원은 관리가 잘되어 있더군.”
드미트리가 온화하게 말했지만, 세비앙은 제 이마를 딱 쳤다.
“드미트리 님. 여러 번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황궁은 위험한 곳입니다. 특히 그 황제가 있는 이상은요. 만약 누구랑 마주치기라도 하면…….”
“하하…….”
“……하셨습니까?”
드미트리는 세비앙의 절규를 흘려넘기며 정원에서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미아…… 셀레스티얼.’
산새가 지저귀듯 말하는 여자였다. 늘 조용하게 말하고 움직이는 신전에서는 듣기 힘든 경쾌한 음성은 듣는 사람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괜찮을 거야, 세비앙. 그런 확신이 들어.”
“드미트리 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면 확실하겠지만 말입니다…….”
세비앙이 한숨 쉬었다.
“이번에 황제랑 크라우스 공작가가 거하게 붙지 않았습니까. 그 일로 정말로 분위기가 살벌합니다. 특히 크리소르 황태후는……, 으으. 무서운 여자예요.”
세비앙이 말하다 말고 몸을 떨었다.
정치 이야기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드미트리는 화답하지 않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보다 대신관님은?”
드미트리의 물음에 세비앙이 주변을 살피다 작게 답했다.
“황태후 궁에 계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성화십니다.”
하아. 드미트리가 결국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비위를 맞추라고?”
“예. 요하네스 대신관님이 물러나시면 드미트리 님이 차기 대신관이시니까요. 현재 대신관 님은 아무래도 황태후와 길게 연을 이어 왔으니…….”
“…….”
그 말에 드미트리는 미소 지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신을 모셔야 할 신관이 권력자의 눈치를 보다니. 그리고 그걸 주도하고 있는 게 대신관이라니.
‘아까 뵈었던 미아 님도 크라우스 공작가에서 다쳐 오신 거겠지.’
최대한 속세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지만, 차기 대신관이라는 입장 때문에 아예 귀를 닫고 살 수는 없다.
황제의 애완동물이 크게 다쳤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드미트리가 다시 미아의 목소리와 그녀가 풍기던 분위기를 떠올렸다.
‘그런 사람의 어디가 그리 거슬린다고.’
드미트리는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황제가 그걸 가만두는 게 용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