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미아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얘들아!”
“…….”
그 한마디에 좌중이 눈을 부릅떴다.
……얘들아?
날고 기는 귀족 영애들이 생전 들어 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초면에 반말이라니?
미아를 무시하고 욕보이라는 힐데가르트의 지령도 까먹은 채, 영애들 중 한 명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지금 저희한테 말씀하신 거예요?”
미아가 꺄르륵 웃었다.
“응!”
“하?”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벌린 그녀들을 향해, 미아는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고개가 뻣뻣하다?”
“……!”
“아이, 내가 명색이 폐하의 애완동물인데, 폐하께 존경을 표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까 좀 속상하네!”
영애들이 당황으로 숨을 삼켰다.
물론 오르퀘니나에서 황제는 불가침의 존재다. 그의 그림자마저 밟아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하물며 그의 애완동물이라면야.
그렇다고 그걸 이렇게 당당하게 이용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저, 미아 님!”
옆에서 힐데가르트가 급하게 나섰다. 그녀는 상황이 초장부터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자 당황한 눈치였다.
“저희는 워낙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어서 서로 간의 위아래를 따지지 않…….”
“응. 그건 너네 사정이고!”
미아가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힐데가르트를 무시한 채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걸어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상냥하게 눈을 휘어 웃었다.
“아직도 뻣뻣하네?”
영애들은 힐데가르트를 힐끔거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릴레 후작 영애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진 않았지만, 미아 뒤에 있는 건 피에 미친 폭군이다.
그사이 미아는 몹시 상심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너희들이 눈치 볼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아서 미아는 너무 슬퍼……. 어떡하지? 귀엽고 깜찍하지만 마음이 여린 내가 폐하께 쪼르르 달려가서 이걸 다 말해 버리고 싶어지면?”
“그, 어, 어서 오세요!!”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말에 영애들이 결국 한 명씩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아 님을 뵙습니다.”
“실례했어요! 너무, 아름다우신 나머지…….”
다른 건 몰라도 황제의 이름만큼은 거역하기 힘들었다. 최근 들어 그 황제가 물밑에서 이 애완동물의 심기를 거스른 자들을 모조리 ‘청소’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미아는 고개 숙인 영애들 앞에서 사랑스러운 분홍색 눈을 깜빡였다.
“진짜? 사실 우리 폐하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쁘대!”
“그, 그럼요! 저는 문이 열리자마자 미아 님과 사랑에 빠질 뻔했다니까요!”
“꺄르륵, 너희 보는 눈이 있구나!”
미아는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더니 테이블을 살폈다.
빈 의자는 하나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아마 힐데가르트가 앉았어야 했을 자리였다.
미아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굳은 힐데가르트를 향해 꺄르륵 웃었다.
“차!”
* * *
힐데가르트는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찻잔을 쥐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눈앞에서 자신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미아 셀레스티얼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어야 했을 영애들은…….
“미아 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정말요. 어떻게 이렇게 피부가 고우세요? 아기 같아요!”
전부 미아 옆에서 어떻게든 잘 보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힐다 양,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우세요!’
‘힐다 양은 어떻게 이렇게 머릿결이 고우신가요?’
그들이 지금 미아에게 하는 말은 평소 자신에게 하던 말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강자에게 약한 비열한 성정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당초의 예상과 달리 꿔다 놓은 보릿자루 꼴이 된 힐데가르트는 간신히 미소만 유지한 채 미아를 노려보았다.
미아는 영애들 사이에서 태연히 말을 주고받다,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힐데가르트를 향해 걱정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힐다 양! 피곤하세요? 오늘따라 말수가 없으시네요!”
그녀의 질문에 힐데가르트가 냉랭하게 답했다.
“……조금요. 날파리가 윙윙대는 소리 때문에 참을 수가 없네요.”
힐데가르트의 말에 주변의 영애들이 얼굴을 굳혔다. 자신들을 이르는 말인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때, 미아가 놀란 얼굴로 입을 가렸다.
“정말요? 파리요? 아……. 릴레 후작가에는 벌레가 좀 많은가 보죠……?”
미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좀 껄끄럽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슥 문질렀다.
울컥한 힐데가르트의 뚜껑이 열렸다.
“릴레 후작가는 더럽지 않아요!”
“하지만 파리가 있다고…….”
“그건!”
‘네 주변의 간사한 거머리들을 말하는 거잖아!’
그렇게 외치려던 힐데가르트가 멈칫했다. 늘 자기 수족처럼 움직이며 목표물을 깔아뭉개던 영애들이 은근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다음 말을 내뱉기를 기다리듯이 말이다.
“큭…….”
힐데가르트가 하려던 말을 삼켰다. 아무리 사이가 틀어졌더라도 대놓고 상대를 적대하는 건 귀족으로선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 그게 맞는데…….
“역시 파리 있는 거죠? 으앙! 난 벌레 싫은데!”
울상을 지으며 주변을 살피는 미아를 보며 힐데가르트는 주먹을 쥐었다. 혈압이 올라서 당장이라도 머리가 터질 듯했다. 티 타임이고 나발이고 당장……!
‘어떻게든 몰아세울 만한 게…….’
그때, 뭔가를 떠올린 힐데가르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미아 님. 혹시 알고 계신가요?”
옆자리의 영애과 니들리치의 온갖 베리 컵케이크에 대해 얘기하고 있던 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뭘요?”
“요즘, 귀족들이 의문사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힐데가르트가 눈을 내리깔고 처연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 영애 중 한 명이 약간 겁을 먹은 채 끼어들었다.
“히, 힐다 양! 그런 이야기는 티 타임엔 어울리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하지만 전 그들이 걱정되어서……. 귀족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 아시잖아요?”
“알지만 때와 장소가……!”
“지금 릴레 후작가의 티 타임에서 릴레 후작 영애인 제게 때와 장소가 맞지 않다고 말씀하신 게 맞나요?”
“윽……!”
힐데가르트의 서늘한 태도에 영애는 입술을 깨물고 물러났다.
미아는 전전긍긍하는 영애들 사이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힐데가르트는 비밀을 알려 준다는 듯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게 모두 미아 님께 거스른 자들이라고 하더군요.”
“……네?”
미아가 순진한 소리를 내며 반문했다. 힐데가르트는 그녀의 낯이 희게 질리기를 고대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이에요. 믿지 못하시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미아 님의 존재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고 있을지도 몰라요…….”
“……정말요? 저 때문에?”
“거의 확실해요. 어떤 기분인가요? 자신의 존재가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함부로 앗아가는 기분은?”
미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힐데가르트의 조소가 짙어졌다.
“물론 미아 님의 잘못은 아니지만…… 다른 분들이 안타깝네요. 그들도 살고 싶었을 텐데……. 저라면 제 존재 자체가 남에게 민폐라는 걸 깨달았을 때, 그냥 집 밖으로 안 나오는 걸 택하겠어요. 모두를 위해서요.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쐐기를 박듯 힐데가르트가 목소리를 낮추고 웃었다.
“나 때문에 다른 이가 죽었으니 말예요.”
그 순간이었다.
미아의 만면에 크고 환한 웃음이 차올랐다.
“멋지다!”
그리고 그녀는 짝사랑하던 남자의 고백을 받은 열다섯 소녀처럼 발그레한 뺨으로 수줍어하기 시작했다.
힐데가르트를 비롯한 주변 영애들이 멍한 얼굴을 했다.
‘……멋지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목격한 그들은 입을 벌린 채 사고를 정지했다.
미아는 그런 반응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새삼스럽게 수줍어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 뒤에서 죽였구나! 난 또 아딜이 천하의 둘도 없는 호구인 줄 알고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네……? 호구……?”
그 황제가?
범죄를 저지른 귀족들을 늘어놓고 차례차례 목을 치던 그 인간이?
범죄자는 곱게 죽일 수 없다며 일부러 무딘 칼까지 골라 왔다던 그 황제가?
“역시 아딜은 최고야! 그치!? 드디어 발 뻗고 자겠네! 으음, 그런데 왜 비밀로 했지?”
공황에 빠진 사람들을 두고 혼자 신나서 뭔가를 떠들던 미아가 손뼉을 짝 치며 까르륵 웃었다.
“부끄러움 타나 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결론에 힐데가르트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미, 미아 님. 사람이 죽었다니까요……?”
미아가 뭐가 문제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죽일 만하니까 죽였겠죠?”
“…….”
“범죄자, 반동분자, 적국의 간첩, 아니면 그냥 산소가 아까운 쓰레기들! 넷 중 하나일 거 아녜요!”
“그, 그건 모르는…….”
“저 때문에 죽은 거면 그게 맞을걸요? 제가 이래 봬도 쓰레기 보는 눈은 좀 있어서! 아딜이 분리수거 해 줬다니까 너무 좋다!”
그렇게 말한 미아는 싱글싱글 웃다가, 저 혼자 킥킥대기를 반복했다.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느껴지는 그 모습에도,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은 다른 이들은 더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눈앞의 또라이가 어쩌면 황제보다 더한 또라이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개기지 말자.
* * *
티 타임은 찬물이라도 맞은 듯 싸늘한 분위기에서 끝났다. 오로지 미아만이 끝날 때까지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저, 그럼 저희는 이만……!”
힐데가르트를 제외한 영애들은 상어를 피하는 정어리 떼처럼 빠르게 릴레 후작저를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건 미아와 힐데가르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