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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87화 (87/193)

87화

릴레 후작저의 정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후…….”

힐데가르트가 처연하리만치 연약한 한숨을 흘리며 머리카락을 넘겼다. 바람에 흩날리는 은발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그 우아한 동작이 끝나고 바람이 멈추자, 그녀는 삼백안을 치뜨며 차가운 낯으로 입을 열었다.

“너 돌았지?”

“이제 안 거면 좀 느리다?”

싱글싱글 웃던 미아가 바로 답했다.

“그래서? 또 쪼르르 황제한테 달려가서 아양이라도 떨게?”

“이 동네 애들은 그런 말밖에 못 하니?”

“별 예쁘지도 않은 게 황제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럼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어?”

조소를 흘린 힐데가르트가 미아를 노려보았다.

“애초에 무슨 생각이길래 그렇게 겁이 없어? 네 자리가 그렇게 오래갈 것 같아? 웃기지 마. 너 같은 건 그냥 잠깐 데리고 노는 용도야. 그것도 모르고 주제 파악 못 하고서―”

그때였다. 굵은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힐다!”

힐데가르트는 눈 깜빡할 사이에 표정을 정돈하고 평소의 처연한 미인으로 되돌아왔다.

“…….”

하지만 인상을 찌푸린 그녀의 모습에서 별로 내키지 않는 상대의 등장이라는 것을 미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곧 멀리서 남자 한 명이 성큼성큼 두 사람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힐다! 손님이야? 나도 인사해도 될까?”

힐데가르트는 거의 이를 갈다시피 하며 작게 한숨 쉬었다. 그런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사내를 맞이했다.

“요제프. 이게 무슨 무례야? 손님과 대화 중이잖아.”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남자 쪽을 바라보았다.

‘요제프 크네히트라면 분명 힐데가르트의 약혼자였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린 미아는 이쪽으로 다가오던 요제프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

그 순간, 요제프는 인사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

미아는 갑자기 뻣뻣해진 남자의 태도를 무시하고는 그를 살폈다.

눈앞에 나타난 ‘요제프’는 더티 블론드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고, 키가 큰 편이었다. 외모는 평범했지만 덩치가 제법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갈색 눈은 미아를 보며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저래?’

미아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한 순간.

“아흐응……!”

요제프의 입에서 기묘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마치…… 첫눈에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말이다.

‘……미친놈인가?’

미아가 움찔해 물러났다. 원래 저딴 놈인가 싶어 힐데가르트를 힐끗거렸으나, 힐데가르트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요제프?”

요제프는 힐데가르트의 말을 무시하고 척척 다가와, 몹시 신경을 쓴 듯한 동작으로 미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늘 제 눈앞에 나타난 천사님의 이름을 여쭈어도……?”

난데없이 멜로 눈깔에 강타 당한 미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뭐야. 왜 이래?’

다행히 힐데가르트가 한 걸음 나서 주었다.

“요제프, 뭐하는 거야? 제대로 인사드려. 이쪽은 폐하의 애완동물이신 미아 님이셔.”

“아! 미아 님……! 이름마저 아름―”

“미아 님. 이쪽은 제 약혼자의 요제프 크네히트 백작입니다. 그보다, 가시던 중이셨죠? 가문의 마차를 빌려드릴게요.”

“네!”

미아가 빠르게 답했다. 왠지 기분 나쁜 눈빛을 쏘아 대는 저 남자와 한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는 강렬한 예감이 스친 것이다. 보아하니 힐데가르트에게도 요제프는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약혼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두 여자의 뜻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한 남자가 미아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소개해드려도 될까요? 저는 요제프 크네히트 백작입니다.”

그가 목소리를 그윽하게 내리깔고서 말했다. 미아는 간신히 울상 짓지 않은 채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악수만……. 악수만 하고 튀는 거야!’

미아가 침을 꿀꺽 삼킨 뒤, 애써 웃으며 요제프 크네히트의 손을 맞잡았다.

“네에, 저는 미아예요! 폐하의 애완…….”

“하아……. 보드라워…….”

“……발, 동물입니다.”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을 할 뻔한 미아는 겨우 손을 뿌리치지 않고 악수를 끝마쳤다. 그 짧은 사이에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반면 요제프는 볼에 홍조를 띤 채 미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나저나 미아 님께서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다음에 크네히트 백작저로 초대 드려도 될까요?”

“아뇨!”

“요제프.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었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요제프의 태도에 힐데가르트의 어조도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그걸 요제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어? 아. 그거? 나중에 하지 뭐.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보단 미아 님을 배웅해드려야겠지?”

“혼자 갈 수 있는데요!”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분을 누가 납치라도 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요제프. 미아 님을 귀찮게 해드리고 있잖아.”

어느새 힐데가르트의 목소리는 살얼음보다 차가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요제프는 되레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힐데가르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귀찮긴! 배웅인데. 너야말로 이 귀한 분을 호위도 없이 그냥 보낼 생각이야?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후……. 우리 가문의 마차에 태워 보내드릴 거야. 됐어?”

“뭐, 그럼 괜찮겠지만…….”

릴레 후작가의 이름이 나오자 요제프는 태도를 미적지근하게 바꿨다. 그러나 미아를 흘끗 보더니, 다시 뺨을 붉히곤 말했다.

“그렇지만 역시 남자가 있어야지. 혹시 모르니까…….”

“요제프!”

기어이 힐데가르트가 언성을 높였다.

“오늘따라 대체 왜 그래, 힐다? 신사라면 당연히 숙녀분을 에스코트해야 하는 거잖아! 아니면…….”

요제프는 그 모습을 보고도 귀를 막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너 설마…… 질투해?”

“뭐?”

제삼자인 미아마저 일순간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의 힐데가르트를 두고 요제프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쯧. 힐다……. 네가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걸 알고 있지만, 너보다 더 예쁜 여자를 굳이 질투할 필요는 없잖아. 난 네 약혼자인걸? 게다가 난 여자의 외모는 보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건 너뿐이니까 안심해!”

기어이 힐데가르트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한참을 무표정으로 서 있다가, 기름칠이 덜 된 기계처럼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미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아는 그녀의 하얗고 갸름한 얼굴 위에서 푸른 눈이 먹이를 발견한 상어처럼 서슬 퍼렇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힐데가르트 릴레는,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의 미모가 주목받는 것을 싫어한다…….’

미아의 머릿속에서 원작의 문장이 스쳐 지나가는 것과 동시에, 힐데가르트가 뇌까렸다.

“……그래. 어디 맘대로 해 보든가.”

섬뜩한 목소리였다.

* * *

당연하지만 그 이후로 힐데가르트와 따로 만날 일은 없었다. 초대도 오지 않았고, 미아 역시 연락하지 않았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곧 입질이 오겠지.’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 본 그 눈. 절대 그냥 넘어갈 눈이 아니었다.

그때, 생각에 잠겼던 미아를 세레니티가 불렀다.

“미아. 혹시 이 부분 알려 줄 수 있나요?”

“응? 얼마든지!”

미아는 정신을 차리고 세레니티가 보여 주는 문제를 살폈다.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가 실려 있었다.

“요아힘이 내준 문제지? 요즘도 따로 만나는 거야?”

“황립 도서관에서요.”

“흐음!”

미아가 은근슬쩍 세레니티의 얼굴을 살폈다.

‘딱히 좋아하는 기색은 없네?’

현재까지 세레니티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요아힘이었다. 그런데도 러브 라인이 진전되는 기미가 전혀 없었다.

‘역시 섭남이라 그런가?’

어쨌든 세레니티의 선택이 중요한 거지만.

미아가 몇 가지 도움 될 만한 책을 종이에 적어 주었다.

“아무튼 이 문제는 단순히 가문 간의 세력이나 재산 규모만 파악해서 될 게 아니야. 나누친과의 무역 협정을 찾아보는 게 좋겠어!”

“아아! 외국과의 거래까지 생각해야 하는군요? 고마워요, 미아!”

세레니티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깨를 으쓱한 미아가 문득 물었다.

“그보다 아버지한텐 연락 없어?”

그 말에 다시 문제에 집중하려던 세레니티가 멈칫했다. 그녀가 쥔 펜촉이 종이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머뭇거렸다.

“지속적으로 오고는 있어요. 제가…… 무시할 뿐.”

“그래도 돼?”

“괜찮아요. 항상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시거든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지만 묻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미아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선 시선을 돌렸다.

‘세레니티의 입장도 굉장히 복잡하겠지.’

아버지는 황제를 꼬시라고 부추기지, 정작 자신은 황태후의 입김으로 황궁에 들어와 있지.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황태후 궁에 발길을 끊은 미아와 달리 세레니티는 여전히 황태후 크리소르와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었다.

‘짚고 넘어가자니 괜한 싸움에 끌어들이는 것 같고, 무시하자니 세레니티의 입장이 난처해 보이고.’

결국, 미아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알았지? 어떤 부분에서든 말이야.”

잠시 눈을 크게 떴던 세레니티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미아.”

당당한 말에 미아는 일단 그녀를 믿기로 했다. 원작의 세레니티도 눈치가 아주 빨랐으니 말이다.

게다가 최근 세레니티는 타고난 매력으로 힐데가르트를 따르던 영애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원래 의붓언니들 때문에 사교계엔 두문불출하던 세레니티였지만, 이대로라면 무사히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있으리라.

똑똑.

안심하고 다시 찻잔을 들려는 미아의 귀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의 제인이 들어왔다.

“초대장이 왔는데…….”

그녀가 은쟁반을 내밀었다. 푸른 빛의 초대장은 하나뿐이었다.

“세레니티 듀레인 님께만 도착했습니다.”

왔다. 미아가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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