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릴레 양에게 초대받았다고요?”
“응! 내일 릴레 후작저로 오래.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고.”
미아가 쿠키를 먹으며 답했다. 그녀의 말에 세레니티는 두 손을 맞잡고 기쁜 듯이 웃었다.
“역시 미아예요! 미아가 정말 멋지고 귀엽고 예쁘다고 착하다는 걸 릴레 양도 바로 깨달았나 보네요! 그야 미아니까 당연하지만!”
쿠키를 집던 미아의 손이 멈칫했다.
‘그건 좀 콩깍지가 아닐까요, 여주님.’
미아는 머쓱하게 손을 추스르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렌은? 별일은 없었어?”
대수롭지 않게 묻는 척 했지만, 실제로는 꽤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세레니티는 듀레인가에서 내쫓기다시피 한 처지였고, 그러니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들에게 있어 그녀는 헐뜯기 딱 좋은 제물처럼 보일 확률이 높았다.
‘이번 살롱에서도 분명 누가 건드렸을 텐데.’
하지만 세레니티는 금빛 눈을 다정하게 빛내며 말했다.
“모두 잘해 주셨어요. 친절하셨고요.”
일말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는 해사한 얼굴이었지만, 미아의 날카로운 눈은 그녀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원작에서 세레니티가 거짓말할 때 하던 습관이었다.
‘뭐가 있었구만!’
나직하게 한숨 쉰 미아가 손수건으로 손을 닦아 내고 세레니티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렌.”
지근거리에서 세레니티를 응시하며 미아가 진지하게 말했다.
“버티기 힘들어지면 말해. 내가 다 해결해 줄게.”
“…….”
세레니티의 금빛 눈이 일순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귓불을 붉히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미아는 제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요.”
“응?”
“그리고 너무 상냥해요. 저야말로 미아를 지켜 주고 싶은데…….”
“난 렌이 있어서 늘 도움을 받는걸?”
“아뇨. 저는…….”
세레니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이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 미아가 원하던 잭 아저씨에 대해…….”
“렌.”
그때, 세레니티의 말을 미아가 가로막았다.
“괜찮아. 무리해서 말할 것 없어. 날 위해서 말하지 않는 거라며? 난 그런 렌의 의견을 존중해!”
미아는 부러 명랑하게 말하고서 배시시 웃었다.
정확히는 율리시즈를 통해 이미 알아냈기 때문에 상관없는 거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세레니티가 자책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세레니티는 상기된 뺨으로 해사하게 웃었다.
“미아……. 대신 제가 미아가 찾는 정보를 꼭 알아낼게요!”
“응! 그건 부탁해!”
미아가 방긋 웃었고, 세레니티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미아, 혹시 찾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가요? 사교 모임이라고는 들었는데,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모인 곳인지 알아야 찾기가 쉬울 것 같은데…….”
의문 가득한 금빛 눈에 미아가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라스 후작의 꼬리를 밟을 수 있는 곳이야!’
……라고 말하면 세레니티가 대경실색하고서 말릴 게 분명했다.
고민 끝에 미아는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젊은 귀족 영식, 영애들이 짝을 찾는 곳이야.”
“짝……, 네?”
“짝.”
“…….”
세레니티가 습관적으로 짓고 있는 미소에서 약간의 혼이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아는 멋쩍게 쿠키만 우물거렸다.
‘내 이미지는 이제 진짜 나락으로 가겠지만, 뭐, 상관없어! 모든 길은 망명으로 통하니까!’
새삼스럽게 체면을 챙길 이유도 없으니 그리 나쁜 대답은 아니었다. 세레니티도 이 정도 대답이면 ‘일탈이 필요하구나’하고 그냥 넘어가리라 생각했다.
“미아. 그게 정말인가요?”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조금 분노한 듯이 보였다.
“응?”
“설마 폐하와…… 행복하지 않은 건가요?”
“응켁.”
당황한 미아의 목구멍에서 막 넘어가던 쿠키가 도로 튀어나왔다.
오해를 피하려고 한 말인데 더 엄청난 오해가 생겨났다. 잠시 공황에 빠졌던 미아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자, 잠깐! 그, 그런 거 아니야!”
이 오해만은 고쳐 줘야 했다. 남주의 자존심이 아닌가!
하지만 세레니티는 이미 단단히 오해한 듯했다.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이 분노로 휘날리는 착각마저 보일 정도였다.
“미아! 여자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남자는 만나면 안 돼요!”
“알아! 안다니까!? 그러니까 아딜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아니 그 이전에 우린 결혼한 것도 아니고……!”
말하다 말고 미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작 아딜로트는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텐데 혼자서 열심히 부정하고 있으려니 민망했던 것이다.
세레니티는 그런 미아의 태도를 보고 도리어 더 크게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야차 같은 얼굴로 미아의 손을 붙들었다.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미아! 제가 노력해서 거기가 어딘지 알아낼게요! 그리고 진정으로 미아가 행복할 수 있길 바랄게요! 새 사랑을 찾아요, 미아! 몇 명이어도 좋으니까!”
“뭘 보고 다니는 거야, 너!?”
세레니티의 마지막 말에 미아가 기함했다.
“미아만 행복할 수 있다면 상관없어요!”
“난 한 명이면 되거든!?”
“그 한 명이 미아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고 있으니까 새 사랑을 찾으려는 거잖아요!”
세레니티가 흐느끼다시피 하며 외쳤다. 그녀는 정말로 서러운 모양이었다.
“우리 귀엽고 깜찍한 미아를 데려가 놓고 외롭게 만들다니……!”
“으아아응아!”
미아가 잽싸게 세레니티의 입을 막았다. 더 들었다간 민망함에 얼굴이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쇄골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미아를 보며, 세레니티는 강렬한 안쓰러움의 눈빛으로 미아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미아……. 저 힘낼게요.”
“…….”
더는 저 공고한 오해에 반박할 기력을 미아가 축 처진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미아는 릴레 후작저로 향했다. 명목은 릴레 후작 영애의 친목 도모 티 타임이었다.
‘제 친구들을 소개시켜드릴게요.’
힐데가르트에게는 친위대에 가까운 영애들 몇이 있었다.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서로의 성향과 목적이 일치해 가까이 지내는 이들이었다.
힐데가르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영애가 있으면 그들만 모인 티 타임에 초대해 면박을 주고 상대를 웃음거리로 만들곤 했다.
원작에선 세레니티가 그 꼴이 되었다.
‘그게 내가 된 걸 보면, 어그로는 확실히 끈 모양이야.’
이로써 힐데가르트의 레기아가 세레니티에게 향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실히 할 필요는 있었다. 오늘은 그를 위해 초대를 수락한 것에 가까웠다.
마차 창문 너머로 보이는 릴레 후작저의 웅대한 모습을 보며 미아는 문득 릴레 후작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중립파 귀족의 우두머리인데, 용케도 내 방문을 허락했네?’
깐깐하기로 이름난 릴레 후작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딸바보라는 설정이었으니, 힐데가르트가 매달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릴레 후작도 아딜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미아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마차가 멈췄다.
릴레 후작저 앞에는 힐데가르트가 미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싫을 텐데도 예의를 차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 남들 체면을 신경 쓰는 여자였다.
“미아 님.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힐데가르트가 달빛처럼 아름다운 은발을 빛내며 사붓이 미소 지었다.
‘예쁘긴 예쁘다.’
잠시 미모에 홀리려던 미아는 이내 감상을 털어 내고 선물을 내밀었다.
“초대 고마워요, 힐다 양! 이건 세레니티가 쓰는 것과 같은 머리빗이에요. 비취로 만든 건데, 음이온……이 나와서 머릿결이 좋아진대요!”
맨정신으로 음이온을 들먹이려니 가슴이 답답해 왔지만 미아는 뻔뻔스럽게 웃으며 상자를 내밀었다.
“어머, 미아 님……. 감동적이에요. 저를 생각해 주시는 미아 님의 마음이 느껴져요!”
역시나 힐데가르트는 몹시 기뻐하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렌이 쓰는 거랑 같다는 말 때문이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레니티의 머리카락은 아무런 관리가 필요치 않은 순수 자연산 무공해 비단결이란다.
미아가 속을 숨기고 활짝 웃었다.
“물론 힐다 양의 머릿결은 이미 너무 좋아서 이런 건 필요 없겠지만요!”
“미아 님도 참…….”
힐데가르트가 수줍게 뺨을 붉혔다. 칭찬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녀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뒤에 있던 시녀에게 빗을 넘겼다.
“예니. 이걸 내 방의 보석함에 넣어 주겠니?”
“네. 아가씨.”
힐데가르트의 뒤에서 시녀가 허리를 굽혔다.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꽤 예쁘장한 시녀였다. 그녀를 발견한 미아의 눈초리가 한순간에 예리해졌다.
‘저 애가 나중에 힐데가르트의 명령을 받고 세레니티를 해치는 시녀겠지?’
레기아 용액에 맞고 괴로워하던 원작의 세레니티가 떠올랐다. 신관의 도움으로 무사히 회복하긴 했지만, 묘사가 워낙 적나라했던 터라 책을 읽는 미아까지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미아는 선물을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시녀를 주의 깊게 눈에 담은 뒤 몸을 돌렸다.
응접실에는 귀족 영애 네 명이 이미 둘러앉아 있었다.
“여러분.”
힐데가르트가 응접실로 들어서며 상냥하게 말했다.
“미아 님이세요. 오늘 티 타임에 와 주신 귀한 손님이시죠.”
힐데가르트의 인사에 모두 미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인사 한 마디 없이 미아의 위아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낮은 키득거림이 들려왔고, 말하지 않아도 경멸과 조소가 느껴졌다.
힐데가르트는 옆에서 난처한 척을 할 뿐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속으로 고소해하고 있는 것이 선연히 느껴졌다.
그 사이에서 미아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분명 이 사태를 우아하고 고상하게 처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명색이 폭군의 애완동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