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혹시 아직도 ‘잭 아저씨’에 대해 말해 줄 수 없어요? 난 정말로 잭 아저씨를 만나야 해요.”
그 말에 세레니티의 금빛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뭔가를 망설이다가, 이내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미아. 하지만 이건 미아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네?”
뜻밖의 말에 미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미아가 잭 아저씨를 왜 찾는지는 모르겠어요. 나쁜 뜻은 없어 보이지만…….”
세레니티의 아름다운 얼굴에 옅은 수심이 차올랐다.
“제게도 사정이 있으니, 이해해 주면 안 될까요?”
그녀의 말에 미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분홍색 눈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제인은 복도에 있었고, 방에는 둘뿐이다.
“렌. 혹시…….”
미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녀는 슬쩍 세레니티의 손에서 수틀과 바늘을 받아 갔다.
“황태후 폐하께서 렌에게 뭔가를 시키셨나요?”
미아는 질문한 뒤 재빨리 세레니티의 모습을 살폈다. 원작에서 세레니티는 버릇 하나가 있었다. 바로 거짓말을 할 때 자신의 양손을 맞잡는 버릇이었다.
“아뇨. 그런 건 없었어요.”
하지만, 의아하게 대답하는 세레니티의 두 손은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대답이 부족하다 여겼는지 몇 마디 덧붙이기까지 했다.
“황태후 폐하께서 미아를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잘 보필하라고만 하셨어요.”
“그렇구나…….”
그럼 세레니티는 황태후의 첩자가 아닌 게 맞겠지?
그때, 생각에 빠진 미아를 가만히 지켜보던 세레니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아. 황제 폐하와 황태후 폐하 사이의 첨예한 갈등 관계에 대해서는 저도 알고 있어요.”
“……!”
깜짝 놀란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중립적으로 처신하고 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미아와, 미아가 좋아하는 황제 폐하께 해가 될 일을 하진 않을 거예요.”
세레니티는 다정히 웃으며, 미아의 손에서 다시 수틀을 받아 갔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수를 놓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미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이래야 여주지.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둘 사이를 모르지 않을 테니까.’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면 진위를 의심했겠지만, 말한 사람이 세레니티다. 소설 속에서 늘 바르고 공명정대하던 모습의 세레니티 듀레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렌이 이렇게까지 말했다는 건, 렌은 황태후의 첩자가 아닌 게 맞아.’
마부인 잭 아저씨의 이야기를 왜 알려 주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황태후 편이어서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천천히 세레니티의 마음을 녹여 가면서 해결하면 될 일이다.
‘그렇다곤 해도 렌이 끝까지 알려 주지 않는 경우도 대비해야 해.’
그렇다면 역시 정보원을 두는 게 좋은데.
다행히 미아는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 나온 정보 길드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 찾아가 봐야겠어. 아딜이 내보내 주면 말이지만.’
생각을 마친 미아가 방긋 웃었다.
“렌! 맨날 방에서 너무 지루하진 않아요? 아무리 황태후 폐하의 명령이더라도, 너무 저랑 붙어 있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기껏 황궁에 들어왔는데! 하고 싶은 건 없어요?”
세레니티가 금색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잠시 뒤 조금 수줍게 말했다.
“사실…… 가 보고 싶은 곳이 있긴 해요.”
“어디요? 내가 아딜한테 부탁해서라도 다 보여 줄게요!”
“그런 곳은 아니에요.”
미아의 과장된 태도에 세레니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황립 의료원에 가 볼까 해요. 혹시 도울 수 있는 게 없을까 하고…….”
“아.”
미아가 원작을 떠올리며 탄성을 흘렸다.
‘원작에서도 렌은 입궁하자마자 황립 의료원에서 의원들을 돕기 시작했지.’
테레지아의 등장도 그렇고, 아무래도 원작을 따라가는 경향성이 있긴 한가 보다.
“물론 저는 의원 자격증 같은 건 없지만, 밖에서도 의료원의 일을 돕곤 했어서요.”
세레니티는 말하면서 미아의 눈치를 보았다. 미아가 의료원에 가는 건 어렵겠다고 말하면 당장이라도 그냥 말해 봤을 뿐이라고 웃어 줄 게 뻔했다.
‘그런 얼굴을 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어디 의료원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어야지.’
의료원은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의 주무대.
말인즉 렌이 개고생을 하는 곳이다.
약물 중독. 극약 흡입. 지지고 볶고 쓰러지고 다치고…….
‘가지 말라고 할까? 하지만 원작 때문에라도 결국엔 엮이게 될 것 같아.’
그럴 바에야 가까이 두고 자신이 막아 주는 게 낫다. 고심 끝에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가요!”
* * *
미아는 세레니티와 함께 황립 의료원으로 향했다. 타이밍이 좋았는지, 때마침 엠브라가 의료원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가씨!”
초록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가오던 엠브라는, 세레니티를 보곤 멈춰서 눈을 비볐다.
‘알아요, 엠브라. 우리 렌, 엄청 예쁘지…….’
미아는 가만히 엠브라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엠브라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와 인사했다.
“아가씨, 안녕하세요!”
“엠브라. 잘 지냈죠?”
“네! 그런데 이쪽은…….”
엠브라가 세레니티를 보며 물었다. 여전히 시선에는 감탄이 서려 있었다. 이게 같은 인류 맞냐, 하는 얼굴이었다.
“제 친구이자 말벗인 세레니티예요! 렌, 이쪽은 제 티 타임 친구인 엠브라 테타예요! 황립 의료원의 수석 의원이고요!”
미아의 소개를 들은 엠브라의 갈색 눈이 일순 예리하게 빛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숨기고 호들갑스럽게 인사했다.
“황립 의료원의 의원인 엠브라 테타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듀레인 남작가의 세레니티 듀레인이라고 해요.”
세레니티는 능숙하게 인사를 마쳤다. 다소곳한 동작에 백조처럼 우아한 몸짓.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나저나 아가씨. 의료원엔 어쩐 일이세요? 어디 아프세요?”
“그게 아니라, 렌이 의료원에 들르고 싶다고 해서요!”
“의료원에요?”
세레니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원이신 분 앞에서 말씀드리기는 부끄럽지만, 궁 밖에서도 의료원에서 봉사 활동을 했거든요. 그래서 혹시 도울 일이 없을까 하고…….”
“으음. 원래 외부인은 의료원에 출입할 수 없지만…….”
엠브라가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일손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 아무래도 황태후 폐하께서 들이신 분이고……. 허어!”
그녀는 세레니티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하며, 흘낏 세레니티를 넘겨보았다. 하지만 세레니티는 황태후의 이름이 나와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어려울까요? 곤란하게 만들어드리고 싶었던 건 아니니, 필요하지 않으신 거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엠브라를 바라볼 뿐이었다.
“뭐! 그렇다면 들어가셔서 아마치 코헨 의원을 찾으세요! 안에 손님이 계시니까 주의를 부탁드리고요!”
“괜찮을까요? 제가 너무 무리한 청을 드린 것은 아닐지…….”
“황태후 폐하께서 신원을 보증하신 분인데요, 뭐!”
엠브라가 경쾌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감사해요, 테타 님.”
세레니티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뒤에서 꽃이 퐁 퐁 피어나는 듯한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미아는 이야기 나누고 올 거죠?”
“네!”
세레니티는 눈웃음치고서 황립 의료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엠브라가 휘파람을 불었다.
“저분이 소문의 듀레인 아가씨예요?”
“네! 예쁘죠?”
“어후, 말도 마세요! 어떻게 저런 얼굴이 실재한담?”
그러나 곧 엠브라의 갈색 눈이 가늘어졌다.
“그나저나, 저 아가씨를 황태후가 직접 궁에 들였다고요?”
세레니티가 크리소르 황태후의 첩자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눈치였다.
‘남들 눈에는 의심스러울 법도 하겠지.’
미아는 멋쩍게 웃었다.
“제가 잘 지켜볼게요…….”
“흐음. 아가씨는 저분이 좋으신가 봐요? 그렇게 덥석 믿으시고.”
“걱정하지 마세요! 렌은 착해요.”
미아가 활짝 웃으며 하는 말에 엠브라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흠! 폐하의 경쟁자가 이쪽이었어?”
“경쟁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엠브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께서 용인하고 계시는 듯하니 전 상관없어요!”
곧 두 사람은 의료원 앞의 작은 정원을 돌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엠브라는 잘 지냈어요?”
“잘 지내다마다요. 아가씨가 도와주셨잖아요. 아! 그렇지만 수석 의원에서는 내려왔어요. 아무래도 황태후 눈치가 좀 보여서, 몸을 사려야겠더라고요.”
“위험하진 않을까요? 전 엠브라가 수도에서 떠날 줄 알았는데!”
“이후에 의료원 동료들이 잘 증언해 줘서 괜찮아요. 교묘하게 사실만 말한 것도 있고, 일단 아가씨가 멀쩡하게 계시니까.”
엠브라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을 가까이서 보고 싶거든요.”
그녀가 빙긋 웃었다. 단호한 태도에 미아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엠브라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금세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아가씨, 안 그래도 뵙고 싶었는데! 언제 폐하랑 그런 사이가 되신 거예요?”
“그런 사이요?”
“요즘 황궁에 소문이 파다하다고요! 아가씨랑 폐하가…….”
“아! 그거 그냥 거짓말이에요!”
엠브라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미아는 빠르게 그녀의 말을 잘라 냈다. 너무나도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잠시 멈칫한 엠브라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럼…… 폐하랑 아무 일도 없으셨다고요?”
“네!”
“……소문이 그렇게 났는데?”
“어떻게 났어요?”
미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엠브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제 막 성년이 된 영애에게 말하기엔 조금 낯뜨거운 이야기였다.
게다가 미아는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는 외모 탓에, 엠브라는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엠브라가 난처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 하지만,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