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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43화 (43/193)

43화

여자는 죽음을 생각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목은 멀쩡했다.

대신 길고 아름답게 구불거렸던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 있었다.

“다음은 목이야. 똑바로 말해. 뭐 하는 거야?”

아딜로트는 어둠 속에서 새빨간 눈을 빛내며 손에 잡힌 머리카락을 털어 냈다.

그는 북부의 야만족 라지푸트와의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작정하고 내뿜는 살기를 평범한 영애들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히, 히익…….”

다른 여자 둘은 이미 바닥을 기며 도망가고 있었다.

결국 머리카락이 잘린 여자가 흐느끼며 외쳤다.

“폐하가…… 이런 걸 좋아하신다고!”

* * *

쾅!

“너 뭐하고 다니는 거야.”

“네?”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포도를 먹던 미아가 옆으로 굴러 몸의 앞뒤를 뒤집었다.

방문 쪽을 바라보자, 아딜로트가 인상을 쓴 채 문간에 서 있었다.

“일하고 온 거예요? 제가 침대 따끈하게 데워 놨어요! 낮잠 자고 갈래요!?”

미아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돌아가자마자 한소리부터 하려고 했던 아딜로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됐고 너 밖에다 뭐라고 말하고 다니는 거냐고. 뭐라고 하길래 여자들이…….”

“아하!”

미아가 당당하게 윙크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아딜이 나랑 이런 거 그런 거 저런 거 한다는 정도?!”

“……그걸 말했다고?”

“네!”

“…….”

“문제 있어요? 여자들이 왜요?”

“여자들이…….”

무심코 대답하려던 아딜로트가 말꼬리를 흐렸다.

달려들어……. 이상한 눈빛 보내……. 귀여운 척을 하질 않나, 단체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분홍색 눈을 순진하게 반짝거리는 미아 앞에서는 절대로.

아딜로트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살다 살다 남한테 성교육을 해 줄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너……, 여기 앉아 봐.”

미아는 쪼르르 다가와 그 앞에 앉았다. 그러고선 쓸데없이 비장한 얼굴로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

그 모습에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살려 준다고 했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종종 과하게 자신을 신경 쓰곤 했다.

아마 이번 사태도 결은 비슷할 것이다.

밖에서 미아의 입지는 아주 애매하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황제라는 방패를 이용한 것이리라.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처음에 세레니티 듀레인의 도발에 넘어가 잘못된 발언을 한 건 자신이 먼저였으니.

‘다만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할 줄은 몰랐지.’

아딜로트는 한숨을 푹 쉰 다음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게’ 뭔데?”

“엑. 그걸 제 입으로 말하라고요?”

“어.”

미아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뺨을 붉혔다.

“제가 이런 부끄러운 거 말했다고 남한테 말하기 없기예요……?”

“아냐. 너 이미 부끄러운 거 잔뜩 말했어.”

“네?”

“빨리 대답이나 해.”

“으음!”

미아는 머리카락을 왕창 얼굴 앞으로 가져와, 새빨개진 뺨을 가렸다.

“그야…… 사랑하는 사이끼리 하는…… 그런 거죠!”

“그런 거?”

“네!”

“……그게 끝이야?”

“네?”

아딜로트는 미아와 자신의 생각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댕그랗게 뜨고서 ‘뭐가 더 있어?’하고 묻는 듯한 얼굴에 아딜로트가 헛기침했다.

“……뭐가 됐든, 그런 말을 밖에다 하고 다녔어? 너 아무렇지도 않아?”

“폐하가 오해받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해요!”

미아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특별히 알려 준다는 느낌으로 속닥였다.

“그렇지만 렌에게는 오해라고 설명해 놨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 말고 너 말야…….”

아딜로트가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쉬었다.

“나야 여차하면 다 죽이면 되니까 상관없어. 그런데 넌?”

“은근슬쩍 무서운 말씀을 하시네, 이 폐하…….”

“사람들은 네가 내게 총애받고 있다고 생각해. 당연히 너에 대해 더 떠들 텐데 어쩔 심산이야?”

미아가 손가락 하나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는 분홍색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근데 모여서 지지배배 떠드는 것밖에 못 하는 사람들을 제가 신경 써야 할 이유가……?”

“하.”

아딜로트가 나직하게 감탄사를 흘렸다. 계속 생각했던 거지만, 몰랑몰랑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기가 장난이 아니다.

아딜로트가 말이 없자 미아는 반대로 고개를 갸웃했다.

“게다가 전 여기 오래는 안 있을 거니까요!”

순간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미아는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나중에 외국에 갈 거예요!”

“……왜?”

“말마따나 여기는 다 저를 황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애로 알고 있는데 부끄러워서 어떻게 돌아다녀요! 저도 자존심이 있지!”

미아의 말에 아딜로트의 머리가 멍해졌다. 동시에 세레니티 듀레인이 했던, 미아는 사람이니 사람답게 대우해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

아딜로트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미아가 조심스럽게 아딜로트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손에 느껴지는 온기에, 아딜로트는 저도 모르게 속에 차오른 말을 불쑥 내뱉고 말았다.

“이럴 거면 왜 울었어?”

“네?”

미아의 눈이 커졌다.

“……아니다. 방금 말은…….”

자신이 듣기에도 어리광 같은 말에 아딜로트가 실언했다고 둘러대려던 때였다.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슬프잖아요. 아딜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이.”

“…….”

아딜로트는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일이야. 그 정도 비극은 어디에나…….”

“그게 아딜 일이니까 그렇게 슬퍼한 거죠, 당연히.”

“하.”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왜 당연하단 듯이 서로가 남인 미래를 말하는 건데.

차라리 남들처럼 돈이나 권력 때문에 자신에게 알랑거리는 거라면 모른 척 눈감을 텐데.

미아에게는 그가 얼마나 귀한 것을 주든 잠깐 “우와!”하고 눈을 빛낸 다음, 길거리의 모르는 사람에게 줘 버릴 것 같은 무정함이 있었다.

언제든 보러 오라고 말했지만, 정작 필요한 일이 없으면 집무실에 찾아오지는 않는 것처럼.

자신의 손을 미아의 감싼 하얗고 작은 손을 내려다보던 아딜로트가 낮은 탄식을 흘렸다.

“그래서, 내 과거는 슬프고, 내 현재는 도울 거지만, 내 미래에는 떠날 거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줄 테니까?”

“네.”

미아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때 가서 날 높이 사는 자들에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을까?”

“있을 거예요.”

“넌 대체 뭘 믿고 그렇게 항상 단호해?”

아딜로트의 말에 미아가 멈칫하더니, 잡았던 손을 놓았다.

“당연히 아딜을 믿는 거죠. 내가 믿는 아딜은 늘 열심이니까.”

아딜로트는 견고하게 깍지낀 미아의 손가락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미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딜 옆에는 저보다 훨씬 더 멋지고 착하고 예쁜 사람이 있을 거예요.”

다정한 분홍색 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미아의 모습에 아딜로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원작을 정리할 시간이 왔다. 미아가 깃펜으로 입술을 두드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아딜로트가 세레니티를 궁으로 들인 이유는, 대신들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였지. 그러다 진짜로 눈이 맞은 거였고.’

과정이 달라지긴 했지만 어쨌든 세레니티는 입궁했다. 그리고 그녀를 질투한 악녀 테레지아까지도 나타났다.

‘원작의 흐름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야.’

디테일은 좀 다르더라도, 세레니티와 아딜로트의 행동이 어떤 조건을 만족하면 원작에서의 이벤트가 발생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세레니티가 입궁한 이후의 사건이 벌어질 차례였다.

‘테레지아의 등장 이후 일어난 사건이 분명…….’

그대로 미아가 뭔가를 줄줄이 적어 내려가던 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세레니티가 방으로 들어섰다.

“미아. 침방에 다녀왔어요. 제가 방해했나요?”

“아뇨! 괜찮아요!”

이제는 서로가 익숙해진 두 사람은 같이 있는 시간이 늘었다. 미아가 쓰던 것을 마무리할 때까지, 세레니티는 자연스럽게 볕이 잘 드는 스툴에 앉아 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미아는 정리가 끝나고 나서야 그녀에게 다가갔다.

“봐도 돼요?”

“얼마든지요. 대단찮은 솜씨지만요.”

고개를 내밀어 세레니티가 수 놓고 있는 손수건을 본 미아가 탄성을 질렀다.

“엄청 예쁜데!”

분홍색의 작은 꽃이 흰 손수건의 가장자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척 봐도 보통 솜씨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렌은 못하는 게 없었지.’

여자주인공이라서인지, 세레니티는 온갖 일에 능숙했다. 춤, 자수, 꽂꽂이, 다도…….

‘이런 애를 미워할 데가 어디 있다고!’

세레니티를 무시하고 괴롭힌 듀레인 남작가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족들과 떨어진 건데 렌은 괜찮은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미아가 조심스레 세레니티의 얼굴을 살폈다.

‘원작에서도 황궁에 들어오는 걸 반겼으니, 여기서도 그럴 것 같기는 하지만.’

미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렌. 지내는 건 괜찮아요? 힘들지는 않고요?”

“물론이죠. 미아랑 대화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뿐인걸요. 전 아주 행복해요.”

“가족들이 보고 싶거나 하진 않고요?”

그 말에 세레니티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제가 가족들을 보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고 물은 건 아니죠? 미아는 저희 가문의 사정을 아는 것 같던데요.”

그렇게 대답한 세레니티는 멈칫하고 바늘을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그녀의 금빛 시선이 아스라이 허공을 향했다.

“듀레인 남작가에 있을 땐 이런 나날은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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