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왜냐뇨?”
“아가씨, 폐하를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당연히 좋아하죠!”
“?”
“?”
두 사람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부연설명의 필요성을 느낀 미아는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엠브라, 상식적으로 생각해야죠. 아까 세레니티 보셨죠?”
“봤죠……?”
“생각해 보세요! 그 얼굴이 옆에 있는데 저한테 관심이 생기겠어요? 있던 관심도 달아날 판인데!”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에요?”
엠브라가 뿔테 안경 너머로 눈을 깜빡거렸다. 황당해하는 눈치였다.
“그, 듀레인 아가씨가 정말 예쁘긴 하지만…… 아가씨도 귀여우시잖아요?”
“저는 귀여운 거고!”
“아. 부정은 안 하시네.”
“렌은 아름다운 거고!”
“아하……?”
“그러니까 엠브라도 소문은 신경 쓰지 마세요!”
내내 미적지근하게 호응하던 엠브라가 한참 뒤, 짓궂게 웃었다.
“이걸 어째. 우리 폐하, 진짜 큰일나셨네?”
“아딜이 큰일나요? 왜요? 설마 소문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하하! 그래도 전 아가씨를 미는 거 알죠? 내 생명의 은인인걸!”
“절 밀어도 소용없다니깐?”
“아하하하! 그건 나중에 두고 보자고요! 그보다 아가씨, 오신 김에 새로 들인 니들리치의 온갖 베리 컵케익을…….”
엠브라가 호탕하게 웃으며 미아의 손을 잡았을 때였다.
“이 거지 같은 게!”
와장창!
누군가의 고함과 함께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의료원 안쪽에서 난 소리였다. 엠브라와 미아는 서로를 마주 본 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의료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의료원 안은 난장판이었다. 미아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방 중심에 꼿꼿하게 서 있는 테레지아 카르디날레 공작 영애였다.
“그거 맞았다고 울 거면 왜 끼어들어? 병신 같은 게.”
그녀는 미아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뒤에서도 우람한 하늘색 롤빵 머리가 똑똑히 보였다.
‘흐억.’
미아는 테레지아의 손을 보고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여덟 손가락에 전부 알 굵은 반지를 끼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반지가 전부 손바닥 안쪽을 향하게 돌아가 있었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서 테레지아가 그러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일부러 보석으로 남의 얼굴에 상처를 내려고.
“흑, 으흑……. 아윽…….”
아니나 다를까, 의원 한 명이 바닥에 넘어진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눈이, 눈이…….”
안 좋은 위치에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테레지아는 짜증 난다는 듯이 바닥에 넘어진 의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질질 짜지 말고 꺼져.”
“악!”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한 타격음이 났다. 그러자 당장 쓰러진 의원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세레니티가 벌떡 일어섰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요! 어떻게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가 있죠!”
“하!”
테레지아가 높게 코웃음쳤다.
“세상이 많이 변하긴 했어? 듀레인 남작가의 거지새끼가 내게 대들기도 하고.”
“……!”
“너, 원래는 후계자였어야 하면서 굴러들어온 돌 때문에 제 자리도 못 찾고 빌빌대던데, 그런 주제에 밖에서는 목소리가 아주 크다?”
“그게 지금 무슨 연관이…….”
“있지. 지 애비한테도 무시당하는 게 내 앞에서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면 내 기분이 나쁘잖아?”
세레니티의 아픈 부분을 크게 찌르는 말이었다. 양어머니의 이복 언니들의 학대보다 아픈, 친부의 무시과 방치 말이다. 세레니티의 금빛 눈이 수심으로 흐려졌으나, 그녀는 애써 꿋꿋하게 말했다.
“……말이 통할 분이 아니네요.”
그녀는 테레지아를 무시하고 의원의 어깨를 부축했다.
“일단은 치료부터―”
“야.”
그러나 그 순간, 테레지아 카르디날레가 세레니티의 말을 잘랐다.
“너 거기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여 봐.”
그녀는 물빛 머리카락을 넘기며 의원을 향해 음산하게 말했다.
“카르디날레 공작가의 이름을 걸고 쓰레기만 주워 먹고 살게 해 줄게.”
“힉, 흐윽…….”
살벌한 경고에 의원은 벌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테레지아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아딜로트에게 빠진 영애들을 무수히 많이 괴롭혀 왔었다. 카르디날레 공작 영애로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해서 말이다.
<장미정원의 세레니티>에서 세레니티도 그 때문에 온갖 수모를 다 겪곤 했다.
‘이대로 그렇게 진행되게 둘 순 없지!’
다행히 테레지아는 한번에 한 명만 찍어서 괴롭히는 타입이었다. 게다가 작가도 후반에 가서는 세레니티가 더는 맞게 두지 않았다. 세레니티가 놀라운 추리력과 동체 시력으로 테레지아의 주먹질 패턴을 파악해서 피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는 지금 미아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엠브라. 여긴 제가 막아 볼 테니 기사를 데려와 줄 수 있어요?”
“아가씨. 어쩌시게요!”
미아의 속삭임에 엠브라가 펄쩍 뛰었다.
“테레지아의 공격 패턴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까, 제가 어떻게든 해야죠.”
“네?”
“부탁해요!”
미아가 작은 외침과 함께 의료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와! 이게 누구야!?”
목소리는 솔 톤으로. 명랑하게. 웃음을 잃지 않고서.
“굴러들어온 돌만도 못해서 폐하의 관심 한번 못 받은 테레지아 카르디날레 양 아니야!?”
잊으면 안 된다.
싸움은 상대방 열 받게 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순식간에 모두의 이목이 미아에게 집중되었다.
테레지아 역시 홱 몸을 돌렸다. 미아를 발견한 테레지아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이 미친 계집애가……!”
반쯤 맛이 간 눈을 한 테레지아의 모습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그녀는 무가인 카르디날레 공작가 출신답게 강골에, 키도 170을 넘었다. 뼈대도 굵고 완력도 남달랐다.
‘반면 미아 셀레스티얼은…….’
키가 작지는 않지만 마른 편이었다. 근육이 없는 건 아니지만 체급 차이가 제법 났다.
‘한 대만 맞아도 요단강!’
하지만 미아는 태연하게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
“미친 계집애라니! 그렇게 말버릇이 쓰레기 같으니까 폐하가 너한테 관심 한번 안 주시는 거야!”
“입 안 닥쳐!?”
“에그! 상스러운 말 쓰지 말라니까? 내가 실수로 테레지아 주둥이가 천박하다고 폐하께 말해 버릴지도 모르잖아!?”
“……어, 어디 한번 그러기만 해 봐!”
“아하항! 그럼 너부터 닥쳐야 하지 않을까? 이게 누구더러 닥치래.”
“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테레지아가 까르르 웃어 대는 미아를 향해 다가왔다.
하지만 그것을 예상하고 있던 미아는, 테레지아가 어깨를 들자마자 재빨리 몸을 옆으로 피했다.
“얍.”
알 굵은 보석 반지로 무장한 테레지아의 손바닥은 미아가 있던 곳을 헛손질했다.
“이게! 나를! 우습게…… 알고!”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이게! 왜! 안 잡혀……!”
머리! 뺨! 머리! 배! 목!
미아의 코앞에서 팔이 스쳐 지나가자 붕 하고 바람 소리가 났다.
‘아니까 피하는 거지, 몰랐다면 절대 못 피했겠다.’
이러니 세레니티가 맨날 맞고 다녔지. 미아는 태연하게 웃으며 테레지아의 모든 공격을 피했다.
“대단해! 저걸 다 피하다니!”
주변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테레지아와 몸싸움에서 이기거나, 하다못해 피하기라도 한 영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건방진 계집애!”
아무리 공격해도 머리카락 한 올 잡히지 않자, 테레지아는 얼굴을 짜증이 극에 달했는지 고함을 내질렀다.
“이 주제도 모르는 게! 넌 그냥 폐하의 장난감이야! 알아!?”
정도를 넘은 심한 욕에 주변에서 식겁해 입을 가렸다. 하지만 미아는 놀랍게도 까르르 웃었다.
“그러는 넌?”
“……!”
“넌 장난감도 못 되잖아? 아딜한테 너는 안중에도 없을걸? 너도 그걸 아니까 다가가진 못하고, 뒤에서 찌질하게 다른 영애들한테 손대는 거잖아?”
“아니야!”
테레지아가 고함쳤다.
“난 더 큰 걸 바라는 거야! 공식적이고 모두에게 인정받는 관계!”
“앗. 폐하가 너랑 그 큰 걸 하긴 하신대? 너 그거 과대망상증 같은데……. 에그, 병원은 가 봤니?”
“아아아악!”
키득키득 웃는 미아의 모습에 테레지아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너! 폐하께선 그냥 당신의 장난기를 시험해 보고 싶으신 거라고! 폐하가 네게 진심일 것 같아!?”
미아는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앞뒤가 맞을지 생각한 뒤, 당당히 외쳤다.
“뭔 상관이야! 지금 내가 너무 좋다는데!”
그 말을 들은 세레니티가 뒤쪽에서 비틀거렸다. 하지만 미아는 태연하게 활짝 웃었다.
“폐하는 나 진짜 좋아하시는 거 같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우리 사이 응원해 줄 거지? 넌 장난감 싫다며?”
“이, 이……!”
“응원 안 해 줄 거야? 결국 너도 나 질투하는 거지? 어휴, 귀엽고 사랑받는 내가 참아야지…….”
“야!!”
기어코 테레지아가 절규했다. 그녀는 거칠게 장미 코사지가 달린 모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네가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미아는 웃는 낯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까지 이럴 수 있는지가 중요해?”
“뭐?”
“중요한 건 네가 아딜을 좋아한다는 거야.”
“……아니야!”
테레지아는 망설이다 그렇게 외쳤다. 남들 앞이라 시선을 의식하는 게 분명했다. 미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잘됐다! 마침 아딜은 너 안 좋아하거든.”
순간, 테레지아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그 사이로 약간은 울 둣한 모습이 비쳐들었다.
‘좋아. 완벽하게 나를 증오하겠네!’
미아는 태연히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아딜로트 쟁탈전으로 변질됐지만, 이렇게 의원과 세레니티에게서 신경을 꺼 준다면 고마운 일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이렇게까지 시간을 끄는데, 빨리 안 피하고 뭐 하는 거야.’
미아가 흘끗 주변을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