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세 사람이 있는 정원에 침묵이 찾아왔다.
너무나도 당당한 미아의 모습에 테레지아는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세레니티 역시 당황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이윽고 두 사람이 동시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너, 넌 자존심도 없어!? 게다가 어떻게 대낮에 그런 말을!”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거 아니거든!”
미아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휙 넘기며 외쳤다.
“그리고 나도 폐하랑 이런 거 그런 거 저런 거 하는 거 좋지롱!”
“꺄악!”
돌연 새된 비명을 내지른 테레지아는 이내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폐하가……, 우리 폐하가……!”
“니네 폐하 나랑 나쁜 거 하겠다던데!”
“……우리 폐하가 그럴 리 없어!!”
테레지아는 단말마 같은 비명만 남긴 뒤 정원에서 뛰쳐나갔다.
그녀의 시녀들이 테레지아를 쫓아가자, 정원에는 미아와 세레니티만이 휑뎅그렁하니 남겨졌다.
‘너무 심했나?’
미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중간부터는 그냥 재밌어서 아무 말이나 한 것에 가까웠다.
그래도 어쨌든 알아서 온갖 상상을 펼치다가 떨어져 나가 주었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흠……. 저, 미아……?”
그때, 뒤에서 세레니티가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맞다! 해명해야 해!’
그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미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렌! 이거 다 오해예요!”
“네?”
“방금 말한 거! 아까 아딜로트가 말한 거! 다 오해예요!”
미아는 세레니티의 손을 붙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정을 설명했다.
아딜로트가 단순히 자신을 살려 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세간의 소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등등.
‘정말로 아무 감정이 없는 것 같진 않아 보였는데…….’
세레니티는 미아의 말을 들으며 아딜로트를 떠올렸다.
‘알겠지? 나는 얘랑 둘이서, 이런 거, 저런 거, 그런 거, 나쁜 거, 좋은 거, 종류별로 다 할 거니까, 이제 나가.’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말하면서도 그는 은근히 미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미아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자신이 미아를 데려가지 못하게 살짝 몸으로 가리던 것도 떠올랐다.
‘그게 정말로 그냥 살려 주고 있을 뿐인 사람의 태도라고?’
세레니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미아……? 그럼 미아와 폐하는 사실은 아무 사이도 아닌 건가요?”
“응! 정말이에요! 저는 이를테면! 그러니까! 심신 안정을 돕는…… 반려동물 느낌으로!”
“아…….”
반짝이는 분홍색 눈을 마주한 세레니티는 앓는 소리를 냈다.
‘이다지도 순진할 데가!’
아무래도 미아는 정말로 황제가 아무런 사심도 없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테레지아에게 한 말을 보면, 자신이 한 말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알면 절대 그렇게 대놓고는…….’
머릿속에서 최근에 읽은 책의 내용을 떠올린 세레니티가 헛기침했다.
“흠, 흠.”
“렌? 아파요? 얼굴이 빨간데!”
“아, 아니에요.”
세레니티는 황급히 달아오른 뺨을 가렸다. 그리고 함부로 입을 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괜히 알려 줬다가 충격을 받으면 안 되니까……. 미아의 순수를 지켜 주자.’
그렇다는 건 역시 자신이 그 황제의 마수에서 미아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미아가 어어 하는 사이에 황제와 이런 거 저런 거 그런 거를 하게 둘 수는 없었다.
세레니티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미아. 미아의 말도 일리는 있으니까요. 하지만 판단은 제가 폐하를 직접 지켜보고 해도 될까요?”
한편, 그런 세레니티의 생각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미아는 그녀의 대답에 마냥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응! 고마워요, 렌!”
그렇게 말하는 미아는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모든 게 잘 풀릴 기미가 보였다.
‘렌은 좋은 사람이니까 아딜도 사실 좋은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아줄 거야!’
풀리지 않은 양방의 오해를 모른 채, 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저, 그런데…….”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미아는 작게 헛기침한 뒤 세레니티에게 귓속말했다.
“렌은 대체 그런 걸 어디서 알게 됐어요?”
“그런 거요?”
“막……, 으응. 치, 침실 얘기……?”
“……!”
세레니티의 얼굴이 당황과 부끄러움으로 다시 달아올랐다.
‘나도 묻고 싶진 않지만, 렌의 캐릭터가 원작이랑 너무 달라져서 말이지.’
미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눈을 빛냈다. 세레니티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속닥였다.
“미아는 셀레스티얼 백작가 출신이니 알겠지만, 셀레스티얼 백작가에서 주류 사업을 했잖아요?”
“네!”
망해 가던 사업이긴 했지만. 미아가 속마음을 숨긴 채 대답했다.
원래 셀레스티얼 백작가는 대대로 주류 사업을 했다. 작게나마 질 좋은 토양과 전통 있는 와이너리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백작이 그 전통을 깨부수고 어디서 이상한 주조 방법을 들여온 탓에, 셀레스티얼 백작가의 주류 사업은 대차게 망해 가는 중이었다.
미아가 빙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걸 미아가 기존의 방식대로 돌리고, 철강 사업과 연계해 최신 기술을 도입했다. 당장 성과를 보기 어려운 자체 기술 개발과 더불어 시음회 등의 연계 사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해 내기도 했다.
‘그 덕에 와이너리 기술자들이 나를 너무 좋아했지.’
미아는 만나기만 하면 술을 먹이려고 들던 와이너리 사람들을 떠올리며 웃었다.
“듀레인 남작가도 그 사업에 참여했었어요. 아시나요?”
그런 미아의 모습에 세레니티 또한 귀엽다는 듯 따라 웃었다.
“정말요? 주류 쪽은 제가 손만 댄 다음 아버지한테 넘겨서 미처 몰랐어요!”
“미아 덕이에요. 투자 이상의 소득이 발생해서, 그 덕에 언니들이 사치품이나 취미 생활을 많이 하게 되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세레니티의 뺨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물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언니들의 침대 밑에, 책이…….”
“아! 아아…….”
즉, 그 책이 도색 서적이었다 이거다. 그제야 모든 걸 깨달은 미아가 당황 섞인 신음을 흘렸다.
‘잠깐, 그럼 세레니티가 원작과 달라진 게 나 때문이야!?’
잠시 멈칫했던 미아는 양심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어, 어른이니까! 상관없지! 내, 내 잘못 아니다, 뭐!?’
그날 이후, 황궁에 소문 하나가 퍼졌다.
* * *
“이만하지.”
낮 동안의 정무가 끝난 아딜로트는 집무실에서 일어났다. 드물게 회의가 일찍 끝난 날이었다. 신진 귀족들과 실무자가 참여한 회의였던 덕이다.
꼬장꼬장한 보수 귀족들과 달리, 신진 귀족들과 실무자들은 아딜로트의 치세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아딜로트의 업무 처리 방식은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며, 전시 행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아딜로트가 미아를 데려온 것에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는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물론 아딜로트는 아랫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뒤에서 어떻게 왈가왈부하든 관심이 없었다.
그가 할 일은 오르퀘니나를 잘 통치하는 일이고, 전면에서 대들면 밟아 주면 그만일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요즘 그의 관심사는 전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바로 분홍색 머리카락과 분홍색 눈, 설탕처럼 흰 피부를 가진 자칭 황제의 반려동물, 미아 셀레스티얼.
하는 행동이 하도 괴상한 터라 그가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셀레스티얼 백작이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고, 국가 기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고, 의심이 풀렸다고 그냥 풀어 주기엔 세상이 너무 험하고, 점심은 아직 안 먹었겠지?
“혼자 갈 테니 따라오지 마.”
아딜로트가 그를 따라오려는 등 뒤의 호위 기사들에게 명했다. 그는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팔짱을 낀 채 홀로 황제궁으로 향했다.
황궁 레벤토르는 몹시 넓고, 정무를 보는 중앙궁에서 황제궁까지 가는 길 역시 꽤 멀다.
‘외, 외로워서……?’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내버려 둘 수도 없고.
변태 같은 여자 한 명이 말벗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쪽으로는 영 눈치가 부족해 보이는 애를 데리고 무슨 엄한 지식을 가르칠지 몹시 우려되었다.
그때, 정원 구석의 풀숲에서 그림자가 비쳤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었던 아딜로트가 다음 순간 멈칫했다.
“폐, 폐하……?”
풀숲에서 나타난 것은 머리카락을 분홍색으로 물들인 낯선 여자였다. 염색인지 머리카락이 얼룩덜룩했다. 아딜로트가 멍한 얼굴을 했다.
이건 뭐지?
아딜로트가 멈춰 서자, 여자는 주먹을 뺨에 갖다 대고 귀여운 척을 시작했다.
“아, 아잉!”
미친 여자다.
아딜로트가 뒷걸음질 쳤다. 그는 얼굴을 굳힌 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폐, 폐하! 에이씨, 이게 아닌가?”
뒤에서 붙잡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딜로트는 무시하고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그의 인생에서 미친 여자는 미아 하나로도 차고 넘쳤다. 그리고 미아는 적어도 저렇게 낯뜨거운 방식으로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여럿이었다.
“폐하…….”
“폐하, 저희랑 차 한잔하고 가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홍색인 여자들이 단체로 그에게 손가락을 까딱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염색인 게 확실했고, 뺨에 올린 분홍색 볼터치는 너무 두꺼워서 갑옷 대신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딜로트는 아연했다. 그는 멍하니 서 있다가, 허리춤의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여자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여, 역시 이런 게……!”
쉭!
하지만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아딜로트의 검 끝이 여자의 목젖에 닿았다. 새빨간 피가 한 방울 새어 나왔다.
“내가 우습게 보이나?”
“허억……!”
“셋 세기 전에 말해. 이게 무슨 짓거리야?”
“폐……!”
“셋.”
서걱!
아딜로트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꺄아아아아,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