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퍼져가는 소문2022.01.30.
케일럽의 말에 로벨리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내가 당장 기자회견에 끼어들어 반박한다고 해도, 라이트 자작부인의 말에는 물증이 있고, 나는 물증이 없는 상황은 변하지 않지. 이런 상황에서 불리해지는 것은 결국 내가 될 것이고, 그럼 더욱 우스운 취급을 받을 뿐이야.”
“하, 하지만. 적어도 황후로서의 권위를 이용하여 기자회견을 중단시키기라도 하신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지. 사건이 이렇게 자극적이며 물증까지 존재하는 이상 결국 어떻게든 기사화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을 거야.”
로벨리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황후로서의 권력을 이용해 발표를 중단시키려고 했던 행동 자체가 더더욱 주목받고 비판받을 거야. 결국 상황은 더더욱 악화되겠지.”
“하지만…….”
케일럽은 여전히 분한 듯이 보였다. 그의 앳된 얼굴에 묻어나는 괴로움을 발견한 로벨리아는, 미소 지으며 그를 달랬다.
“그런 얼굴 하지 않아도 된단다, 케일럽. 나라고 자작부인의 공격을 그저 당해주기만 할 생각은 없거든. 나는 반격을 준비하기 위해 여기 온 거야. 상대의 주장과 상대가 가진 물증을 확인하고 정보를 수집하려고. 싸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시기를 잘 노리는 것이고, 그건 여론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케일럽은 머리가 아주 좋은 아이였다. 그런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로벨리아의 말은 잘못된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오히려 그가 방금 했던 말이야말로 어린애의 칭얼거림에 불과하며, 감정에 치우쳐진 상태로 아무렇게나 뱉은, 합리적이지 못한 말이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너무나 속상하고 화가 나요.”
중얼거리는 케일럽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증언들이 기사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그로 인해 수도 없이 많은 비난과 비수와 같은 말들이 로벨리아에게 쏟아질 것이라는 사실이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차라리 기사가 나기 전에 자작부인을 어떻게 하기라도 하고 싶지만…….’
6서클의 마법사인 그에게 한낱 자작부인 따위를 절명시키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로벨리아는 결코 그런 걸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저지른 일임을 알게 된다면 그에게 크게 화를 내고, 실망하게 되리라.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케일럽은 필사의 인내심을 쥐어짜내 냉혹한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나를 믿어주는구나.”
로벨리아의 다정한 목소리가 케일럽의 악문 잇새를 풀어냈다.
“저런 말을 들었는 데도 내게 ‘정말이냐’라고 묻지 않고 전부 헛소리라고 일축하다니.”
“당연한 일인 걸요. 폐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건 간에, 저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 거예요.”
케일럽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크고 둥근 눈을 끔뻑였다. 로벨리아는 그런 그에게 다정히 웃어보였다.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니야, 케일럽. 사실은, 네가 방금 보여주었던 그 반응이 내게 얼마나 위안이 되어주었는지 몰라.”
“폐하…….”
“나는 확신한단다. 나를 믿어주는 너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이번 일도 결국 어떻게든 이겨낼 것이라고.”
그녀의 그 말이, 케일럽에게는 얼마나 찬란하게 느껴지던지. 그의 굳건한 믿음을 그녀가 알고 있고, 그것이 그녀에게 힘이 된다는 사실이 어찌나 그를 충만하게 만드는지.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와 괴로움만이 가득하던 세상은 어느덧 색채감 넘치는 모습으로 변했다. 그것은 케일럽이 아는 그 어떠한 마법보다도 아름다우며,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케일럽은 확신했다. 자신은 분명 그녀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이번 일에서 그녀에게 힘이 되어줄 수만 있다면, 자신은 무엇이라도 해내고 말 것이라고.
***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 마차에서 나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작부인의 말은 거짓과 진실이 섞여 있어.’
나는 좌석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생각했다.
‘우선 내가 빙의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학교폭력의 가해자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야. 나는 학창시절 발이 별로 넓지 않았고 아는 사람이라곤 친한 친구 몇뿐이었는걸.’
알렉산드로스가 일찍이 알려주었다시피, 진실에 거짓을 섞는 것은 여론전에서 무척 유효한 술법이다. 자작부인은 영리하게도 그것을 해낸 것이다.
‘자작부인은 여태까지 발표된 적 없는 한국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 그것은 확실해. 그리고 그녀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신성력을 보인 것도.’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이상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
‘일단 나는 학교폭력을 저지른 적이 없어. 그러니 자작부인은 나에게 복수심을 품어야 할 이유가 없지. 하나 이런 일이 과연 아무런 원한도 없이 벌일 만한 짓일까? 사소한 이유로 저지르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커. 자작부인은 며칠 안에 성국에 의해 체포될 것이고 중형을 받을 거야. 그런데 이유도 없이 내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이런 짓을 했다니……. 그건 확실히 이상하지.’
그때, 내 머릿속에 새로운 발상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전제부터 잘못된 것이 아닐까. 자작부인은 중형을 감수하고 이런 짓을 한 게 아니라, 애초부터 중형을 받을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닐까.’
섬뜩한 가정이 내 뇌리에 떠올랐다.
‘만일 이것이 성국의 상부와 합의된 내용이라면?’
그것은 나로서도 달가운 가정은 아니었다. 자작부인의 단독적인 행각인 편이 낫지, 성국의 상부, 즉 대신관이 배후에 있는 짓이라면…… 그것은 훨씬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제일 합리적이야. 자작부인의 유일한 물증이 대신관이 내게 보여줬던 예언기록이라는 것은 너무 수상하지. 대신관이 예언기록을 가지고 날 회유하려다가 실패하자, 이번에는 그걸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포섭해 이런 짓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아.’
이렇게 생각하면, 의문이었던 많은 것들이 설명 된다.
‘자작부인이 예언기록을 훔친 것이 아니라, 대신관이 직접 준 것이라면? 그렇다면 자작부인이 타고난 신성력의 소유자일 필요조차 없겠지. 예언기록을 사용해서 기자들 앞에서 신성력을 보여준 것도, 대신관의 협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해.’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다. 이번 사건과 대신관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에는, 자작부인의 유일한 물증이 대신관이 보여준 예언기록이고, 대신관이 얼마 전 그것을 이용해 나를 회유하려다 실패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공교로웠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전부 추측일 뿐이야. 내가 이것을 말해보았자, 물증이 없어서 대중은 믿어주지 않겠지.’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니만큼 내가 틀렸을 가능성도 있고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렇다면 이 추측이 맞는지 틀린지, 내가 직접 증명해보는 수밖에 없겠지.”
고요한 마차 안에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시선을 준 유리창에 나의 창백한 얼굴이 비쳐보였다. 수도의 화려한 밤거리도.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어. 이번 일의 배후에 대신관이 있다면, 결코 쉽게 해결되지는 않을 테니까.’
대신관.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어떤 목적으로 나를 회유하려 한 것이며, 이번 일을 꾸민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나 많은 의문들이 수도의 야경 위로 떠올랐다가 밤나방처럼 흩어졌다. *** 그날 저녁, 예상대로 자작부인의 인터뷰는 수많은 신문사를 통해 기사화되었다. 그냥 기사화가 된 정도가 아니었다. 석간이 있는 신문은 온갖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띄워가며 로벨리아와 라이트 자작부인에 대한 특집 기사를 발행했으며, 석간을 발행하지 않는 신문들은 질세라 호외를 발간했다. 발행부수도, 반응도 엄청났다. 언제나 이슈메이커로서 관련된 사건이 신문에 실릴 때마다 판매량을 경신하곤 하는 로벨리아였으나, 이번만큼은 그 어떠한 기록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다들 이번 석간신문 봤어요?”
“당연하죠. 정말 충격적인 내용이던걸요.”
“저는 신뢰도 낮은 옐로페이퍼인 줄 알았는데, 일간지들조차 전부 특집기사로 이번 사건을 다루더군요.”
“자작부인의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 숫자가 150명이 넘는대요. 이 정도면 신뢰도로선 틀림없겠죠.”
수도의 모두가 두 명 이상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를 해댔다. 그들의 주요 화젯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바로 ‘빙의자’라는 새로운 개념에 대한 것이었다.
“차원이동자, 즉 성녀님에 대해서라면 잘 알지만 빙의자라니……. 어떻게 사람이 몸은 그대로인데 정신만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는 거지? 믿어지지가 않는군.”
차원이동자라는 존재는 이미 수백 년 동안 항상 사람들의 곁에 있어 왔고, 모두가 당연히 여겨왔으나 빙의자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빙의자라는 존재를 낯설어했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모든 논쟁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했다.
“어쨌든 성국의 예언기록에 나와 있다지 않나. 그렇다면 사실일 수밖에 없지.”
“그렇지, 예언기록은 위조하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성국은 그 존재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겠지.”
그와 함께 오랜 시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황후, 자작부인이라는 위치를 이용해왔던 로벨리아와 라이트 자작부인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라이트 자작부인과 황후 폐하의 가족들은 여태까지 모르는 사람을 자신의 부인, 딸인 줄 알고 함께 살아왔으니 그 배신감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군.”
“특히나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를 얼마나 끔찍이 아끼셨나? 그 귀히 여김을 전부 받으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다니!”
“제국법에 따르면 황제를 속이는 것은 중죄일 터인데 어떻게 될는지 궁금하군.”
그리고 물론, 자작부인의 폭로 내용 역시 큰 화제가 되었다.
“그건 그렇고 황후 폐하의 ‘다른 세계에서의’ 모습에 대한 자작부인의 증언 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것이군요.”
“황후 폐하께서 사실 다른 세계에서는 치정을 이유로 투기심이나 부리는 여인이었다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실망감을 금할 수 없군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저는 처음부터 황후 폐하께서 그리도 높은 명성에 어울리는 분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답니다. 제 안목에는 쓸데없이 화려하고 사치나 일삼는 허영심 많은 여인으로 보이는데 대체 어디가 그리 훌륭하다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