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습니다2021.12.26.
“역시 첫 번째로는 황후 폐하께서 많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대신관은 그 의도를 읽어내기 어려운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말했다.
“폐하께서도 자각하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황후 폐하의 성정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수준으로 달라졌지요. 인간관계도 업무능력도 놀랄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놀랐다는 이가 궁내에 한둘이 아니더군요. 주변인들의 평가의 변화는 빙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가장 뚜렷한 징후입니다.”
“난 또 뭐라고. 고작 그 정도의 심증으로 내가 빙의자라고 의심한 건가요?”
나는 코웃음 쳤다.
“어느 순간부터 내 성정이 달라졌음을 부정하진 않겠어요. 하나 그것은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에 회의를 느껴 앞으로는 이기적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일 뿐, 내가 빙의자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이 말을 하면서도 나는 몇 번이고 어휘를 골랐다. 목소리의 어조와 톤을 조절하고 표정을 정돈했다. 내가 동요했다는 사실을, 내가 정말 빙의자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대신관이야. 조금이라도 동요한 기색을 드러내면 바로 들키고 말 거야.’
대신관의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나를 들여다보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감정을 숨기는 데에 뛰어나시군요. 제게 근거가 없었다면 깜빡 속았을 겁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 지은 채로 상대를 바라보며 차를 한 모금 마셨을 뿐이었다. 웃으며 찻자리를 함께하는 황후와 대신관. 얼핏 보기에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장면이겠지만, 대화를 나누는 당사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날 선 긴장감이 공기 중에 배어 있었다.
“유감이지만, 황후 폐하. 저는 겨우 심증만으로 황후 폐하를 빙의자라고 의심한 것이 아니랍니다.”
“…….”
“성녀가 이 세계에 강림하실 때마다 성국에는 신탁이 내려옵니다. 성녀님이 대륙 어디에 떨어지셨다고 해도 반드시 저희가 발견해 보호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지요.”
대신관은 더 넣은 것도 없는 찻잔을 티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제가 지난번에 성녀님은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낼 수 없어서 성녀님으로 추대하지만 빙의자는 돌려보낼 수 있기에 확인하는 족족 돌려보냈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하나 성녀님보다도 눈에 덜 띄는 빙의자를 매번 찾아내어 돌려보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
“성녀님의 경우와 같습니다. 빙의자가 나타날 때마다 신탁이 내려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빙의자의 존재와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신관의 말을 듣다 보니 궁금한 점이 세 개 생기는군요.”
나는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첫 번째. 만일 내가 일 년 반 전에 빙의되었다는 신탁이 내려왔다면 왜 대신관은 그때 바로 저에게 찾아오거나 연락을 취하지 않은 거죠? 뭘 하다가 일 년 반이나 늦게 이런 식으로 접촉을 해오는 건가요?”
나는 세 손가락을 펴 보이고는,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런 신탁이 있었다면 제가 납득할 만한 물증, 즉 기록물 정도는 있겠죠. 이런 의심을 사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제가 그걸 볼 권리 정도는 있다고 믿어요.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내게 이런 걸 묻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군요.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나요?”
내 질문을 들은 대신관은 만면에 단정한 미소를 띠웠다.
“합리적인 의문이십니다. 우선 신탁을 받은 뒤 일 년 반이나 지나서야 이렇게 사실을 여쭙는 이유는, 황제의 감시와 의심 때문입니다. 아시리라 믿지만 황궁 내외를 오가는 통신과 우편물은 전부 황제의 사람들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황후 폐하께서 빙의자이며 완전히 모르는 타인과 뒤바뀌었다고 하면 황제에 의해 황후 폐하의 안위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우편이나 마법으로 연락드릴 수 없었던 겁니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까지 한다고? 그것은 완전히 처음 들은 사실이었기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대신관의 말이 사실일까? 당연히 나를 기만하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이제까지 봐왔던 알렉산드로스의 통제 광적인 면모를 보면 그는 그러고도 남긴 하지…….’
대신관은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제가 직접 제국에 입국하여 황후 폐하께 면대면으로 해당사항을 전달드리고자 하였지만, 지난 일 년 반 동안 저는 제국의 입국허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건 어째서죠?”
대신관은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산드로스 2세 현황제는 저나 성국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선황제와 관련된 기억 때문이겠지요.”
“아…….”
선황제, 즉 알렉산드로스의 친부가 종교에 광적으로 몰입하여 정사와 가족들을 내팽개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종교가 성국의 종교였구나.’
“그간 이런저런 이유로 제국에 입국 신청을 하였지만 전부 반려 당하고, 최근에 와서야 황비 전하를 뵙고 여러 가지를 교육시키고자 한다는 입국 신청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럼 대신관이 제국에 입국한 것은 황비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황비 전하를 뵙기 위해 온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다른 목적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황후 폐하를 뵙고자 하는 목적 말입니다.”
대신관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제국에 오자마자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던 것은, 아시다시피 제가 온 뒤로 황실에 이런저런 일로 바람 잘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토파즈 궁에서의 행사라든가, 그 직후에는……. 하하.”
대신관이 얼버무린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나의 도주 사건을 말하는 것일 게 뻔했다.
‘그러고 보니 대신관은 꾸준히 내게 말을 걸려 시도해오긴 했지. 대부분 이런저런 일로 무산되어서 그렇지.’
나는 묵묵히 들으면서 대신관의 설명이 합리적인지 머릿속으로 검토했다. 내가 달리 반응하지 않자, 대신관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물증 말입니다. 물론, 그것을 원하실 것 같기에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탁 기록의 사본입니다. 보시다시피 성국의 인장도 찍혀 있답니다.”
나는 대신관이 건네는 두꺼운 양장본의 책을 펼쳐 들고 그 내용을 살폈다. 그 내용은 대신관의 설명 그대로였다. 정확히 내가 빙의된 즈음의 날짜에,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인 내가 로벨리아의 몸에 빙의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내가 신탁 기록의 양식 같은 건 알지 못하지만……. 사실 이것이 조작이라고 해도 상대가 대신관인데 어련히 잘 대비했겠어. 그러니 이게 가짜 신탁이라는 단서를 찾는 건 의미가 없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평정을 유지한 채 신탁 기록책을 덮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싶냐고 하셨는데, 큰 오해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성국에서는 모든 빙의자들을 찾아내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신의 뜻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황후 폐하의 의사를 묻고, 원래의 세계로 돌려 보내드리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내 눈에는 더 뚜렷한 동기가 보이는 듯하군요.”
나는 빙긋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만일 내가 빙의자가 맞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다면 아이샤가 황후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죠. 대신관의 목적은 그것이 아닌가요?”
내 말에 대신관의 미간에 금이 갔다. 언제나 유들유들하고 단정한 대신관의 낯빛에 금이 가는 모습. 그것은 나로서는 완전히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는 금방 동요의 기색을 지우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역시, 듣던 대로 황후 폐하께서는 노련하시군요.”
그는 한숨을 쉬곤,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목이 탄 듯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그가 말했다.
“그쪽도 이쪽도, 손해가 없는 ‘거래’ 아닐까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겠죠.”
잠시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조용히 다과를 음미하는 몇 분의 시간이 지난 뒤, 대신관이 일어섰다.
“어쨌든 황후 폐하께서는 당신이 빙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실 생각이 없으신 듯하니,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차 잘 마셨습니다, 폐하.”
올 때 그러했듯 그는 돌아갈 때도 흠잡을 데 없는 예법으로 인사했다.
“하지만, 부디 제 제안을 깊게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
“황후 폐하께서는 복잡하고 적응하기 어려운 황궁을 떠나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시게 될 겁니다. 그리웠던 가족과 친우를 다시 만날 수 있고, 그 세계에서 일구어놓았던 모든 것을 도로 되찾을 수 있어요. 그것이 나쁜 것은 결코 아닐 겁니다.”
나는 그의 말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정중한 예법에 맞추어 적당한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편히 들어가시길 바라요.”
“예. 황후 폐하께서 무엇을 선택하시더라도, 그 앞길에 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그렇게 대신관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귀빈궁으로 떠났다. *** 귀빈궁으로 돌아오는 길, 대신관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주먹만 한 유리구슬. 그것은 녹음(錄音) 마력구였다.
‘당황시키기 위해 일부러 약조도 없이 갑자기 찾아간 데다가, 당혹할 만한 말만을 골라서 했지.’
대신관은 마력으로 환히 빛나는 유리구슬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조작한 물증까지 내어놓았으니,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당혹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백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말실수라도 했을 텐데…….’
하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그가 녹음 마력구를 가져간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양, 단 한 마디도 자신이 빙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녹음 마력구를 가져간 것은 당연히 그녀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밝히면 그것을 녹음하여 약점으로 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독하기 짝이 없는 여자야.’
투명한 유리구슬의 위로 대신관의 싸늘한 얼굴이 비쳐 보였다.
‘독사처럼 날카롭고 여우처럼 노련해.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을 정도로 빈틈이 없어.’
쉬운 상대일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지만……. 하지만 생각보다도 더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빙의자. 결국은 유혹에 넘어오게 될 거야.’
그는 수정구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중얼거렸다.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니까 말이지…….”
수정구의 위에 떠올랐던 냉혹한 미소는 주머니에 넣는 순간 어둠 속에 침잠해 사라졌다. *** 대신관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그가 내게 전했던 충격적인 말들은 이후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대신관은 대체 어떻게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신탁이 내려왔다는 말은 진짜일까?’
그가 했던 설명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검토해봤지만 특별히 앞뒤가 안 맞거나 하는 부분은 없었다.
‘하긴, 명색이 대신관이고 갑작스레 그런 말들을 들은 나와 달리 만전의 준비를 하고 왔을 테니 바로 눈에 띌만한 모순점 같은 게 있을 리는 없지.’
나는 고민했다.
‘일단 혹시 몰라서 내가 빙의자라는 걸 인정하지는 않았는데 그러길 잘한 것 같아. 만에 하나 녹음기능이 있는 마도구 같은 걸 소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지나친 의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하지만……. 원래의 세계로 되돌려 보내줄 수 있다는 거. 그건 정말일까?’
그러나 나는 대신관이 했던 말에 대해 오래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바로 오늘이, 케일럽과 노먼의 연금이 풀리는 날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