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그에게 키스를 허락한 이유2021.12.30.
“폐하!”
성장기라서 그런지 케일럽은 고작 3개월 만에 훌쩍 자라버린 것 같았다. 그가 절뚝이면서도 급히 달려오는 모습 위로 대형견이 달려오는 모습이 겹쳐졌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미소 지었다.
“케일럽, 정말 고생이 많았구나.”
“헤헤, 아니에요, 폐하. 이렇게 만나 뵈어서 너무나 기뻐요.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요.”
케일럽의 희고 순둥한 얼굴 위로 부풀어 오른 애교살과 깊이 팬 보조개가 보였다. 티끌 하나 없이 밝게 웃는 그의 얼굴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강아지처럼 바짝 다가오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나도 널 밖에서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뻐. 그리고 그동안 무척 미안했단다. 날 위해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해주었는데 처벌까지 받다니…….”
“아니에요, 저를 데려가 달라고 한 건 저의 억지였잖아요. 황후 폐하를 모시고 지켜드릴 수 있어서 저는 정말 기뻤어요. 게다가 처벌을 최대한 가볍게 해주신 것도 폐하의 덕이었잖아요?”
하지만 어떤 말을 들어도 미안함과 책임감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케일럽은 정말 고맙고 착한 아이야. 앞으로 더 신경 쓰고 챙겨주어야지.’
그런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케일럽의 얼굴이 갑작스레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수줍은 듯 눈을 굴렸다.
“저, 폐하. 결코 대신이라는 건 아니지만…….”
“물론이지. 내게 부탁할 게 있니? 뭐든 말해보렴.”
“혹시 지금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바로 그때였다.
“그거 유감이로군. 황후에게는 바로 다음 일정이 있어서 말이지.”
케일럽의 아직 소년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목소리와 대조적인, 지극히 낮고 깊게 울리는 음성. 커다란 손이 나의 어깨를 감쌌다. 나는 그 감촉이 어느덧 꽤 익숙해졌음을 깨닫고, 나 자신에게 조금 놀랐다.
“그렇지? 로벨리아.”
고개를 돌리니, 예상대로 금빛 눈동자가 보였다. 알렉산드로스의 금빛 눈은 나를 향해 곱게 휘어져 웃고 있었다.
“아, 네. 그렇긴 하죠. 연말 사교 행사 준비 회의 말이죠?”
내 말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어쩐지 의기양양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케일럽을 보았다. 그의 말에 케일럽의 웃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허공에서 알렉산드로스의 금빛 눈과 케일럽의 갈색 눈, 두 쌍의 눈빛이 맞부딪쳤다. 늘 순하고 걱정스러울 정도로 마음이 여린 케일럽이지만, 놀랍게도 이때만큼은 알렉산드로스에게 조금도 기세가 뒤지지 않았다. 맞부딪친 두 사람의 시선에는 스파크라도 튈 것 같은 긴장감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의 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겨왔다.
“조금 후에 있을 회의, 기대되는군.”
“회의가 기대될 게 뭐 있어요? 업무 얘기를 하는 자리잖아요.”
“하지만 우리 둘만의 대화 아닌가. 그저께 밤의 ‘그 일’ 뒤로 단둘이 있는 건 처음이기도 하고.”
“‘그 일’……?”
멀찍이서 대기하던 시녀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내 허리를 감은 그의 손을 찰싹 내리쳤다.
“오해할 만한 말 하지 마세요!”
“오해할 게 뭐가 있지? 말 그대로인데.”
내가 도망쳤다가 돌아온 뒤, 알렉산드로스는 내 말에 거의 껌뻑 죽고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거부감을 나타내면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오늘은 어린애처럼 고집을 피웠다.
“정말, 당신 자꾸 이럴 거예요?”
“하하, 너무 화내지 마, 로벨리아. 내가 너무 들떠서 그래. 그대와 단둘이 있을 시간만을 계속 기다려왔거든…….”
속삭이듯 나직한 소리와 함께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의 숨결이 내 어깨에 닿는 기분은 당혹스럽긴 해도 싫지 않았다.
“어휴……. 일단 이번만 봐 드릴 테니, 이따가 마저 이야기해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 주변의 시녀들은 로벨리아와 알렉산드로스의 사이좋은 모습을 보고 자기들끼리 수군대고, 좋아하는 티를 감추지 못했지만……. 케일럽만큼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저 보기 싫고 얄미운 황제가 수작을 부리는 모습은 익숙했다. 보란 듯이 밉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승리감을 드러내는 것도. 하지만……. 케일럽을 그 무엇보다도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황후 폐하께서…… 싫어하시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아.’
오직 그것만이 그의 마음을 부수었다. 사실 이렇게 될 것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3개월 동안이나 연금되어 있는 동안에도 황제는 그 수작을 멈추지 않을 것이었고, 황후는 마음이 여렸으니까. 사실은 그녀를 납치하지 않기를 선택했을 때부터, 그녀를 도와 황궁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했을 때부터……. 계속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역시……. 직접 보는 것은 상상만 했을 때보다 훨씬 더 괴롭구나.’
기댈 곳 하나 없이 부평초처럼 살아온 17년 인생에서 최초로 찾아온 감정. 가치관도 바꾸고, 자신의 오만함을 깨닫게 하고, 인생의 목적조차 송두리째 바꿔놓을 정도로 강렬한 이 감정. 이 깊디깊은 연모의 상대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역시…… 내가 잘못 선택했던 것일까? 그때 폐하를 독점하는 쪽이 옳았던 건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머리로 아무리 계산하고 또 되짚어보아도, 자신은 설령 그때로 되돌아간대도 그런 행동은 할 수 없었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는 다시 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배신할 수 없었다. 인생 최초로 자신을 믿어준 사람의, ‘신뢰’라는 보물을 제 손으로 부수어버리는 짓 따윈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온기를 알아버렸다. 따스함 없는 세상에서 살 때는 그것의 소중함도 몰랐지만 한 번 알아버린 이상 결코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런 이상 이제는 어쩔 수 없어. 후회할 것도 없어.’
첫사랑의 실패에 가슴이 무너지듯 아팠지만…….
‘그래도 웃어야지. 황후 폐하께 괴로운 얼굴을 보여드릴 수는 없잖아.’
케일럽은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애써 웃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에게 표정을 바꾸는 일 따위는 몹시 쉬운 일이라서. 황후 폐하께 언제나 사랑스럽고 좋은 모습만 보여드릴 수 있어서. *** 케일럽과 노먼의 연금은 같은 날 풀렸기에, 나는 노먼에게도 찾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노먼은 방문을 거절했다. 내가 황궁을 떠난 것이 노먼과의 사랑의 도피 때문이라는 소문이 돈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당분간은 서로 접촉에 신중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야. 나야 소문이 어떻게 나도 상관없지만 노먼의 명예도 걸려 있는 일이니……. 더군다나 그는 아들도 있으니 새장가를 들지도 모르는데 더더욱 조심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를 방문하는 대신, 선물을 보내 축하와 감사, 미안함의 마음을 표현하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알렉산드로스는 우리의 단둘의 대화를 무척 기대하고 있다더니, 케일럽을 만나러 찾아갔던 궁인 숙소에서부터 황후궁까지 가는 데에도 내 곁에 꼭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연말 행사에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는 것 같던데.”
황후궁으로 가는 길, 알렉산드로스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네, 그렇죠. 듣기로는 올해의 사교 시즌이 ‘지난 60년간 가장 지루한 사교시즌’으로 불린다면서요? 올해의 사교 시즌이 지루하게 된 데에는 제 책임이 크니,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굉장히 흥미로운 행사를 준비해보려고요.”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괜찮아. 감히 그대를 탓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겠나. 만일 있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텐데.”
가벼운 어조를 보아하니 농담이랍시고 한 말이겠지만……. 그의 전적이 화려하다 보니 어쩐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런 말은 농담이라도 하지 마세요. 굉장히 살벌하게 들리니까.”
“그러지. 나의 황후는 마음이 여려서 탈이라니까.”
우리는 황후궁 응접실에 도착했다. 문을 닫음과 거의 동시에 알렉산드로스가 말했다.
“그대도 고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어제는 그대를 찾아오지 않았는데……. 이제는 나도 기다리기가 힘이 들어. 그러니 오늘은 슬슬 대답을 듣고 싶군.”
“…….”
“그대도 이 질문을 예상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한숨을 쉬었다.
‘올 것이 왔구나.’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다녔다. 그리고 그저께, 나는 그와 키스했다.
‘이런 상황에서 궁금해하지 않는 쪽이 이상하겠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나는 혀로 입술을 적셨다.
“로벨리아. 내가 키스하는 것을 허락한 것은 어째서지?”
사실 나는 아직도 그 대답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혼란스러웠다. 내가 그의 키스를 허락한 데다, 게다가……. 조금도 싫지 않았던 이유가.
‘약간 감이 잡히는 것은 있지만……. 이것을 입 밖으로 내어놓기에는 아직, 확신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무언가 대답을 하긴 해야 할 텐데……. 나는 지금 뭐라고 해야 할까?’
하나 내가 대답을 하기 전, 알렉산드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그대에게 그리 오랫동안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내가 뻔뻔스럽게도 그대의 사랑을 받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 네?”
상상도 못 한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산드로스는 미소 지었지만, 그 웃음은 몹시 씁쓸해 보였다. 슬픔을 참고 억지로 웃는 것처럼.
“하지만, 만약 그대가 내 육체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얼마든지 이용해도 좋아. 내가 비록 경험이 풍부하진 않지만, 서책으로 학습한 바 있고 꽤 잘할 자신이 있으니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기가 막혔다.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육체에만 관심이 있어서 키스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상황상 이런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긴 하지만…….’
그의 몸만을 탐하고 이용하려는 사람으로 오해받은 것은 황당했지만, 그것보다 더 궁금해진 것이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와도 동침하지 않고, 황비와도 동침하지 않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아내들과 여태껏 동침 한 번 하지 않은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텐데, 이런 식으로 그 규칙을 깨도 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