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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황후 폐하는 빙의자인가요? (102/151)

102. 황후 폐하는 빙의자인가요?2021.12.23.

16549693608334.jpg‘대신관이 또 찾아왔다고?’

로벨리아는 일전에 알렉산드로스가 공개적인 파티에서 대신관에게 모욕을 줬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행히 별일 없이 지나가긴 했지만 로벨리아가 생각하기에 그건 위험한 행동이었다. 외교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16549693608334.jpg‘물론 알렉산드로스가 아무 생각 없이 그랬을 리는 없고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랬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쨌든, 그때 알렉산드로스가 대신관을 그리 푸대접했는데 지금 자신이 그를 맞이하지 않는 건 좀 위험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를 맞이했다.

16549693608347.jpg“태양의 유일한 반려, 제국의 달을 뵙습니다.”

대신관은 언제나 같은 흠 잡을 데 없는 예법으로 인사했다. 그의 나긋나긋한 미소 위로 외알안경이 반짝였다.

16549693608334.jpg“어서 와요, 대신관. 하녀들에게 차를 내오도록 하죠. 아, 여우 역시 함께 내놓을 테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16549693608347.jpg“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몹시 애호하시는 애완동물이 아닌가요. 게다가 저도 동물을 좋아합니다.”

16549693608334.jpg“아무리 그래도 동물을 옆에 둔 채 손님을 맞이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 하녀들이 다과를 준비하고 여우를 응접실 밖으로 내놓았다. 로벨리아는 상대에게 자리를 권한 뒤 물었다.

16549693608334.jpg“오늘은 어쩐 일로 찾아오셨나요?”

16549693608347.jpg“다름이 아니고 지난주에 황비님이 황후 폐하께 진중한 사죄를 올렸다고 들었는데, 마음에 흡족하셨을지 궁금해서 이리 찾아왔습니다.”

일전에 대신관이 그녀를 찾아왔을 때, 그는 로벨리아와 아이샤가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낼 것을 권했고, 그때 로벨리아는 아이샤가 진지한 사과를 하면 한 번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 대신관이 정말 약속대로 아이샤에게 사과를 종용했는지, 지난주 아이샤가 로벨리아를 찾아왔다. 진지한 사죄를 올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16549693608371.jpg‘제가 그간 철이 없고 부덕했던 탓에 같잖은 투기심으로 황후 폐하께 많은 심려와 괴로움을 끼쳤습니다. 진심으로 송구하고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샤의 얼굴은 꽤 진지해 보였다. 하지만 로벨리아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아이샤가 연기를 잘한다는 것 정도는 이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언행을 꾸며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것만으로 상대가 진심으로 반성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는 없었다.  

16549693608334.jpg‘심려와 괴로움 같은 말로 얼버무리지 말고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지 그러니?’

16549693608371.jpg‘네?’

16549693608334.jpg‘네가 이제껏 내게 피해를 주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지금 모두의 앞에서 하나하나 전부 고해보렴.’

  로벨리아의 말에 아이샤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하얗게 핏기가 빠져 나갔다.  

16549693608371.jpg‘그, 그걸 지금 전부 말씀드리기는 좀…….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듯해, 황후 폐하의 귀하신 시간을 빼앗을까 저어됩니다.’

16549693608334.jpg‘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상관없단다. 기다려 줄 테니.’

  아이샤는 당혹함을 숨기려 애쓰며 주변의 시선을 살폈다. 그곳에는 로벨리아와 아이샤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사용인과 궁인, 호위기사 등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16549693608371.jpg‘그……. 먼저, 황후 폐하와 황제 폐하의 관계가 보이는 것만큼 좋은 건 아니라고 소문을 냈던 일. 그, 그리고 또……. 황제 폐하를…… 육체적으로 유혹한 것이 아니냐고 한 일. 저, 그리고 또…….’

  당연한 일이지만 아이샤가 자신이 한 일들을 떠올리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당한 사람은 오래 기억해도 가해한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을 별것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금방 잊어버리기 마련이니까. 아이샤가 자신이 했던 일을 전부 떠올려내는 데에는 8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로벨리아는 그 시간 동안 꿋꿋이 기다려 주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로벨리아를 암살하려고 했던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건 아무런 물증이 없을뿐더러 이렇게 사과를 한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8시간 동안 서서 자신이 잘못한 것들을 되짚어 말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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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샤는 거의 우는 듯한 얼굴로 마지막 말을 쥐어 짜내고 로벨리아를 보았다.  

16549693608334.jpg‘그래, 참 많은 일들을 했구나. 이제 네가 저지른 잘못들의 크기와 수치심을 알겠니?’

16549693608371.jpg‘……네.’

  아이샤는 붉어진 눈으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49693608371.jpg‘그럼…… 이제 저를 용서해주시는 건가요? 용서받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요.’

  흰자가 붉어진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 속마음이 너무나 뻔하게 눈에 보여서 로벨리아는 피식 웃었다.  

16549693608334.jpg‘생각해본다고 했지 용서해 준다고는 하지 않았단다.’

16549693608371.jpg‘네, 네……?!’

16549693608334.jpg‘끊임없이 나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날 견제하는 행동에 대해서 사과를 받았으니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믿으마. 그리고, 네가 정말 변했다는 신뢰가 생길 때까지 그 사과를 받는 것은 보류하도록 하지.’

16549693608371.jpg‘하, 하지만……! 전 정말 열심히 했는 걸요. 황후 폐하께서 시키시는 대로 다 했어요! 8시간이나 걸려서 수치심을 참고 제가 지은 죄를 전부 고하기까지 했는데 그런데도 용서해주지 않으신다는 건가요?’

16549693608334.jpg‘죄지은 사람의 노력이 반드시 용서받을 것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단다. 그러니 처음부터 죄를 짓지 말았어야지.’

  로벨리아는 냉정하게 말했다.  

16549693608334.jpg‘사과는 필수지만 용서는 선택이란다. 사과한다고 무조건 용서받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16549693608371.jpg‘너, 너무해……!’

16549693608334.jpg‘내게 정말로 용서받고 싶다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고작 8시간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길고 오랜 노력이 필요할 거란다. 특히나 용서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태도 따위는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 있어서 최악이지.’

  아이샤는 그제서야 체념한 채 고개를 푹 떨구고 돌아갔다. 애초에 로벨리아는 아이샤가 사과한다고 곧바로 용서해줄 생각은 없었다. 로벨리아의 암살을 사주한 용의자 중 가장 유력한 사람이 바로 아이샤였기 때문이다.

16549693608334.jpg‘이제 와서 사과하고 싶다는 둥, 용서받고 싶다는 둥 하는 것도 나를 다시 암살하기 위해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밑밥일 가능성이 높지.’

그럼에도 로벨리아가 용서의 여지를 준 것은 정말 만에 하나, 자신을 암살 사주한 사람이 아이샤가 아닐까 봐서였다.

16549693608334.jpg‘한 90% 정도는 아이샤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에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설령 진짜로 아이샤가 범인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녀가 정말로 바뀌었고 알렉산드로스처럼 뼈저리게 후회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용서해주지 않을 거야.’

과연 아이샤는 변할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생각했지만, 그 아주 적은 가능성이 현실이 될 경우를 대비해 로벨리아는 아이샤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때의 일이 생각나자 씁쓸한 기분에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16549693608334.jpg“황비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신관에게 말해주지 않았나 보군요? 저는 황비를 용서하는 일은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황비가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서 저도 그녀를 다르게 대할 예정입니다.”

대신관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49693608347.jpg“그러셨군요. 물론 이해합니다. 황비님이 그간 황후 폐하께 끼쳤던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요. 황비님은 황후 폐하께서 마음에 흡족하실 때까지 몇 번이고 사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진심이 언젠가는 황후 폐하께도 닿길 바랍니다.”

16549693608334.jpg‘아이샤가 그런 말을 했다고? 믿어지지 않는걸.’

로벨리아는 대신관의 말이 미심쩍게 느껴졌다. 어쩐지 그는 로벨리아와 아이샤가 화해하기를 지나치게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아이샤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 아이샤가 좋은 인간관계를 쌓기를 바라는 것도 당연하긴 하겠지만…….

16549693608334.jpg‘게다가 아이샤가 대신관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이상해. 아이샤가 대신관에게 내게 사과한 결과는 알려주지 않았는데, 앞으로도 몇 번이고 사과할 수 있다는 말은 했다고? 앞뒤가 안 맞잖아.’

역시 그는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로벨리아는 그가 아이샤의 언행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꾸며내서 자신과 아이샤의 관계를 완화 시키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간질의 반대라고 해야 할까.

16549693608334.jpg‘물론 이것도 다 심증뿐이긴 하지만.’

16549693608334.jpg“어쨌든, 이걸로 그대의 궁금증이 해결되셨다면 다행이로군요. 저는 오늘의 업무를 아직 시작하지 못해서 이만 가봐야 할 듯해요. 다과를 편히 즐기다 가시길 바라요.”

이만하면 최소한의 예의는 차린 듯했다. 로벨리아는 대신관에게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더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았다.

16549693608347.jpg“아아, 정말 죄송하지만, 제 궁금증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황후 폐하.”

16549693608334.jpg“또 어떤 질문인가요?”

16549693608347.jpg“일전에 황후 폐하께서는 제게 ‘빙의자’의 존재에 대해 여쭤보셨었지요. 기억하십니까?”

‘빙의자’.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로벨리아는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알렉산드로스와 입을 맞출 때와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대체 왜 이 세계에 떨어졌는지,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로벨리아는 그에 대해 무척 궁금해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동요를 상대가 눈치채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태도를 정돈한 채 대답했다.

16549693608334.jpg“네. 책에서 관련된 정보를 읽은 뒤 궁금해져 대신관에게 여쭤보았지요. 그래서요?”

16549693608347.jpg“이런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실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같이 지극히 평온하고 부드러운 어조. 대신관은 다정한 목소리로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건넸다.

16549693608347.jpg“혹시, 황후 폐하께서는 바로 그 빙의자이신 게 아닙니까?”

굉장히 충격적이긴 했지만……. 대신관이 아까 빙의자라는 말을 꺼낼 때부터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 못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로벨리아는 담담히 반응할 수 있었다.

16549693608334.jpg“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16549693608347.jpg“그러니까 제 말은, 황후 폐하께서는 로벨리아 황후 폐하이시나 로벨리아 블란쳇 공작영애로 살아보신 적이 없는 게 아닌가 여쭙는 겁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성녀와 같이 본디 다른 세계의 일원이신데 어느 날 이곳 제국의 로벨리아라는 여성이 되신 것이 아닌가요? 그 시기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고요. 아마도……. 음, 한 일 년 반에서 이 년 정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의 어조는 여전히 여상했으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로벨리아의 정곡을 찔렀다.

16549693608334.jpg‘표정 관리에 능한 편이라 정말 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한 그녀가 되물었다.

16549693608334.jpg“당황스러운 질문이군요. 제가 이세계의 인물인데 어느 날 이 몸속에 들어왔다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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