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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 술에는 새 부대, 새 삶에는 새 집 (3/151)

3. 새 술에는 새 부대, 새 삶에는 새 집2021.01.10.

그것은 나로서도 예상 밖의 말이었다.

16549673319259.jpg‘원작을 읽을 때는 그냥 순둥이인 줄 알았는데. 의외네.’

한없이 순진한 애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내가 예상 밖의 행동을 하니 당황해서 견제하는 걸까? 아니면 원래 이런 애였던 걸까? 꽤 유치하고 수준 낮은 도발이었다. 저런 유치한 도발에 그렇게까지 진심으로 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어차피 앞으로 그녀에게 로벨리아가 당해왔던 것들을 갚아줄 기회는 많을 것 같고. 그래서 나는 긴말 하지 않고 그냥 코웃음을 쳤다.

16549673319259.jpg“풋!”

그러자 상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식간에 순진한 얼굴로 변하긴 했지만 순간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나는 분명 보았다.

16549673319267.jpg“왜…… 웃으시는 거죠? 제가…… 뭔가 우스운 말이라도 했나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다른 사람이 앞뒤 사정 모르고 그 모습만 본다면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6549673319259.jpg“그냥, 웃겨서요.”

16549673319267.jpg“뭐, 뭐라고요?”

아니, 생각해보니 내가 쟤한테 굳이 경어를 써줄 필요도 없지 않나? 로벨리아는 천성이 워낙 순해서 자신의 아랫사람인 아이샤에게도 꼬박꼬박 경어를 써줬다지만 난 로벨리아가 아니다.

16549673319259.jpg“별것도 아닌 거로 자기 몫 지키겠답시고 아웅다웅하는 꼴이 웃기지 않니?”

아무렇지도 않은 나의 말에 아이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어떤 것이 제일 당혹스러웠던 걸까. 로벨리아가 갑자기 자신을 하대하기 시작한 것? 자신의 도발에 티끌만큼도 넘어오지 않는 것? 그렇게나 알렉산드로스에게 매달리던 로벨리아가 황후라는 자리를 ‘별것도 아닌 것’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 아이샤는 이제 거의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16549673319267.jpg“별……것도, 아닌 거?”

16549673319259.jpg“그래. 너 다 가져. 나는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으니까.”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싱긋 웃어 보이곤, 그녀를 버려두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난 정말 다 버리고 싶었다. 황제도, 황후라는 직위도. 둘이 천년의 사랑 하면서 지지고 볶든 내가 알게 뭐람. 나만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야. 아이샤는 충격을 받았는지 나를 따라오거나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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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래도 합의 이혼은 그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이혼을 ‘당하’기로 했다.

16549673319259.jpg‘무엇이든 하여도 좋다고 했지.’

그저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입에 담은 말이겠지만 그는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었다. 나는 이혼 당하기 위해, 악녀가 되기로 했으니까.

16549673319259.jpg‘악녀라니, 나쁘지 않은 걸!’

악녀란 뭐든 내 마음대로 하고 남의 눈치는 하나도 보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다. 어떤 의미로는 착한 여주인공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16549673319259.jpg‘국고도 펑펑 축내고 빈둥빈둥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나 하면서 지내야지.’

현실로 돌아갈 뾰족한 수가 없다면, 나는 이 상황을 즐기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이사를 가는 것이었다. 황후궁은 내가 살던 자취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크고 화려했으며, 고풍스러운 가구로 넘쳐났으나, 그래봤자 황제궁이나 황비궁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황제가 그녀를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 자연스레 궁내의 사용인들도 황후궁에 신경을 덜 썼다. 더군다나 로벨리아는 검소한 아이샤를 따라 한답시고 외풍이 들어오는 황후궁을 수리하지도 않았다. 아이샤가 암만 검소하게 굴어봤자, 황비궁은 황제와 그의 눈치를 보는 가신들이 매일 선물해주는 값비싼 물건들로 가득한데! 이 외풍 들어오는 황후궁은 지금은 약간 쌀쌀하다 정도지만 1년 뒤에는 황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추워져서, 로벨리아는 폐병에 걸려 황후궁에서 쓸쓸하게 병사한다. 이혼을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니 당연히 황후궁을 수리하고 내 취향대로 제대로 꾸며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본 규모가 있다 보니 수리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든다. 그리고 나는 공사 중인 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16549673319259.jpg‘새 술에는 새 부대라는 말도 있고, 역시 기분전환에는 새 집이 최고지.’

그래서 난 당분간 이사를 가 있기로 했다. 줄줄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시종들과 사용인의 행렬. 황궁에서도 보기 드문 행렬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16549673319267.jpg“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아이샤가 나의 이사 행렬을 보고 기겁했다.

16549673319259.jpg“보면 모르니? 이사 중인데. 지금 황후궁을 수리하고 있거든.”

16549673319267.jpg“그, 그, 그런데 왜…….”

내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으나…… 아이샤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얼굴이었다.

16549673319267.jpg“이사를 우리 궁으로 오냐구요!”

그렇다. 내가 이사한 곳은 바로 아이샤가 쓰고 있는 황비궁이었다. 황후나 황비를 위한 예비 궁들도 있기는 하지만 황궁 내에서 꽤 후측에 위치해 있어서 동선이 좋지 않았다. 비어 있는 황자궁이나 황녀궁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아이샤와 같은 궁을 쓰기로 했다.

16549673319259.jpg‘어차피 엄청 커서 남는 방도 많을 텐데, 뭘.’

시종들에게 이 가구는 저기에 놓아라, 저기는 창고로 쓰겠다 등등 지시를 내리던 나는 아이샤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16549673319259.jpg“불만 있으면, 네가 황후궁 쓸래? 외풍도 시원하고 인테리어도 딱 네 검소한 취향에 잘 어울리는데.”

16549673319267.jpg“그, 그런……!”

16549673319259.jpg“뭐, 아니면 예비 궁을 쓰든가.”

집주인더러 꼬우면 네가 나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지만 어차피 난 악녀가 되기로 했으니 철면피를 썼다. 아이샤는 보기 좋게 일그러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로 내가 보기 싫어서 황비궁에서 나가려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지만,

16549673319267.jpg“여기는 제 궁이에요! 제가 왜 나가겠어요?”

그래도 여주인공이라는 것일까. 자존심은 있는지 자기 구역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나는 붉은 연지를 바른 입술을 끌어올려 생긋 웃었다.

16549673319259.jpg“뭐, 그래. 그럼 앞으로 한동안 같이 살겠네?”

그렇게 말하는 내 얼굴에서 음험한 기운이라도 감지한 것일까?

16549673319259.jpg“같은 여자끼리, 잘 지내보자고. 응? 아이샤.”

그녀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아이샤는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뜨려다가, 다시 돌아와서 말했다.

16549673319267.jpg“정말 걱정되어서 그러는데요, 로벨리아. 로벨리아가 저를 싫어하는 것은 이해해요. 전 정말로 괜찮아요. 하지만…….”

그새 표정을 좀 정돈한듯한 아이샤가 진심 어린 걱정이 담긴 얼굴로 말했다.

16549673319267.jpg“폐하도…… 괜찮게 여기실까요? 전 그게 정말 걱정되네요.”

얼씨구, 왜 또 착한 척을 하나 싶었더니, 결론은 그거군. ‘우리 폐하에게 이를 거야!’. 정말이지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애 같았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16549673319259.jpg“어머, 그러니?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아이샤.”

귓등으로도 들은 척하지 않는 내 태도에 가까스로 표정 관리에 성공했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그녀는 이번에는 정말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게 정말로 알렉산드로스에게 이르러 가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대략적인 이사를 끝마치고, 내가 차지한 황비궁의 제일 큰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그가 찾아왔다. 그러니까, 황제 알렉산드로스가 그 귀하신 몸을 이끌고 달려왔단 말이다.

16549673364956.jpg“로벨리아.”

검은 예복을 입은 그가 내 새 방에 걸어들어왔다.

16549673319259.jpg‘올 것이 왔군.’

그의 등장을 예상하고 있던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나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어나 적당히 예를 차렸다. 거리를 두는 듯한 나의 인사에 그가 손짓했다. 예법을 거두어도 된다는 뜻이리라. 알렉산드로스의 맹수를 닮은 금빛 눈동자가 내 어깨 너머로 방 안을 훑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16549673364956.jpg“평소와 같이 집무를 보고 있었는데 황비가 찾아오더니 내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더군. 로벨리아, 그대가 황비궁에서 살겠다고 고집을 피운 것이 사실인가?”

16549673319259.jpg“그렇습니다만.”

내가 거리낄 것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말이지 황당한 것 같기도 하고, 골치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었다.

16549673364956.jpg“대체 어쩐 일로 황비궁이 그대의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대에게는 황후궁이 있지 않은가? 황후궁은 이곳보다 훨씬 넓고 호화로울진대 어찌하여 황비의 궁을 탐내는가. 황후가 황비궁을 탐내는 건 제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16549673319259.jpg“하지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무엇이든 하여도 좋다’고 하명하신 것은 폐하가 아니시옵니까?”

16549673364956.jpg“뭐라고?”

16549673319259.jpg“그래서 저는 폐하의 존엄하신 명을 받들어 원하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황비의 의사를 무시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황비에게 황후궁을 내어주겠다는 제안도 했지만,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은 황비랍니다.”

16549673364956.jpg“억지를 부리고 있군. 로벨리아, 새로운 궁이 필요하다면 지어도 좋다. 지금의 황후궁과 황비궁을 합친 것보다 더 크고 화려한 궁을 세워도 좋아. 헌데 그것도 아니고 남의 궁을 빼앗는 일은 옳지 않다는 걸 그대도 알고 있을 텐데?”

바른 말은 참 잘하신다. 그렇게 옳고 그름을 잘 아는 분께서 하나뿐인 아내는 왜 그리 냉대하셨을까? 굳이 그와 더 말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16549673319259.jpg“다른 궁이 아니라 그 황비궁이 탐이 나는 걸 어떻게 합니까? 다시 말씀드리자면, 제게 무엇이든 하여도 좋다고 하신 건 폐하이십니다.”

허공에서 날카로운 기류 두 개가 맞부딪쳤다. 하나는 나의 시선, 또 하나는 그의 시선. 녹색과 금빛의 눈빛이 허공에서 뒤얽혀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었다. 짧지 않은 대치에서, 그 어느 한 쪽도 쉬이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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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결국 한 수 접고 들어간 건…….

16549673364956.jpg“무슨 일이 있어도 물러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바로 알렉산드로스였다. 그는 잘생긴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16549673364956.jpg“마음대로 하시오. 그대가 이토록 쇠고집인 줄은 꿈에도 몰랐군.”

16549673319259.jpg‘이겼다!’

좀 유치하긴 하지만 괜한 승리감이 들었다.

16549673319259.jpg‘아니지, 황비궁을 뺏어 쓰겠다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줄 정도로 나와 이혼하기 싫다는 거니까, 결국 나한테는 안 좋은 건가?’

하지만 뭐, 그런 생각을 미리 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지금의 성공을 만끽해도 충분하리라. 나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걸치며 치마폭을 잡아들었다.

16549673319259.jpg“현명한 판단이십니다.”

16549673364956.jpg“서로 다른 타인이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황실의 명예를 위해 괜한 잡음은 만들지 말도록 하시오. 나도 황비를 어떻게든 설득해볼 터이니.”

쉽게 말해서 황비랑 싸우지나 말란 뜻이다.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16549673319259.jpg“글쎄요, 그건 황비의 언행에 달려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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