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런 멍청한 옷을 누구더러 입으라는 거야?2021.01.14.
임시로 황비궁에서 지내게 됐다고 하더라도 대충 살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충분히 ‘내 집 같은’ 기분을 만끽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황비가 빈방으로 놔두었던 방들을 대거 점령해서 내 물건으로 채워 넣었다. 이곳은 옷방, 이곳은 응접실, 이곳은 손님방, 이곳은 창고……. 아이샤가 뒤늦게서야 자신의 구역을 지키려고 발악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선빵 필승’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 땅따먹기는 먼저 시작한 나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검소한 척하면서 많은 방을 비워두었던 그녀이기에 더더욱. 결국 황비궁에서 내가 쓰는 구역이 그녀가 쓰는 구역보다 넓어져 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느샌가 내 물건으로 가득 찬 방들을 보며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지는 아이샤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솔직히 꽤 통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심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설마 아이샤가 가만있을 리 없겠지.’
알렉산드로스에게 심각하게 의존하던 그녀의 행동을 보면, 이번에도 분명 쪼르르 달려가서 그에게 일러바칠 것이 분명했다.
‘지난번에는 잠깐의 눈싸움으로 해결되었지만, 아이샤가 더 강하게 요구한다면 알렉산드로스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겠지.’
비록 지난번에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이 아이샤를 설득해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이 딱히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는 내게 별달리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래서 나는 조만간 있을 아이샤 혹은 알렉산드로스와의 대치를 예상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뭐지? 의외로 아무 일도 없는걸.’
그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아이샤는 황비궁의 7할을 내가 차지한 것에 대해 나에게 항의를 하러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알렉산드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비궁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한 건물이다 보니 종종 아이샤와 마주칠 때가 있었다.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나와 마주치자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그냥 고개를 홱 돌리고 말았다.
“아, 피곤해. 나 이만 들어갈래.”
“그러시겠어요, 전하?”
“방에서 피로 회복에 좋은 따뜻한 차를 끓여드리겠습니다.”
아이샤와 그녀의 시녀 무리는 내게 인사 한 마디 하지 않고 우르르 사라졌다.
“저, 저, 저런! 오만불손한 무뢰한 같으니!”
“황비가 틀림없이 이쪽을 보았습니다, 폐하! 한 시녀는 저와 눈이 마주치기까지 한 걸요.”
“이쪽을 보고서도 궁 내의 웃어른이신 황후 폐하께 인사 한마디 올리지 않다니!”
나를 둘러싼 시녀들이 아이샤의 노골적인 무시에 화를 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쫓아가서 꾸중이라도 할까요?”
“되었다. 일일이 인사받아주는 것도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니.”
열정이 넘치는 시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어쩜 이렇게 자비로우실까…….”
“황비도 폐하의 자비와 관대함을 믿고 방종하게 구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게 아닌데……. 일단 정말로 자비로운 사람은 남의 궁에 쳐들어와서 땅따먹기를 하지 않는다. 시녀들은 로벨리아를 너무 잘 따라서 내 행동을 지나치게 좋게 봐주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화가 나지 않는 건 그저 내가 아이샤에게 아무런 관심도, 기대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까 나를 마지막으로 볼 때 아이샤의 눈빛, 분명히…….’
확실했다. 아이샤의 표정은 내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꾹 참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검은 눈동자에는 일순간 억울한 빛이 비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스스로 참는 거라면 그런 억울한 얼굴을 할 리가 없으니 분명 누가 입막음을 한 거겠지.’
확실했다. 그리고 아이샤가 내게 항의를 하지 않게끔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황궁 내에 있다면 그건 바로…….
‘알렉산드로스가 내 생각보다 더 ‘잘 달랜’ 모양인걸.’
지난번 말했던 자기가 설득해 보겠다는 말은 그냥 입에 발린 말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꽤 ‘잘 달랜’ 모양이었다. 아이샤가 저렇게 억울해하면서도 내겐 아무 말도 못 하는 걸 보면. 그 사실은 내게 있어 그를 다시 보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리고 그만큼이나 나랑 쉽게 이혼해줄 생각이 없다는 뜻도 되지.’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자신이나 아이샤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을 막으려는 눈치였다. 내가 이혼 얘기를 다시 꺼낼까 봐 꺼리는 것이리라.
‘알렉산드로스가 아이샤의 궁에 내가 쳐들어온 것도 항의하지 못하게 할 만큼 내가 이혼 얘기를 꺼낼 구실을 막으려고 하는구나.’
그의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내 예상보다 강했다. 그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피곤해졌다.
‘이래서야 차라리 아이샤가 날 귀찮게 하는 쪽이 나을지도.’
새삼스럽게 원작의 내용이 떠올랐다. <이세계에서 온 꽃>은 상당한 인기작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천사 같은 여주인공 아이샤와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짐승직진남주 알렉산드로스를 사랑했지만 나는 그들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아이샤와 비교되기 위해 존재하는, 다방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찬밥 취급만 당하던 조연 로벨리아에게 이입이 됐다. 아직은 초반이라 덜하다지만 이제 곧 둘이 좋아 죽을 테고, 알렉산드로스를 포함한 황궁 전체가 노골적으로 로벨리아를 찬밥 취급할 테니 나는 이곳에서 한시라도 더 있고 싶지가 않았다.
‘그 꼴을 보면서 나더러 여기에 붙어 있으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을 당해야지.’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혼을 당하려면 이것보다 더한 악녀 짓을 해야 해.’
로벨리아의 효용이고 뭐고, 알렉산드로스가 질려서 이젠 됐다고 내쳐버릴 만큼 지독하고 악랄한 악녀말이다.
‘그리고 악녀라고 하면…… 역시 사치지.’
그런 생각을 하는 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렇게 해서 내가 황비궁에 들어간 지 사흘 뒤. 황비궁 앞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줄을 이었다. 그들은 모두 내가 부른 드레스 디자이너와 조수, 비단 상인, 보석 상인 등으로, 수도는 물론 제국 전체의 이름난 자들은 전부 불러모은 것이었다. 수도에서 먼 지역에 거주하는 자는 값비싼 텔레포트 마법까지 사용하여 데려왔으니,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아이샤도 검소한 척하지만, 로벨리아도 그런 아이샤를 따라 하느라 가진 물건이 그리 많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대한민국의 평범한 서민이던 내가 보기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의상과 보석, 가구를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대륙 최고의 위세를 자랑하는 제국의 황후라고 보기엔 많이 부족했다. 나는 로벨리아의 낡은 옷과 보석을 거의 다 내다 버렸다. 불태우고, 땅에 묻고, 그럴 수 없는 것들은 그냥 시녀들과 로벨리아를 모시느라 고생하는 사용인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고 나서 새 옷과 보석을 맞추기 위해 부른 자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여기 이런 드레스는 어떠신가요? 황후 폐하의 붉은 머리카락과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수도의 모든 귀부인들이 선망한다는, 평범한 귀부인이 의뢰를 맡기려면 2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는 일류 디자이너는 지금 내 응접실에 있었다. 그는 더없이 싹싹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내게 드레스 디자인과 옷감을 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실내가운을 입은 채로 푹신한 카우치에 앉아 디자이너들이 보여주는 디자인 카탈로그와 옷감 샘플들을 팔랑팔랑 넘겨보는 중이었다.
‘일류 디자이너는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네.’
나는 패션이나 제국의 유행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런 내가 봐도 드레스의 디자인들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세련되고 아름다운 것뿐이었다. 옷감 샘플은 또 어떤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실크부터, 새틴, 벨벳, 그 외에도 내가 이름을 모르는 온갖 고급스러운 천들이 있어서, 보고 만지는 것만으로도 희열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고 있자니 새삼 감회가 썰물처럼 밀려왔다. 나는 평생 패션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시피 했다. 사실 관심을 안 뒀다기보다는 ‘못 뒀다’에 가까울 거다. 내가 나고 자란 가정은 중산층으로 돈이 없지는 않았지만 내게 쓸 돈만은 없었다. 내게는 오빠가 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의 모든 기대와 관심은 오빠의 몫이었다. 내가 학원 하나 못 다녀보고 독학으로 대학에 가고,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동안 오빠는 부모님의 지원 아래에서 조리고를 나와 몇 번이고 재수를 하다가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나는 그런 집안이 너무 싫어서 고시에 합격하자마자 저금을 긁어모아 독립했다. 하지만 몸은 부모님에게서 떨어질 수 있어도 마음과 미련만은 완전히 떼어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너희 오빠 유학 보내느라 등골이 휘는데, 네가 비용 좀 보태다오.’
‘이제 곧 아빠는 정년이지, 정현이는 해외로 가서 얼굴도 못 보지, 힘들어 죽겠구나.’
‘너는 운이 좋아 처음부터 떡하니 대학에 갔지만 네 오빠는 가고 싶은 대학 하나 못 갔는데, 네 오빠가 불쌍하지도 않니?’
나는 내가 더 노력하고, 정말로 도움이 되면 부모님이 날 오빠처럼 사랑해줄 거라는 헛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공부가 더 하고 싶어서 휴직을 하고 석사 과정을 밟기 위해 대학원행을 선택했을 때 부모님이 얼마나 반대를 하셨는지 모른다. 절연하고 호적에서 파겠다는 으름장을 듣고 나서야 나는 정신이 들었다. 오빠가 부모님에게 무슨 도움이 되어서 사랑받은 것이 아니었듯 나 역시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사랑받지 못한 것이 아니다. 결국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들에게 내가 오빠와 똑같아질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나는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마음대로 하세요. 전 이제 더 이상 못 참아요. 이제 저는 더 이상 당신들을 위해 살지 않을 거예요. 오로지 저를 위해 살 거라고요!’
‘저, 정아야! 임정아……!’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더 이상 가족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몇 번이고 나를 회유하려는 부모님, 오빠, 심지어 친척들의 연락까지 왔지만 전부 무시하자 결국 잠잠해졌다. 옛날 생각을 하니 쓴웃음이 났다. 이런 삶을 살아온 나였으니, 가문과 남자를 위해 노력했으나 비참하게 버려지고만 로벨리아에게 유난히 감정 이입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어쨌든 5급 공무원이 된 덕에 같은 나이 또래들에 비해서는 잘 버는 편이었지만 대부분의 돈은 가족들에게 부쳐주었기에 내 실제 생활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중고 가구로 가득한 투룸 전세방에서 지내며 3만원짜리 옷을 살 때도 고민을 몇 번이고 해야만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제국의 황후인 로벨리아의 삶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꼭 테마파크에 와있는 기분이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값지고 아름다운 옷은 평생 입어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어.’
디자이너가 가지고 온 카탈로그와 옷감 샘플, 드레스 샘플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경외심마저 들었다. 이런 대단한 물건들이라면 받아들 때도 그냥 받아서는 안 되고 무릎을 꿇고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비록 황궁에서 푸대접을 받았다고 하나 로벨리아는 공작가에서 나고 자란 공녀이며 엄연히 제국의 황후였다. 고작 드레스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고급스러운 드레스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티 냈다간 틀림없이 의심을 살 것이다. 의심을 사는 것도 사는 거지만 나는 이혼당하기 위해 악녀가 될 필요가 있었다. 누구라도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혀를 끌끌 찰 정도로 지독한 악녀가 되어서 알렉산드로스가 궁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했다.
“어떠십니까? 폐하. 이 드레스의 레이스 부분을 잘 보십시오. 저의 조수들이 은사를 한 올 한 올 엮어내어 수놓아 장식한 레이스랍니다.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렇게 섬세한 자수는 수도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울 겁니다.”
나는 지금부터 내가 할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안해요. 하지만 난 나만을 위해 살아가기로 했어요.’
나는 생각했다.
‘내가 무사히 궁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
한결같이 무심한 얼굴로 그가 자랑하는 드레스를 지켜보던 나는 씹어뱉듯 내뱉었다.
“정말 이런 건 어디서도 보기 어렵겠네.”
“그렇죠? 역시 폐하의 안목은 훌륭하십니다.”
“이런 멍청한 옷을 너 아니면 또 누가 만들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