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관심을 얻기 위한 방법인가요?2021.01.07.
아마 상대로서는 꿈에서도 상상 못 했을 정도로 예상 밖의 말이었을 거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그의 오만하고 자신만만했던 눈은 당혹감으로 크게 뜨여 있었다.
“……뭐라고?”
황제의 석고상처럼 잘생긴 얼굴에 금이 생겼다. 잔뜩 굳은 얼굴로 입술을 간신히 달싹이며 그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로벨리아. 네가 있는 곳이 누구 앞인지를 기억해라. 네가 섣불리 허언을 할 자리가 아니다.”
언제나 그에게 잘보이려고 쩔쩔맸던 로벨리아가 자신에게 이혼을 요구할 거라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그의 오만에 칼을 꽂아 넣듯 냉정한 태도로 대답했다.
“허언이 아닙니다, 폐하. 오랜 시간 동안 사료해보았으나, 전 제국의 국모이자 폐하의 정실이라는 이 자리가 미욱한 저에게는 과분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심사숙고해서 내온 결론이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니, 그렇다곤 해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당신이 미욱하다니 무슨 소리요, 로벨리아. 이미 3년간 어질고 현숙한 국모로서 맡은 역할을 잘만 수행해오지 않았소?”
“아닙니다, 모자라고 또 모자란 이 몸, 황후라는 위치에는 적합하지 않사옵니다.”
나의 진지한 태도에 황제는 내가 농담이나 허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의 완벽한 입술이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결국, 그는 내 예상대로의 행동을 했다.
“혹시 내가 당신을 아쉽게 만들었소? 내가 지난 두 주 동안이나 당신을 보살피지 못한 것은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허나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트로이칸의 침략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소. 내 앞으로는 매일 당신을 찾아가고 결코 부족한 반려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소.”
적당한 당근을 주어 나를 달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이세계에서 온 꽃>을 읽었으니까. 로벨리아의 비참한 죽음과, 그녀가 그렇게 되기까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그의 냉정한 모습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조소가 얼굴 위로 드러나는 것을 참으며, 최대한 예의 바르게, 하지만 단호하게 나의 뜻을 피력했다.
“미욱한 저보다 황후에 적합한 여성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으실 겁니다. 아니면, 황비가 후임이 되는 것도 괜찮겠지요.”
내가 아이샤를 언급해서 그런 걸까, 황제의 얼굴에 무엇을 깨달은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황비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로벨리아. 황비는 성국과의 외교를 의식하여 비로 맞아들였을 뿐, 내 그 외의 다른 의도는 없었소. 선대의 선례를 보더라도, 황제들은 외교적 이유로 최소한 2명 이상의 아내를 맞아들이고는 했소.”
그는 아마 내가 황비를 질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날 안심시키려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황비는 대륙에 온 지 아직 채 반년도 되지 않았소. 황후와 같은 자리의 무게를 짊어지기에는 큰 무리가 있지. 그러니 로벨리아, 황비의 존재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하지만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나는 아이샤와 알렉산드로스가 깨를 볶든 콩을 볶든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황비 아이샤를 의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가 황후라는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폐하께 이혼을 청한 겁니다. 부디 제가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주시옵소서.”
“정말로 그 뜻을 굽힐 수 없소? 그렇다면 블란쳇 공작가는 어찌하려고 이러시오? ”
블란쳇 공작가. 로벨리아의 친정 가문을 말하는 것이었다. 블란쳇 공작가는 제국의 개국공신가문 중 하나로, 한때 황실의 충실한 가신으로서 대단한 위세를 자랑했던 명문가였다. 그러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블란쳇도 천여 년의 시간 동안 가세가 기울어, 황실과의 신의를 잃고 이제는 유명무실한 이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블란쳇 공작가에서는 마지막 수단으로, 상당히 무리를 해서 장녀인 로벨리아를 황후 자리에 밀어 넣었다. 황후 자리를 따내기 위해 황실과 어떤 거래를 했는지까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 결혼이 ‘블란쳇의 최후의 수단’으로까지 불리고 있는 것을 보아서는 아마 안 그래도 아슬아슬한 가세를 몰락 직전까지 처박을 정도였을 거다. 그래, 이런 상황이니 로벨리아가 그 비싼 거래의 결과물인 황후 자리를 뻥 차고 나와버리면 블란쳇의 반대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황제는 지금 그걸 이야기하는 것일 거고.
‘근데 그게 뭐?’
나한테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로벨리아의 가족이지 내 가족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 로벨리아를 냉골방에서 쓸쓸히 죽게 만든 친정 따위에 내가 일말의 애정이나 신의를 가지고 있을 턱이 없었다.
‘하나뿐인 딸을 정치적 거래의 자원으로만 생각하고 이런 똥차에게 팔아치운 친정 따위, 내가 알게 뭐람.’
“제국법상 황제와 황후의 이혼 절차에 필요한 것은 두 사람의 의사뿐, 친정 가문의 의사는 필요하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만일 제 지식에 잘못된 점이 있다면 굽어살펴주소서.”
잘못된 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야, 여기 오기 직전에 황실 도서관에서 직접 제국법 법전을 열람하고 왔으니까! 침착하게 뜻을 밝힌 나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황제는 이제 슬슬 기가 막혀 죽으려고 하는 얼굴이었다.
“그거야, 제국 역사상 황제와 황후가 이혼한 전례가 거의 없기 때문이고……!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당신이 이렇게까지 이혼을 진심으로 바랄 줄이야.”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내 요구를 잘랐다.
“어찌 됐든 안 되오. 이렇게 갑자기 이혼이라니, 용납할 수 없소. 황후라는 자리는 지방의 영주처럼 하기 싫다고 쉽게 그만두거나 남한테 양도하고 그럴 수 있는 자리가 아니란 말이오.”
‘결국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하여간에 무조건 안 된다.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닌 제국의 황제였다. 내가 황후라고 해도 그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그가 너무 쉽게 이혼해준다고 했으면 그게 더 놀라웠을 거다.
“당신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는 잠시 유보하도록 합시다. 차라리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겠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소. 하지만 이혼만은 안 되오.”
“‘무엇이든 하여도 좋다’니……. 그것은 폐하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씀입니까?”
‘옳지, 딱 걸렸어.’
나는 음흉한 웃음을 속으로 숨긴 채 그에게 물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을 책임지고 있는 몸으로서 어찌 황후에게 거짓을 고하겠소?”
“제가 황후로서 무엇이든 하여도 좋으나, 이혼만은 결코 아니 된다는 말씀입니까?”
“두말하면 무엇 하겠소.”
비록 가장 큰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떻게 밥 한 숟갈에 배부르겠는가. 이 정도면 충실한 수확이었다. 원하는 바를 얻은 나는 물러나 보기로 했다. 그에게 알겠다는 뜻을 전하곤 작별 인사를 했다.
“지지 않는 태양에 영광 있기를.”
나는 그의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문밖으로 나서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새로운 계획이 착착 생겨나고 있었다. 이혼을 해주지 않겠다면야, 이혼당하면 된다. 헌데 집무실 밖에서 예상 밖의 인물을 만났다. 긴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오늘 빙의된 나에게도 익숙한 형태의 이목구비와 피부색. 선량하고 순수해 보이는 눈망울과 작은 체구. 틀림없었다. <이세계에서 온 꽃>의 여주인공, 아이샤였다. 아이샤는 아마 집무실 밖에서 알렉산드로스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 약속도 없이 찾아온 모양이지.’
아무리 황비라곤 해도 황제에게 약속 없이 찾아오다니, 그녀가 차원 이동자임을 고려해도 굉장히 경우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성국의 비호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그녀는 그런 점마저 순수하고 자유분방한 영혼으로 추앙받는 모양이었다.
“…….”
나는 그녀에게 딱히 관심도, 할 말도 없었기에 묵례를 하고 지나쳐가려고 했다. 헌데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그녀의 쪽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로벨리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반갑네요.”
난 별로 반갑지 않았다. 일단 황비라면 황후보다 아래의 위치인데 예의가 저게 뭐란 말인가. 황제에게 전용 인사말이 있듯 황후에게도 정해진 인사말이 있었다. 한데 그런 것은 다 생략하고 대뜸 옆집 언니 만난 것처럼 지나치게 허물없는 인사라니. 알렉산드로스야 봐준다 해도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이샤가 해맑고 순수하고 차원 이동자라서 아직 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중물인 원작에서 읽은 그녀의 대사 중 이렇게까지 허물 없는 말은 드물었다. 아이샤는 알렉산드로스를 제외한 다른 지위 있는 사람들에겐 훨씬 격식 있는 인사말을 썼다.
‘황비가 된 이후로는 예절교육도 꼬박꼬박 받고 있다고 하고.’
즉 황후에게 예의를 지킬 줄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고 할 줄 아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서 안 한다 쪽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로벨리아가 불쌍해졌다. 무시당하다 못해 황비에게조차 무시당하는 황후라니.
“그렇습니까. 황비는 이 곳에 어쩐 일인지.”
“저야 폐하를 뵈러 왔죠. 원래 침소로 먼저 갔었는데, 아직 이곳에 계신다고 하여서……. 헤헤.”
아이고, 그러세요. 벌써 황제의 침소도 들락거리는 사이세요? 그녀의 말이 자랑 같이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기에 그냥 자리를 떠나려던 찰나였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볼일이 있어서 이만.”
“아, 잠깐만요!”
그녀가 갑자기 날 붙잡았다.
“뭐죠?”
“저,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황실에 몇 안 되는 여자니까요. 친하게 지내요. 서로 고민 상담 같은 것도 하고……. 뭐, 여자들만의 비밀 이야기, 그런 거 있잖아요.”
아이샤가 티끌 하나 없이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솔직하게 말씀해보세요. 방금 그건 황제 폐하께 관심을 얻기 위한 새로운 방법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