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혼해주십시오, 폐하.2021.01.03.
「“폐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폐하!” 로벨리아가 절망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는 이 제국의 황후입니다! 만백성의 어머니이자 폐하의 하나뿐인 반려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를 이렇게 내쳐버리실 수가 있습니까?” 겹겹이 포개어진 드레스 자락과 붉고 긴 머리카락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널브러졌다. 양쪽 뺨 위로 눈물이 끝도 없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비친 남자, 알렉산드로스 그란디아 크샤야르샤 르 카스티야는 달빛을 역광으로 받은 채 연단 위에 서서 그녀를 냉혹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과 갈색 피부는 달빛에 비춰 한없이 차갑게만 보였다. “자만하지 마라, 로벨리아. 나는 널 하나뿐인 반려로 인정한 적이 없다.” 그의 고동처럼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홀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대는 황비 아이샤의 존재를 잊었단 말이냐.” “하, 하지만……! 그녀는 그저 후궁일 뿐. 진정한 당신의 정실은 저뿐이란 말입니다!” “후궁? 하.” 알렉산드로스가 웃었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기에, 로벨리아의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아직도 어마어마한 착각에 빠져 있군, 로벨리아.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빼앗을 수 있는 그깟 황후 자리에, 무슨 의미가 있지?” “그, 그런……!” “아이샤의 발끝에도 따라오지 못할 여자가 그깟 황후라는 무늬뿐인 지위 하나만 믿고 내 곁의 자리를 욕심내다니 가소롭구나.” 알렉산드로스의 곁에는 황비 아이샤가 있었다. 긴 검은 머리와 검은 눈. 독특한 꿀빛의 피부색. 그녀는 동정과 당혹감이 섞인 눈으로 로벨리아를 내려다보다가, 알렉산드로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아이샤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는 선언하듯 말했다. “너는 어디까지나 블란쳇 공작가의 힘을 빌리기 위한 장식품일 뿐이다, 로벨리아. 난 너를 단 한 번도 아끼거나 사랑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러한 감정들은 오직 아이샤만을 위한 것이다.” “폐하……!” 로벨리아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등을 돌린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그녀를 한 번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아이샤와 함께 냉정하게 자리를 떠났을 뿐이다. 로벨리아는 비참하게 무너져 울고 또 울었다. 바보같이, 그녀는 이제서야 깨닫고 말았다. 그녀가 그의 마음을 돌릴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으아악! 답답해 죽겠네!”
나는 화가 나서 그만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대체 그놈의 남자가 뭐라고! 그냥 뻥 차버리고 혼자 살면 되잖아?!”
나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제목은 <이세계에서 온 꽃>. 한국에서 제국으로 차원 이동한 여주인공이 황비가 되어 결국 황제의 사랑을 쟁취하는 내용이었다. 흔한 내용이긴 했지만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록 사랑 없는 정략혼이긴 했지만 황후가 멀쩡히 있는데도 굳이 황비 자리에 기어들어 와서 박힌 돌 빼는 것도 그렇고, 또 그런 굴러들어온 돌에게 한순간에 눈이 멀어서 조강지처를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황제도 마음에 안 들었다. 참고로 황후 로벨리아는 여주와 남주가 쪽쪽대며 좋아 죽는 동안 남편이 한 번 돌아봐 주지도 않는 냉골방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병으로 죽는다. 그래서 남편이 후회하냐고? 아니! 황후가 죽자 신이 나서 여주를 황후로 추대한다!
‘이런 천하의 개자식을 봤나…….’
로벨리아에게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내가 보기에 로벨리아의 죄는 똥차를 사랑한 죄밖에 없었다! 대체 이런 똥차가 뭐가 좋다고 목을 매고 나 한번 돌아봐 줍쇼 청승을 떨어야 하는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엿 같은 상황에서 흔한 악녀답게 패악 한 번 못 떨어보고, 여주 드레스에 홍차 한 번 못 엎어보고, 남주 얼굴 한 번 못 할퀴어보고 쓸쓸하게 죽은 로벨리아가 불쌍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주인공 놈들. 로벨리아의 저주를 받을 놈들. 너희들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보자!”
투덜거리던 나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새벽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얼마 전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 대학원생이었고, 오늘도 일찍부터 출근해야만 했다. 휴, 그래. 지금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잠이나 자자, 잠이나. 나는 던져놓은 핸드폰을 주워들고 침실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던 게 바로 얼마 전이었던 것 같은데.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알현을 허락하셨사옵니다.”
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걸까. 머리가 지끈거려 나는 이마를 짚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에도 옆에서는 시녀들이 끊임없이 재잘대고 있었다. 나는 평범한 한국의 대학원생이었다. 분명 <이세계에서 온 꽃>을 읽다가 내 자취방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고풍스럽고 화려한 가구로 가득 차 있는, 조깅을 해도 될 것 같은 거대한 방. 문마다 제국과 황실의 문양이 화려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로코코풍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렇다. 바로 <이세계에서 온 꽃>의 배경인 카스티야 제국이었다. 하지만 차원 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나는 황후 대접을 받고 있었으며,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내가 알던 나와 전혀 달랐다. 치렁치렁 물결치는 붉은 머리, 하얀 피부, 서글서글한 녹색 눈동자. 몹시 아름답지만, 오랜 시간 마음고생을 한 것이 티가 나는 여위고 초췌한 모습.
‘로벨리아잖아.’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지난밤에 로벨리아 대신 얼마나 억울해하고 화를 냈단 말인가. 처음에는 내가 <이세계에서 온 꽃>을 하도 인상 깊게 읽어서 그 꿈을 꾸는 줄로만 알았다. 로벨리아가 아픈 손가락이긴 했지만 그녀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고, 무엇보다 연구실 출근을 늦을까 봐 걱정되었기에 잠에서 깨려고 무진 노력을 했다. 내 옆구리를 꼬집고, 뺨을 때리고, 심지어 시녀한테 때려달라고 하고, 찬물을 얼굴에 끼얹고, 기타등등. 그렇게 잠에서 깨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하는 동안 해가 졌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환장할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내가 로맨스 판타지를 좀 좋아한 건 맞지만 소설처럼 정말로 그 ‘빙의’란걸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로벨리아한테! 남주한테 목 매달고 청승떨다가 쓸쓸하게 죽는 조연한테!
‘기왕 빙의를 할 거라면, 여주인공한테 하면 좀 좋아?’
로벨리아한테는 미안하지만 이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내가 로벨리아가 되다니, 이것이 인생 지옥탕 익스프레스 급행열차를 탄 게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심란해하고 있는데, 옆에서 시녀들이 말했다.
“정말 잘 되었습니다, 폐하. 황제 폐하를 알현하시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사옵니까.”
“참으로 그렇습니다. 벌써 2주는 기다리지 않으셨습니까.”
“폐하께 잘 보이실 수 있도록 곱게 단장해드리겠사옵니다.”
황제 폐하라면 그 남주놈을 말하는 것이렷다? 아내가 한 번 보자고 하는데 2주씩이나 기다리게 만들다니. 솔직히 꼴도 보기 싫었다. 그놈이 바로 로벨리아의 인생을 지옥탕 익스프레스 태운 원흉이 아닌가. 하지만 황제씩이나 되는 양반을 기껏 불러서 당일에 약속 취소하는 건 안 그래도 박대받는 입장에서는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다.
‘아니, 잠깐…….’
그때, 머릿속을 번뜩이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이 예정되어 있는 지옥탕 익스프레스에서 탈출할 수 있을 만한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
‘좋아, 남주를 만나는 게 좋겠어.’
그렇게 생각을 굳힌 나는 로벨리아의 말투를 따라 하며 말했다.
“그래, 최대한 곱게 단장해주겠니?”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분부 받들겠습니다, 폐하.”
시녀들이 기쁜 듯이 대답했다. 그녀들은 진심으로 로벨리아가 황제에게 사랑받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내가 할 행동은 그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이라, 그녀들에게 약간 미안해졌다.
‘하지만 내 인생 대신 살아줄 사람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그녀들에게 몸을 맡겼다. 두 시간이나 걸리는 치장 뒤, 나는 황제를 알현하러 중앙궁으로 향했다. 황제는 중앙궁의 자신의 집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침실도, 응접실도 아닌 집무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황제와 로벨리아는 석찬조차 함께하지 않는 사이다. 로벨리아의 입장에서는 함께 식사를 하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한 번 만나주기라도 했으면 싶었을 거다. 하지만 사적인 장소인 침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궁에서 온 손님 대접을 융숭히 해주겠다는 뜻의 응접실도 아니고 자신이 일하는 집무실로 부르다니. 나는 일하느라 바쁘니 본론만 빨리 말하고 가라는 뜻이 다분한 장소 선정이었다.
‘그것도 2주나 기다리게 하고서는!’
하지만 뭐, 상관없었다. 로벨리아와 달리 나는 황제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와 오래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시녀들이 집무실의 문을 열어주고, 나는 그곳으로 들어섰다.
“왔군.”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남자는, 정말이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곧은 검은색의 머리카락. 탄력 있는 갈색의 피부. 맹수의 그것처럼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와, 예복에도 채 가려지지 않는 넓은 어깨와 탄탄한 몸. 나조차도 순간 숨을 멈출 정도로, 이 공간에서 오직 그 밖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생긴 미남자였다.
‘역시, 저러니까 로판 남주도 하는구나.’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남자도 아니고 남의 남자가 잘생겨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를 무슨 일로 부른 거지? 로벨리아.”
그의 얼굴에는 오만함과 나른한 권태가 가득했다. 로벨리아가 늘 그에게 사랑을 갈구했고, 오늘도 그러려고 자신을 찾아왔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부부간에 만남을 청하는 데에 특정한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까?”
“하긴, 그건 그렇군. 일단 앉지.”
그가 자리를 권하자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의 낌새를 살폈다. 그를 만나러 오기 전까지, 내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설 속 세계에 떨어진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상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정보다. 그것은 평생을 불리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던 나의 지론이었다. 나는 시녀들이 알고 있는 것은 전부 물어보았다. 알렉산드로스와 로벨리아, 그리고 아이샤의 관계와 상황에 대해서. 물론 너무 대놓고 모르는 티를 내지 않도록 살살 떠보면서. 그리고 시녀들의 대답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아직 원작의 극 초반이라는 거야. 아이샤가 황궁에 도착한 지 반년 밖에 되지 않았고, 알렉산드로스가 그녀에게 갓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때지.’
아직은 그들의 관계가 사랑까진 아니지만 얼마 안 가 그렇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세계에서 온 꽃> 의 남주인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기도 전에 들이대고부터 보는 불도저 직진 남주니까.
‘내가 굳이 여기 앉아 그 꼴을 보고 있을 필요는 없지. 대단하신 주인공님들의 운명적인 로맨스에서 불순물은 빠져주는 게 예의잖아?’
으리으리한 황궁에 황후라는 어마어마한 지위라고 해도 찬밥 신세나 당할 바엔 필요 없었다. 찬밥 취급을 당하면서까지 황제의 아내라는 지위에 기대어 살아가는 건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르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알렉산드로스의 금빛 눈동자가 나를 느리게 훑었다.
“예, 아뢰옵기 황공하오지만, 그렇사옵니다.”
“호오, 그런가. 어떤 변화지?”
그가 되물었다.
“안 그래도 그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나는 좋은 때에 찔러넣기 위해 수도 없이 갈고닦아온 말을 드디어 꺼냈다.
“이혼해주십시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