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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그 남자 (102/129)


102화. 그 남자
2023.05.22.


남자의 눈엔 초점이 없었다.

그래서 어두운 방에 앉은 그 남자는 생물임에도 정물 같았다.

그에겐 이 밖에도 여러 모순이 있었다.

그는 모두가 선망할 만한 수려한 외모를 지녔지만 모두가 멸시하는 노예보다 상처가 많았다.

선명한 금발은 왕관처럼 찬란한 한편 아무렇게나 끊기고 잘려 제각각인 길이로 바닥에 끌렸다.

제복을 걸친 강인한 몸은 영웅의 표상처럼 아름다웠으나, 절도도 품위도 없이 웅크린 자세는 패잔병의 그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한때 용을 대적했던 그 남자는 오래전에 역할과 기능을 상실했다.

그로써 더 움직이지 않게 된 게 벌써 몇 해.

이제 그는 사람인지 인형인지, 아직 살았는지 이미 죽었는지조차 모호했다.

이렇듯 존재의 근본부터 의심받는 남자의 이름은 시온 라우렐.

더는 쓸모가 없어 골방에 방치된, 값비싼 골칫거리였다.


 


“오늘 티엔다로 데려가겠다.”

비록 고장 난 태엽 인형 같은 꼴이지만, 시온은 아직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찾아온 이들의 익숙한 목소리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네세르가 이대로 침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동녘의 감시는 유지해야 합니다.”

“용이 날아오르지 않은 게 벌써 3년이다. 티엔다는 우릴 잊었다. 더는 이곳을 유지할 명분이 없어.”

“아버님, 하지만…….”

“더 잊기 전에 보여 줘야 한다. 라우렐의 아들이 대륙을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목소리. 사람의 목소리. 귀에 익은 두 사람의 목소리.

하지만 그 소리는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멀었다. 게다가 머릿속에 자욱한 안개 때문에 의미도 공허했다.

그래서 시온은 저들이 자신에 대해 논하는 걸 알면서도 관여하지 않았다. 어디론가 옮겨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처우와 처분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엔 새벽의 용을 떨어트려야 한다는 의무뿐, 그 외엔 모든 것이 흐렸다.

그는 짙은 안개에 잠긴 미아였고, 그 처지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모든 게 꿈처럼 모호해 고통도 고뇌도 없었다.

온몸이 으스러지더라도 무감했다.

행복의 반대말이 불행이라면, 불행을 모르는 시온 라우렐은 어쨌든 행복한 것이리라.

그러니까 어쩌면 그는 깨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설령 기만으로 얼룩져 있더라도 행복은 행복이니까.

하지만 시온 라우렐의 이 가짜 평안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처럼 또 어느 날 갑자기 끝나 버렸다.


“정신이 들었나?”

낯선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그래서 시온은 퍼뜩 놀랐다.

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려서, 아주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어서.

시온은 생경한 눈으로 제 앞에 선 여자를 쳐다보았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여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단발머리와 새하얀 얼굴에 냉랭한 분위기가 가득한, 아름답지만 날카로운 여자였다.

여자는 어깨 밑부터 물줄기처럼 떨어지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의 흰색은 순결보다 무결에 더 가까워 보였다.

시온은 갑자기 눈에 들어온 그 여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웠다. 기억과 인지가 하나도 연결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지, 오늘이 며칠인지, 이 여잔 누구고 난 왜 이러고 있는지.

마치 책장이 드문드문 뜯겨 나간 책을 곧이곧대로 읽는 기분이었다.


“혼란스러운가?”

멍하니 얼어붙은 시온에게 그 여자가 물었다. 차갑고 고압적인 목소리였다.

시온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마른기침을 토했다.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성대를 갑자기 움직인 탓이었다.

시온이 놀라서 목을 움켜쥐자 여자가 무심히 말을 이었다.


“너는 시온 라우렐 백작. 아마네세르를 떨어트리기 위해 경계의 총사령관으로 차출된 라우렐 대공의 서자. 10년 전 전당에 내려가자마자 저주받았고 3년 전 아마네세르가 침묵한 후에도 경계 감시를 지속하다가 보름 전 티엔다로 귀환. 그리고 방금 전에 저주가 풀렸어.”

여자의 단조로운 설명에 시온은 또 한 번 멍해졌다.

저 여자가 한 말이 본인의 얘기 같기는 한데 중간부터 내용이 이상했다.

10년 전? 저주?

시온은 자신이 백작위를 받고 타르데스 전당에 도착한 일을 며칠 전처럼 가깝게 기억했다. 그런데 10년이라니.

시온은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보다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했지만, 여자는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글 읽는 법을 기억하나?”

시온은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가 끈으로 묶은 서류 뭉치를 던지듯 떠넘겼다.


“읽어 보면 이해가 될 거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여자가 등을 보이자 시온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잠깐.”

시온의 입에서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첫마디를 떼고 나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시온이 있던 곳은 낯선 침실, 라우렐 성 못지않게 넓고 격조 높은 실내였다.

하지만 대공성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 방의 커다란 창문엔 오직 하늘만 가득했다. 높이 자란 나뭇가지도 너른 정원도, 하다못해 그 너머로 보여야 할 어떤 풍경도 그 창문엔 비치지 않았다.

누워서 창문을 올려다보는 게 아닌 한, 이런 전망이 가능한 곳은 두 대륙을 통틀어 마냐냐 탑뿐이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시온의 감각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넌 누구지?”

이곳이 티엔다고 마냐냐 탑인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시온은 이 여자를 전혀 알지 못했다.

마냐냐 탑을 제집처럼 여기는 여자라면 분명 세드로와 관련이 있을 텐데, 시온은 이 여자를 오늘 처음 봤다.

그래서 정체를 물었지만 여자는 대답 없이 시온을 힐끗 쳐다만 보았다. 예의도 존중도 없는 무심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온은 그걸 문제 삼을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대답을 촉구하는 대신 더 중요한 것을 되물었다.


“대공 전하는 지금 어디 계시지?”

“라우렐 대공은 라우렐 성에.”

여자가 짧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건재하다는 말에 시온이 적게나마 안도하자, 여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내겐 존대하도록 해. 이번은 넘어가지만 두 번은 없어.”

여자가 오만하게 경고하며 다시 돌아섰다. 그래서 시온은 반사적으로 달려가 여자의 팔을 낚아챘다.


“그전에 제대로 대답해, 네가 누군지.”

시온은 초조했다.

앞뒤 없이 토막 난 상황이 안 그래도 괴이한데, 처음 보는 여자가 불경하게 구니 마치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 같았다. 여자를 다소 거칠게 잡아 세운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시온의 심정을 헤아릴 마음이 전혀 없는지, 돌려세워진 와중에도 그저 싸늘했다.

심지어 무자비하기도 했다.


“엎드려.”

여자의 냉랭한 명령에 시온의 몸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온은 어느새 몸을 낮추고 두 손을 바닥에 대고 있었다. 그가 의도한 적 없는 행동이었다.

시온은 다시 일어서려고 바닥을 디뎠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마치 일어서는 방법을 잊은 것처럼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시온이 영문을 몰라 이를 악무는데,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저주를 푸는 걸 반대한 사람이 많아. 아니, 내막을 아는 전원이 반대했지.”

그 말에 시온의 몸부림이 뚝 그쳤다.

모든 게 혼란스럽지만, 지금 저 여자가 한 말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더 이상했다.

나는 라우렐 백작이다. 죄인도 악당도 아닌, 만인을 위해 용을 떨어트리는.

그런데 왜 내 저주를 푸는 걸 반대했다는 거지? 나는, 그런 대우를 받을 존재가 아닐 텐데?

저주에서 막 깨어난 시온은 몸만 청년일 뿐 정신은 열일곱 소년에 불과했다.

때문에 이 애송이 도련님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을 사로잡았던 저주가 어디서 기원했는지.


“그래서 저주를 푸는 조건으로 목줄을 하나 걸었어. 그러니 내 앞에선 눈치껏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충격에 허덕이는 남자를 동정할 법도 한데, 여자는 무정하게 경고했다.

그러곤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나는 이비 아리아테, 네 새로운 주인이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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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그런 여자였지…….

최악의 첫 만남을 떠올린 시온은 괜히 착잡해져서 옆에 앉은 이비를 곁눈질했다.

시온의 셔츠를 입은 이비는 자신의 무릎을 꼭 끌어안은 채, 여전히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 위로 긴 머리를 늘어트린 모습이 예뻤다. 이 이비는 기억 속의 이비와 앉는 자세부터 달랐다.

그 대놓고 고압적인 이비와 달리 이 이비는 무려 귀엽다는 말이 어울린다. ‘버르장머리가 없으시네’라는 첫마디도 ‘내가 네 주인이다’라는 선언에 비하면 훨씬 훨씬 온건한 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시온은 이 이비가 그 이비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최근에 다시 바뀌었다.

이 이비가 카셀 몬트라를 엎어 놓고 매도하던 모습은, 분명 그 이비의 그것이었다…….

시온은 두 이비가 완전히 다르면서도 엇비슷하게 괴팍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분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곧 모든 게 부질없어졌다.

어차피 그 이비를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이 완벽하지 않은 세상엔 지워진 시간이 있다.

과거도 미래도 되지 못한 채 영영 사라진 여러 세계는 이제 시온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젠 없는 이비 아리아테는, 팔 한 번 잡았다고 무릎을 꿇리는, 연민은커녕 배려도 용서도 없는 무려 성녀였다.

그 이비의 첫인상은 누가 뭐라든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땐 이비를 싫어할 겨를도 없었다.

당시의 시온은 그 여자가 던지고 간 비루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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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여자가 던지고 간 문서를 읽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그 보고서를 반복해서 읽는 사이, 꿈인 줄 알고 잊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둘 떠올라 맞물렸다.

정말 10년이었다. 그의 머릿속엔 거짓말처럼 사라진 10년이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시온은 정확히 기억해 냈다.

얼마 전, 제 앞에서 대화하던 두 사람이 누군지.


―오늘 티엔다로 데려가겠다.

―아버님, 하지만…….

―더 잊기 전에 보여 줘야 한다. 라우렐의 아들이 대륙을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시온은 숨을 멈추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입술로만 읊조렸다.

아버지. 그리고 형, 이라고.

시온은 그대로 무너져 소리 없는 비명을 토했다.

단지 그뿐, 소리를 지르거나 어디로 뛰쳐나가지는 못했다. 빌어먹게도 잘 배운 품격 때문이었다.

실은 방법을 모르기도 했다. 그 고귀한 도련님은 이렇게 바닥까지 무너진 적이 없었다. 때문에 제 감정을 터트리는 법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신음했다. 비명도 울음도 삼킨 채, 그저 제 몸을 뜯으며 신음했다.

그렇게 몇 날을 보내고 머리가 차게 식은 후에야 결심이 섰다.

그들에게 직접 묻기로. 내가 가장 지키고 싶었던 당신들을 찾아가기로.


“시온…….”

예상은 했지만, 아버지와 형은 정말 핏기 없는 얼굴로 시온을 맞이했다.

그들의 눈에 시온을 반기는 기색은 없었다. 오직 두려움만 가득했다.

그래서 제가 살던 집에 돌아오고도 불청객이 된 시온은, 사색이 된 가족들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할 말이 있다면 하시죠. 해명이든 설득이든.”

용서할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그래도 들어 보고는 싶었다. 자식과 동생을 버린 그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잘 지내는지.

하지만 시온에겐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할 기회조차 없었다.


“아, 아리아테 님!”

시온을 뒤따라온 건지, 그 여자가 라우렐 성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온의 아버지는 여자를 보자마자 이렇게 소리쳤다.


“저걸 어서 데려가십시오, 당신이 책임지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의 다급한 외침에 시온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더 가관은 여자의 대답이었다.


“싫은데.”

그 한마디에 라우렐들은 다 같이 얼어붙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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