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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전혀 특별하지 않아 (103/129)


103화. 전혀 특별하지 않아
2023.05.25.



“싫은데.”

여자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하지만 그 거절의 무게는, 한때 대륙의 주인이라 불렸던 라우렐 대공의 혈색을 모두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늘 근엄하던 라우렐 대공이 창백하게 질려 소리쳤다.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당신이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넘긴 겁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말이 이상하네.”

여자가 웃음기 없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별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중얼댔다.


“마치 본인에게 선택권이 있었던 것처럼.”

여자의 말은 명백한 조롱이었고, 아들들 앞에서 조롱당한 대공의 안면이 잘게 떨렸다.


“그래서,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고…….”

“지킬 거야. 책임을 지기로 했으니 져야지.”

“그렇다면…….”

“그래, 네 아들이 라우렐을 몰살시키더라도 끝까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마.”

결국 대공의 얼굴에 경악이 들어찼다.


“그게 무슨 책임입니까!”

“내 책임의 범주는 내가 정해.”

대공이 피를 토하듯 외쳤지만 여자는 여전히 단호하고 쌀쌀맞았다.


“저지른 게 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아들을 희생하고 본인은 괜찮을 줄 알았어?”

여자는 아버지를 가볍게 질책하며 그의 아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더니 표정 없이 채근했다.


“뭐 해?”

마치 할 거면 얼른 저질러 버리라는 투였다.


 
그래서 그 여자와 아버지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시온은 한층 더 비참해졌다.

이게 대체 뭔지.

친부는 비굴한 모습으로 날 배척하고, 난생처음 본 여자는 편을 들어 주는 척 나를 가지고 논다.

정말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시온은 눈앞이 새까매졌지만 애써 버텼다. 그러곤 곤혹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젠 잘 믿어지지도 않았다.

나한테 명예를 가르친 게 당신인가? 권리에 부합하는 의무를, 힘을 가진 자의 자세를 가르쳤던 게 정말 당신인가?

그래, 그럼 당신도 대가를 치러야지.

시온은 이를 악문 채 걸음을 뗐다. 친부를 향해서 천천히, 이미 덫에 걸린 먹이를 주우러 가는 사자처럼 아비를 향해 다가갔다.

그때 한 남자가 시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 시온!”

시온은 제 앞을 막은 남자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동생을 버려 둔 채 혼자 어른이 된 하르딘 라우렐이었다.


“알아, 나도 알아. 네가 얼마나 괴로운지.”

하르딘이 시온을 부둥켜안고 애원했다. 어릴 적, 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시온, 아버님도 원해서 한 일이 아니야. 아버님도 괴로워하셨어. 제발, 그러니까 제발…….”

하르딘의 절절한 목소리에 시온은 이를 악물었다. 하르딘은 그런 동생과 함께 아파하며 신음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어. 누군가는,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어. 그게 하필 너인 걸, 어느 누구도 태연히 받아들이지 않았어!”

형의 호소에 시온은 더 아파졌다.

말도 안 되는 기만을 당했지만 그래도 가족이었다.

시온의 마음이 흔들리는데, 지켜보던 여자가 악마처럼 끼어들었다.


“혹시 이야기했나? 하르딘 라우렐에게 아들이 둘이나 있다고.”

언뜻 그 말은 이 상황과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하르딘의 어깨가 먼저 경직되었고, 순진한 시온은 그 말의 의미를 한발 늦게 이해했다.

동시에 조금씩 움직이던 마음도 도로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시온은 자신을 끌어안은 하르딘을 밀어냈다. 뒤로 떠밀린 하르딘이 변명 가득한 얼굴로 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여자가 잔인하게 중얼댔다.


“괴롭지만 해야 할 일을 한 거겠지.”

그로써 하르딘은 변명을 빼앗겼고, 결국 라우렐 성에 굉음이 일었다.

낙뢰가 떨어지자 밖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라우렐 대공과 하르딘을 보호하며 검을 빼 들었다. 그들의 검 끝은 당연하다는 듯 시온을 겨누었고, 기사들에게 포위된 시온은 마치 미친 용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주 틀린 취급은 아니었다.

시온 라우렐은 얼마든지 미친 용이 되어 줄 수 있었다. 그걸 아니까 저주를 풀지 않고 버틴 거겠지.

시온은 냉소를 삼키며 자신을 겨눈 검을 노려봤다. 이대로 모조리 녹여 버릴 작정이었다.


“검 치워.”

그런데 그 여자가 또다시 끼어들었다.


“물러나라. 부모와 자식 간에 해결할 일이다.”

여자의 명령에 라우렐의 기사들이 주춤대며 무기를 거두었다.

기사들은 여자에게 복종하며 물러났고, 그 사이로 절망에 빠진 라우렐 대공과 그의 후계자가 다시 시온 앞에 놓였다.

하지만 시온은 기쁘기보다는 기가 찼다.

라우렐의 기사들이 라우렐이 아닌 여자의 말을 듣고 대공의 신변을 포기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지만 시온은 이제 일일이 놀랄 힘도 없었다. 그저 아주 질 나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여자가 그의 악몽을 부추겼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라우렐까진 허락할 테니까.”

라우렐까지 허락하겠다니. 아들에게 아버지를 죽이라고 종용하는 건가?

이걸 관대하다고 해야 할지, 사악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그 여자의 말은 오히려 시온의 격정을 끊어 버렸다.

시온이 이 모든 게 그냥 지긋지긋하게 싫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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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다.

이비 아리아테는 그런 존재였다.

배신감에 눈이 돌아간 사람을 말리기는커녕 뒤를 봐 줄 테니 복수하라고 부추기는 그러한 여자였다…….

새삼 그때를 떠올린 시온은 ‘그’ 이비 아리아테와는 너무 다른 ‘이’ 이비 아리아테를 슬쩍 쳐다보았다.


“백작님.”

그러자 이비가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왜 자꾸 힐끗거리세요? 이제 와서?”

하여간 만만치 않은 건 똑같다.

하지만 그 이비에게 시달려 본 시온에게 이 이비의 퉁명한 말투는 마냥 귀여울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시온에게 이 이비는 냉정한 어른 이비와 귀여운 어린 이비를 반반 섞어 놓은 듯한 일종의 변종이었다.

결국 그 남자의 정성이 통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시온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비에게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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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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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성으로 쳐들어갔던 시온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탑으로 돌아왔다.

그 후엔 방에 틀어박혀 몇 날 며칠을 골똘히 생각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다시 만난 친부와 이복형은 개소리만 해 댔지만, 시온은 더 이상 뭘 묻거나 따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인간들을 더 보기도 싫었고, 시온이 궁금해할 만한 내용은 그 여자가 첫날 넘겨준 서류에 이미 다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실리도 명분도 다 갖춘 라우렐 백작.

미친 용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인류가 선택한 최선의 평화.

그저 나 하나 눈감으면 유지되는 평화.

고맙게도 괴롭지 말라고 저주까지 걸어 주었다.

시온은 자신이 그런 취급을 받았다는 게 곱씹을수록 비참했다.

라우렐의 영광을 위해. 그 다짐조차 알고 보니 비웃음거리에 불과했다.

시온은 자신의 무가치함에 한없이 괴로워졌고,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찾아냈다.

이 원망을 쏟아 낼 대상을.

그건 물론 그를 지옥으로 초대한 여자였다.

정말 미칠 것 같던 어느 밤, 결국 시온은 충동에 자신을 맡긴 채 그 여자를 찾아갔다.


“노크는?”

시온이 서재의 문을 박찼을 때 여자가 보인 반응은 이게 다였다.

여자는 책에서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갑게 물었고, 그 모습은 시온을 더 돌게 만들었다.


“너 뭐야?”

“경어를 쓰라고 했을 텐데.”

“날 어쩔 셈이야?”

“딱히 예정은 없어.”

“똑바로 대답……!”

“앉아.”

언성을 높이던 시온은 여자의 명령에 또 한 번 덜컥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번엔 시온도 마냥 당하지 않았다. 시온이 매섭게 여자를 노려보자 여자의 옆으로 날카로운 섬광이 일었다.

탄내가 진동하며 여자의 책상에 새카만 직선이 그어졌다.

하지만 여자는 겁먹기는커녕 한층 싸늘해진 얼굴로 혀를 찼다.


“기껏 거둬 줬더니 화풀이도 하시겠다?”

“헛소리 집어치워, 어차피 너도 이용할 생각으로…….”

“머리가 나쁘구나.”

“뭐?”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여자의 담담한 비난에 시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여자가 비로소 눈을 들어 시온을 쳐다봤다.


“이용할 생각이면 더 다루기 쉽게 만들었겠지. 이렇게 천지 분간 못하게 두는 대신. 그리고 너 쓸모도 없어.”

그 여자에겐 잔인한 말을 친절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고, 이런 폭언이 낯선 시온은 잔잔한 충격에 휩싸였다.

시온이 할 말을 잃자 여자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되물었다.


“너 몇 살이야?”

그 뜬금없는 소리에 시온이 다시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여자는 개의치 않고 되물었다.


“스스로 몇 살이라고 생각해?”

물음은 더 구체적으로 변했고, 시온은 질문의 저의를 깨달은 듯 짐짓 당황했다.

시온이 저주에서 깨어난 건 꼭 10년 만이다. 그래서 지금 시온 라우렐은 공식 나이는 스물일곱이지만, 시온이 생각하는 본인의 나이는 여전히 열일곱에 더 가까웠다.

시온이 대답을 미루자 여자는 혼자 이해한 듯 끄덕였다.


“예절을 가르칠 가정교사부터 구해야겠군.”

아무래도 여자는 시온을 애송이 취급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리고 시온은 그 태도가 수치스럽기보다는 의아했다. 저 말은 시온을 돌봐 주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왜?”

“네가 버릇이 없으니까.”

“내가 버릇이 있든 없든 네가 왜, 무슨 속셈으로…….”

“널 데리고 있는 거냐고? 가족도 이미 버린 걸, 어디 써먹을 것도 아니면서, 심지어 말도 잘 안 듣는데 그걸 굳이?”

여자는 시온의 생각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되물었고, 시온은 분한 눈으로 긍정했다.

그러자 여자가 도리어 되물었다.


“이유가 꼭 필요한가?”

단지 얼버무리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하다는 듯, 진지한 목소리였다.


“이 세상은 그렇게 완벽하지 않아. 모든 일이 법칙을 따르는 건 아니고 어떤 일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기도 해.”

“대체 무슨 소릴…….”

“네가 기대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네 기대를 항상 채워 줄 만큼 이 세상은 완벽하지 않아.”

이 여자 정말 뭐지? 미친 건가?

시온은 여자가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릴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의 생각을 넘겨짚는 것 같아 거칠게 반문했다.


“내가 뭘 기대했다는 건데?”

“본인이 특별한 인간이길 기대했겠지. 존재의 의미, 태어난 이유, 뭐 이런 거. 무려 대귀족으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용하려고 만든 자식인 걸 알게 돼서 그렇게 뿔이 난 거 아냐?”

하지만 뜻밖에도 여자의 이어진 말은 시온의 심중을 정확히 관통했다.


“착각하지 마. 너는 전혀 특별하지 않아. 그냥 태어났고 살아왔을 뿐이야. 너를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여자의 말에 시온은 조금 멍해졌다.

시온은 언제나 특별했다. 경계로 내려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누구보다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였다.

그래서 여자의 특별하지 않다는 말은 시온의 가슴 한구석을 짓이겼다.

아팠다. 아픈데, 아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것도 그 연장이라고 생각해. 난 네가 특별해서 데려온 게 아니야.”

특별하지 않다는 말이 조금 비참해도 괜찮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냥 보여서. 큰 의미는 없어. 그냥 네가 눈에 띈 거야.”

그래서 이어진 여자의 말에, 시온은 그만 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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