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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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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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그 여자
2023.05.18.
“앞으로 기대고 싶은 사람은 백작님이고요.”
그 한마디가 안 그래도 위태롭던 시온의 심장을 쿵 떨어트렸다.
시온은 놀라서 숨을 멈췄다. 하지만 경이로운 자제력으로 티는 내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쿵쾅거리는 걸 외면한 채 이비를 쳐다보았다.
그러곤 심각하게 생각했다.
‘얘 뭐야?’
그때 이비는 모포를 꼭 여민 채 시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시온은 그런 이비를 찬찬히 뜯어 보고 말았다.
이비의 검고 긴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어 반짝였다. 고백을 마친 입술은 아직 열린 채 붉었고,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은 무언가 바라듯 깊었다. 까만 눈동자 위로 드리운 속눈썹엔 벽난로의 불빛이 세세히 어려 있었다.
왜인지 이비의 얼굴이 전처럼 마냥 귀엽지 않았다. 귀엽기보다는 어딘지 짙고 복잡했다.
덕분에 시온의 머릿속은 대단히 시끄러워졌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그는 혼란에 빠진 채 이비의 발언을 되뇌었다.
기대고 싶다고?
네가? 나한테?
왜 이래, 너 나 싫어하잖아.
난 네 아저씨가 아니야.
아니, 애당초 어린애 짝사랑 아니었어? 그게 이렇게 튄다고?
그래서 기대고 싶다는 게 무슨 뜻인데?
여기서 그런 말을 해도 돼?
하필 지금?
비가 이렇게 오는데?
너랑 나 말고 아무도 없는데?
대뜸 이러면 내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시온은 짧은 순간 정말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런데 등에서 느껴진 생소한 감각이 그의 뒤엉킨 생각을 싹둑 잘라 냈다.
고의인지 실수인지, 시온이 침묵하는 동안 이비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그 바람에 얕은 손길이 시온의 등을 스쳤고, 시온은 고개를 숙여 제 등에 닿은 손끝을 보게 되었다.
결국 시온은 목이 타는 걸 인정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빗소리는 요란하고 이곳엔 단 둘뿐이었다.
게다가 시온은 이비의 손을 맞잡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 손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그다음엔 무엇이 있는지, 그게 어떤 온도를 가졌는지도.
모르면 더 망설이겠지만 시온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 경험한 적 없는 기억이 떠올랐을 때, 그는 어느새 몸을 돌려 이비의 손을 잡고 있었다.
가볍게 잡았을 뿐인데 이비의 손은 그의 손안으로 보이지도 않게 사라졌다.
그렇게 붙잡힌 손은 아직 따뜻한 양초처럼 무르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시온은 그 손의 약함에 놀라지 않았다. 이 역시 익숙하게 아는 까닭이었다.
오히려 그를 놀라게 한 건 자연스레 이어진 본인의 행동이었다.
시온의 단단한 손가락이 당연하다는 듯 이비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시온은 이비의 눈이 커진 걸 보고서야 자신의 손가락이 이비에게 얽혀든 것을 깨달았다.
시온을 쳐다보는 이비는 헛숨을 삼킨 채였다. 이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서툰 모습에 시온은 겨우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의 눈물겨운 노력이 무색해졌다.
놀라서 눈을 깜빡이던 이비가,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았기 때문이다.
이비는 얌전히 눈을 감은 채 그를 기다리기 시작했고, 시온은 결국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한 가닥 이성도 결국 끊어졌다.
그러니 지금 그의 입을 연 건, 이성이 아니라 보다 깊은 곳에 박혀 있던 염원이었다.
“지금 그 말…….”
겨우 낸 목소리가 생각보다 잠겨 있었다. 그래서 시온은 목을 한차례 가다듬고서 말을 이었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입니까?”
“백작님을 손에 넣을 의도요.”
시온의 진중한 물음에 이비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솔직한 대답이 정적을 불러왔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이비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래서 시온은 눈치챘다. 이놈이 지금 필사적으로 딴청을 피우고 있다는 걸.
시온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동시에 그의 눈에 담겼던 열기도 냉기로 바뀌었다.
“손에 넣어서 어쩌시려고?”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겠어요.”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죠.”
“날 손에 넣으면 만족이 될 것 같습니까?”
“일단 가져 봐야 알 것 같아요.”
“가졌는데 아니면?”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 앗, 잠깐! 백작님, 아파요!”
시온이 차게 식은 얼굴로 이비와 깍지 낀 손에 지그시 힘을 줬다.
그래, 네가 그럼 그렇지.
시온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위기를 넘긴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 사이 시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이비가 얼얼한 손을 붙잡고 항의했다.
“왜요, 뭐가 문젠데요!”
“왜요, 뭐가 문젠데요?”
시온은 어이가 없어서 이비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 꽤 화가 난다는 걸.
역시 이비는 끈질기고 일관성이 있었다.
그래서 시온의 앞선 거절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를 구워삶으려고 계속 수를 쓰고 있었다.
저를 키워 준 아저씨이기도 한 시온 라우렐을 일단은 손에 넣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거기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에 시온은 기분이 더러워졌다.
가져 봐야 알겠다니, 내가 네 장난감이야?
시온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이비를 노려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비의 눈이 커졌지만, 시온은 더 봐주지 않고 차갑게 경고했다.
“분명 말한 것 같은데, 나는 그 남자가 아니라고.”
그 냉랭한 목소리에 이비의 숨소리가 얕아졌다.
“그게 여기까지 쫓아와서 할 말이에요?”
이비가 상처받은 얼굴로 서글피 말했다.
“내가 안 보이면 헐레벌떡 찾으러 다니는 주제에.”
아니, 서글픈 게 아니라 서슬을 참는 목소리였다.
“오늘도, 투기장에서도, 별장에서도, 탑에서도 계속 찾아다녔으면서……. 그렇게 자나 깨나 내 걱정을 해 놓고 이렇게 벽을 친다고……. 이럴 거면 업어 주지나 말든가.”
이비의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에 날을 세웠던 시온은 도리어 당황하고 말았다.
……이 적반하장은 뭐지? 지금 내가 잘못한 거야?
전혀 예상 못 한 반박에 시온이 혼란에 빠진 사이, 이비가 영혼 없이 웃으며 그를 더 다그쳤다.
“그리고 갑자기 손부터 덥석 잡은 게 누군데, 나예요? 내가 그랬어? 그래 놓고 냅다 성질부리는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그건…….”
“그건?”
그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지.
시온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혼란은 여전했다. 누구에게도 혼나 본 적 없는 남자는 자신이 혼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뭔가 억울한데 차마 따질 수가 없었다. 결국 시온은 이 함정에 들어온 스스로를 욕하며 다시 돌아앉았다.
그러자 이비가 등 뒤에서 뾰족하게 투덜댔다.
“고집쟁이.”
“누가 할 소릴…….”
시온은 어이가 없어 반박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화를 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평행의 평행을 달리는 이 관계가 갑갑할 따름이었다.
그대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걸 깨트린 건 이비였다.
“아까 점심, 정말 그냥 그랬어요?”
이비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시온도 못 이기는 척 대꾸했다.
“나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처음 한 것치곤 잘했잖아요.”
“처음 한 것치곤 나쁘지 않았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백작님은 몇 살 때부터 버르장머리가 없었어요?”
“없기는 피차 마찬가지 같은데 본인 것 먼저 챙기시죠.”
두 사람의 만만치 않은 성격 탓에 오가는 말이 곱지는 않았다.
“백작님은 그런 저주에 걸렸는데 애들을 어떻게 가르쳐요?”
“적당히 잘.”
“그런 성격인데 애들은 왜 가르쳐요?”
“역시 버르장머리는 그쪽이 더 시급해 보입니다만.”
하지만 이비는 투덜대면서도 등 뒤의 남자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미엘 세드로랑은 친해요?”
“면식도 얼마 없는데 친분이 있을 리가.”
“안 친해요?”
“어릴 때 몇 번 본 게 답니다. 애초에 세드로는 탑에서 잘 안 나오기도 하고…… 왜 웃어?”
“숙적의 치부를 발견해서요.”
시온은 이게 이비의 양보라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아까보다 한층 심란해졌다.
그럼에도 잡담을 나누는 동안 두 사람의 목소리는 가벼워졌다.
이비는 기분이 다 풀렸는지 중간중간 잘 웃었다. 시온은 웃지 않으려고 했으나 가끔 실패했다.
그들은 시시한 이야기로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정작 해야 할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저 아직은, 이라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그들 사이에 놓인 평행선이 기울길 기다리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자신이 방향을 틀 마음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던 중, 이비가 배고프다고 중얼댔다.
그 소리에 시온이 오두막의 선반을 뒤졌다. 그는 거기서 비스킷 따위를 찾아 고민 없이 수프를 끓였다.
모포에 파묻힌 이비는 움직임에 제약이 많았다. 그래서 먹여 줄 것을 눈으로 청해 보았으나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대신 시온은 이비에게 자신의 셔츠를 빌려 주었다. 여러 겹이라 아직 눅눅한 이비의 옷과 달리, 그의 셔츠는 이미 다 말라 있었다.
이비가 시온의 옷을 입으니 소매가 남다 못해 펄럭였다. 이비가 흘러내리는 옷을 주체하지 못하자 시온이 소매 양쪽을 친히 접어 주었다.
이비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든 건 그때부터였다.
고요한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다시 벽난로 앞으로 돌아갔다.
하늘은 이미 밤이 될 준비를 마쳐 어둑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돌아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타닥대는 장작불을 바라볼 뿐이었다.
빗소리가 다시 거세질 무렵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에요?”
이비가 벽난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졸린 건지, 아니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중인지, 그렇게 묻는 이비의 표정이 어딘지 멍했다.
시온이 말없이 쳐다보자, 이비도 대답을 바란 게 아닌 듯 혼자 중얼댔다.
“나는 지금까지 아저씨가 아무 이유 없이 날 구해 준 줄 알았어요. 그래서 취미인가 변덕인가 궁금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무릎에 턱을 기댔다. 이비는 그렇게 생각에 잠겼고, 시온은 이비의 앞선 질문을 곱씹었다.
이비 아리아테는 어떤 사람이냐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었다. 아까 이비가 한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백작님, 저랑 별로 안 친했죠?
하여튼 눈치만 빨라서는.
아까 이비가 한 말은 정답이었다.
참으로 비참하게도, 지금은 물론 몇 번이나 반복된 미래에서도 시온 라우렐과 이비 아리아테는 친하지 않았다.
가장 가깝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친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남자에게 끝까지 마음 한 자락 내주지 않았으니까.
비단 그 남자뿐일까.
그 여자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마치 얼음으로 만든 사람처럼, 심장이 없는 사람처럼.
그러니 그 또한 순전히 변덕이었을 것이다.
―그냥 보여서.
오래된 저주가 풀려 절규하는 남자에게, 그 여자가 무정한 목소리로 했던 말도.
―큰 의미는 없어. 그냥 네가 눈에 띈 거야.
시온의 머릿속엔 그 냉랭한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했다.
그 차가운 여자의 이름은 이비 아리아테.
마냐냐의 성녀.
로히카를 굴복시킨 탑의 실세.
아마네세르를 무너트린 대륙의 구세주.
그리고 쓸모가 없어진 라우렐 백작을 주운 변덕쟁이였다.
대가 없이 아량을 베풀었지만, 과연 그 여자가 그 남자를 길가의 돌멩이보다 낫게 여겼을까?
그건 시온의 가장 큰 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