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카셀 몬트라의 불안 (78/129)


78화. 카셀 몬트라의 불안
2023.02.27.


카셀은 그믐의 저주나 밤의 일족 같은 것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그 폐허의 투기장에서 밤의 일족이 나오는 경기를 ‘달구경’이라 부른다는 소릴 듣고 코웃음을 쳤다.

달이 사라진 밤에 달구경이라니, 관객의 수준에 맞는 촌스러운 이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름다운 철창에 갇힌 밤의 일족과 직접 마주하자, 생소한 충격이 그를 덮쳤다.


‘어린애잖아?’

새장처럼 화려한 두 개의 철창엔 각각 한 사람씩 갇혀 있었다.

한쪽은 가면을 쓴 성인이었고, 다른 한쪽은 얼굴을 드러낸 아이였다.

카셀의 시선은 그중 아이 쪽에 고정되었다.

열두어 살쯤 된 남자아이였다. 양털처럼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를 가진, 어딘지 처연한 인상의 아이였다.


 


“겉모습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저건 사람이 아니니까요.”

카셀이 아이를 빤히 쳐다보자 투기장 주인이 능숙하게 끼어들었다.


“혹시 밤의 일족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아십니까? 아, 물론 귀한 분들이 알 필요 없는 것이지만요.”

카셀이 대꾸조차 하지 않았지만, 투기장 주인은 아첨하며 말을 이었다.


“그믐의 저주는 죽은 용의 원한입니다. 그래서 가장 어두운 밤이 되면 어김없이 산 것을 죽이는데 글쎄 그걸로는 직성이 안 풀리는 모양이라 저와 비슷한 인간을 찾습니다. 제 그릇이 될 만한 인두겁을 쓴 악마를 말이죠.”

투기장 주인이 목소리를 은근히 낮췄다. 마치 아이에게 괴담을 들려주는 이야기꾼 같은 태도였다.


“인면수심이라고들 하죠.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나 금수나 다름없는 자들 말입니다. 그래서 저주와 섞여 괴물이 된 거죠. 놈들에겐 인정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 저주처럼 마냥 죽이는 법만 알죠.”

저게 정말 인두겁을 쓴 악마라면 그걸로 돈을 버는 네놈은 대체 뭐냐.

카셀은 이렇게 묻고 싶은 걸 참으며 아이에게서 눈을 뗐다.

그 사이 카셀의 시종이 눈치껏 물었다.


“저쪽은 왜 가면을 썼지?”

“아, 저놈은 화상을 입어서 몰골이 흉측합니다. 귀한 분들이 역해하실까 봐 가려 두었습니다.”

좋은 핑계다.

하지만 저 안엔 화상이 아니라 수배자의 얼굴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게 바옌 군이 쫓는 밤의 일족이라면 그것도 큰 문제다.

그래서 카셀은 시종을 재차 눈짓했다.


“가면을 벗겨라.”

“아이고, 안 될 말씀입니다.”

“벗겨라, 당장.”

시종의 명령에 투기장 주인이 난색했다.

하지만 시종은 고압적인 목소리로 재차 말했고, 주인은 별수 없다는 듯 엄살 섞인 목소리로 굴복했다.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투기장 주인이 하인 하나에게 턱짓했다.

지목된 하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억지로 철장 앞에 섰다. 그러곤 어디서 가져온 장대를 철장 안으로 머뭇머뭇 찔러 넣었다. 그걸로 가면을 쳐낼 셈인 듯했다.

가면을 쓰고 앉은 밤의 일족은 다가오는 장대 끝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게 가면에 닿기 직전에 손으로 확 낚아챘다.


“으아악!”

단지 그뿐인데 장대를 밀어 넣던 하인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는 괴로워하며 손을 덜덜 떨었다. 장대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은 어느새 시커멓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하인이 썩어 가는 손을 보고 절규하자 투기장 주인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저런.”

투기장 주인은 송구하다는 듯 카셀을 돌아보았다.

그때 카셀은 아까보다 경직된 모습으로 순식간에 손을 잃은 자가 다른 하인들의 부축을 받고 나가는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서 낮게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가면을 쓴 밤의 일족이 철장 밖의 인간들을 조롱하는 소리였다.

그 섬뜩한 웃음소리에 카셀의 시종이 투기장 주인에게 되물었다.


“저건 저 안에서 못 나오는 게 확실한가?”

“물론입니다. 저주로 온갖 패악을 부리는 놈들입니다만, 저 철장의 바닥과 창살 안에 귀한 소금이 꽉 차 있습니다. 그러니 저게 절대 밖으로는 못 나옵니다.”

소금이라는 말에 카셀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곤 다시 시종을 쿡 찔렀다.


“혹시 바옌 군이 이 사실을 알고 들이닥칠 염려는 없는가?”

“하하, 물론이죠. 걱정하실 것 하나 없습니다. 저희도 오시는 분들을 위해 괜한 소리가 새 나가지 않게 주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도 엄연히 성이지 않습니까?”

카셀은 투기장 주인의 마지막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힐끗 쳐다보자 그가 친절히 부연했다.


“혹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도 안전히 피신하실 때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 염려도 마십시오.”

‘이런 미친…….’

투기장 주인의 호언장담에 카셀은 머리가 지끈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바옌 군이 들이닥쳐도 성문을 걸어 잠그고 저항하겠다는 소리다.

그건 귀엽게 말하면 농성이고 엄하게 말하면 반란이다.

게다가 그건 마냥 허풍도 아니었다.

카셀은 여기 들어오려고 상당한 돈을 썼다. 그조차도 숫자의 단위를 다시 셀 만큼 큰 금액이었다.

비스의 여러 귀족이 매달 그런 돈을 내며 여길 찾는다면 이 폐허엔 어지간한 성보다 많은 재물이 쌓여 있는 셈이다.

게다가 당장 병력이 될 수 있는 용병도 잔뜩 모여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바옌 군과 맞서는 것도 가능했다. 이곳엔 그럴 능력과 동기가 이미 충분했다.


‘어디서 이런 정신 나간 것들이 나와서……!’

카셀은 초조함에 이를 갈았다.

투기장의 꼴은 카셀에게 안 좋은 쪽으로 점입가경이었다.

티엔다의 귀족들이 질색하는 것 중 하나가 밑 대륙의 귀족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인데, 이 투기장이 돌아가는 모양새가 딱 그랬다.

그리고 이곳의 기반을 다진 건 카셀이 공평하게 팔아 치운 소금이었다.


‘이비는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카셀이 의문을 품는 순간 이비의 싸늘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너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알아?

생소한 압박을 느낀 카셀은 다시 이를 으득 물며 시종을 찔렀다.


“근래에 우리 성주님 말고 새로운 손님을 받은 일이 있는가?”

“요 석 달간 새로 모신 큰 손님은 성주님뿐이십니다. 아시다시피 특별히 귀한 분만 모시고 있지요.”

주인의 대답에 카셀은 간신히 위안을 얻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이런 종기가 자라고 있는 걸 미리 알아서. 자칫하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온갖 책임을 뒤집어쓸 뻔했다.


‘이번 그믐만 잘 넘기고 여기로 소금을 빼돌린 놈을 내치면 돼.’

그렇게 연결고리를 끊으면 이 문제에서 멀어질 수 있다.

그럼 먼저 낌새를 챈 이비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 독사 같은 계집애는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할 테니까.

이 폐허의 투기장은 만인에게 열려 있지만 ‘달구경’엔 소수의 귀족만 참여할 수 있다.

카셀조차 어렵게 소개받아 들어올 정도였으니 가진 것 없는 이비가 여기로 초대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설령 바옌 군에 정보를 넘긴다 해도 그 나태한 군대는 재빨리 움직이지 않을 거다.

그사이 면피할 구멍을 만들고, 여차하면 먼저 나서서 이 투기장의 문제를 폭로하면 된다. 그렇게 적당히 책임지고 적당히 반성하면 이비 아리아테가 헛수작을 부리지 못할 거다.

카셀은 애써 살아날 구멍을 찾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쯤 오니 미엘 세드로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미엘 세드로는 대체 뭘 바라는 거지?’

―이비네 집사가 비스에서 뭘 하는 것 같아. 그게 뭔지 후작이 직접 확인해 주면 좋겠어.

―미엘이 특별히 알려 준 거니까 잘해. 바보처럼 굴면 죽여버릴 거야.

확인이라니.

그 말은 이비 아리아테의 덜미를 잡아서 수모를 주라는 뜻인가? 아니면 그게 성녀가 되지 못하게 끝까지 버티라는 건가?

그 작은 폭군의 기묘한 성미가 카셀을 다시 압박했다. 결국 한계까지 내몰린 카셀은 짜증이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제 머리 위에 있는 미엘 세드로도 건방지게 대드는 이비 아리아테도 이 시궁창 같은 투기장도 전부 진저리나게 싫었다.

대 몬트라 가의 적자인 카셀 몬트라는 이런 처지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카셀은 그렇게 분을 내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순간 철창에 갇힌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대체 언제부터인지 아이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무표정한 시선에 카셀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밖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와아아!


“오늘따라 볼거리가 많은 모양입니다.”

그 소리가 평소보다 거창한지 투기장 주인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 얼마 후, 밖에서 달려온 하인 하나가 투기장 주인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전했다.

그 결례에 시종이 눈살을 찌푸리자 투기장 주인이 서둘러 설명했다.


“이것 참,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웬 남자가 혼자 연승 중이라고 합니다. 그자 때문에 폭동이 일어날 지경이라는데, 내려가서 보시겠습니까?”

시종이 의향을 묻듯 카셀을 쳐다봤다. 그래서 카셀은 가면 속에서 인상을 썼다. 피 구경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자 카셀의 거부감을 눈치챈 듯 투기장 주인이 덧붙였다.


“게다가 아무도 죽이지 않고 제압하고 있답니다. 이것 참, 어디서 오신 영웅인지 모르겠군요.”

 

***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말에 카셀은 슬그머니 경기장으로 내려왔다.

이 투기장에는 다섯 개의 경기장이 있는데 카셀이 도착한 곳은 그중 가장 작은, 인지도가 낮은 용병이나 노예들이 싸우는 곳이었다.

여기 처음 온 자들은 거기서 잘 버텨야 상위 경기장으로 갈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곳은 겁도 없이 투기장을 기웃대는 애송이나 비렁뱅이들을 몰아 놓고 옥석을 가리는 곳이었다.

그래서 평소엔 아주 별 볼 일 없는 곳인데, 오늘은 웬일인지 그 주변으로 평소에 갑절이 넘는 구경꾼이 몰려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건 비범한 움직임을 가진, 놀랍게도 맨손인 적발의 남자였다.

그 남자는 무기는커녕 방어구도 없이, 심지어 시야를 제한하는 가면까지 쓰고 경기장을 제 앞마당처럼 누비고 있었다.

그는 놀랍도록 빨랐고, 그가 스치기만 해도 무장한 용병이나 노예들은 바람맞은 종잇장처럼 쓰러졌다.

그는 그렇게 맨손으로 적수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쉬지도 않고 내리 열다섯 판을 저렇게 이겼습니다.”

“열다섯 판을?”

투기장 주인이 내려오자, 그 경기장의 관리자가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고했다.

아무리 끈질긴 녀석도 저 목숨 건 경기를 서너 번만 뛰면 녹초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열다섯 판이라니. 게다가 저렇게 연승을 해대면 갈수록 공공의 표적이 될 텐데.

투기장 주인이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관리자가 덧붙였다.


“말도 안 되게 이겨서 혹시 헛수작을 부리는 건가 했는데 아무것도 못 찾았습니다. 깨어난 자들에게 물어도 의심스러운 정황은 없었습니다.”

“어허…….”

이곳은 피라미들의 경기장이다. 그래서 다른 곳보다 구질구질하고 절박하다.

그 와중에 저런 사내가 나타나 여유를 부리니, 용병도 검투 노예의 주인도 경기에 돈을 건 도박꾼들도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저자는 혼자인가? 아니면 패거리가 있나?”

“같이 온 여자가 하나 있습니다. 저쪽에 보시면…….”

관리자가 경기장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가 가면을 쓰고 서 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머리카락은 휘황찬란한 주황색이었다.

그 여자를 발견한 카셀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애인인가?”

“주인 같습니다. 저 남자가 싸우는 동안 연신 콧노래를 부르는 걸 보면 말입니다.”

카셀은 투기장 주인이 하는 얘길 옆에서 듣다가 뭔가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콧노래?’

남의 복장을 뒤집어 놓고 느긋하게 콧노래를 흥얼대는 여자.

카셀도 그런 여자를 하나 알고 있었다.



0